[에듀인뉴스]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교육은 인간의 성장에 관한 활동이다. 인간의 성장을 말하면 우리는 쉽게 신체적 성장만을 생각하지만, “성장”이라는 말은 인간의 여러 가지 특성에 적용된다.

지식, 기술, 판단력, 의지력 등의 능력에도 적용되고,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개성 혹은 인격에도 적용되며, 개체의 유지와 변화에 관계되는 신념, 욕구, 정서, 감정, 기질, 안목 등의 성품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성장은 증진 혹은 증대 등의 양적 개념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안정, 순화, 균형, 세련, 조화, 통합 등의 질적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인간은 성장의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성장의 욕구가 쇠잔되지 않은 한에서는 언제나 교육을 필요로 한다.1)

이돈희, 「교육적 경험의 이해」 (서울 : 교육과학사, 1993), pp. 3-4.

교육에 의한 인간의 성장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다. 지식의 획득, 문화의 내면화, 자아의 실현, 경험의 성장, 혹은 행동의 변화 등으로도 설명된다.

그러나 적어도 인성교육과 관련하여 이해하고자 할 때는, 습관의 개념이 다른 어느 경우보다도 교육적 성장에 대하여 더욱 포괄적인 설명력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교육적 성장은 자체가 지닌 수많은 습관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융합된 체제로서 독특하게 계속적인 변화를 이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특성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맥락에 따라서 그 개인의 “개성,” “인격,” “인성” 등으로 표현한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말들은 한 개인을 다른 개인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특징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특히 “인성”이라는 말은 대체로 두 가지의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 가지는 “도덕적” 개념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 “인성”은 “인격”의 경우와 같이 다소 도덕성의 개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성의 개념은 인격의 개념보다 도덕적 의미에 있어서 다소 느슨한 편이다.

“인성교육”은 한 사회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나 인간관계의 규칙에 비추어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교육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성”은 대체적으로 말해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 혹은 “좋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인간의 특성에 관해서 언급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때의 평가에는 타고난 성품이나 우연적으로 형성된 특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격”의 개념은 다소 다르다. 인성의 개념은 천성적인 것까지를 내포하는 것이지만, 인격의 개념은 자신의 천성을 스스로 다스리면서 그 노력으로 성취한 바를 평가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훌륭한 인격자”라고 할 때, 그 표현은 타고난 좋은 성품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의 노력, 예를 들어 수양이나 극기나 단련으로 성취한 바를 더욱 칭찬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물론 인성교육이 인격의 개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선악을 분별하고 선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요구하는, 즉 인격의 개념에서 철저하게 요구되는 바를 다소 느슨하게 겨냥한다.

다른 한 가지는 인성의 개념이 “도덕외적” 의미, 즉 도덕적 가치의 반영을 반드시 요구하지 않는 개념으로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의 인성교육은 개체가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바로 세운 인간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으로서 “인격”의 개념보다 “개성”의 개념에 더욱 충실한 편이다.

개성의 교육은 각자가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을 지닐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자아실현의 자질을 요구한다.

즉, 우선 지식을 획득하고, 사용하고, 가공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지니게 하고, 또한 감정과 정서의 순화, 관리, 세련을 기하는 자율적 통제력을 소유하게 하며, 나아가 당당한 사회적 관계의 세련된 기술, 태도, 의식을 구유함과 동시에 생존의 기본 조건인 건강한 심신의 유지와 증진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인성의 개념이 인격의 개념보다 도덕론의 관점에서 보면 느슨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천성적 요소까지를 포함하는 개성의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성교육을 말할 때, 대개는 도덕교육적 맥락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인성교육의 현실적 필요나 요구가 도덕적 위기감이나 불안감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성교육의 범주를 전인교육적 개념으로 그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이해방식을 외연적으로 분리시키는 것보다는 두 측면을 상보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는 인성교육은 아마도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아실현의 지속적 유지와 증진을 위하여 자신의 삶 자체를 스스로 관리하는 능력과 의지와 방법을 포괄하는 습관의 체제를 구축하고 그 성장을 도우는 사회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전인적 성장을 겨냥하는 인성교육을 개성적 성장과 인격적 성장의 두 측면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두 측면은 습관의 두 가지 요소, 즉 한편으로 유기체적 개체로서 인간의 특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상호작용하는 대상인 환경과의 관계가 있다.

개성적 성장은 본래 개체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질, 즉 잠재된 가능성의 실현을 중심으로 이해되는 “자아실현”의 개념으로 설명되는 것이고, 인격적 성장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사회적 환경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가치의 내면화와 함께 설명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한 인간적 존재에 대한 관심의 차이에 대한 논리적 구분일 따름이지 개성적 자아와 인격적 자아가 실제로 이원적인 실체로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성과 인격은 개념상 확실한 차이가 있다면, 개성은 인간의 선천적 요소인 자연적 바탕이 훼손되지 않고 신장됨으로써 두드러지는 것이지만, 인격은 오히려 천성에 반하고 이를 다스리면서 스스로 자아의 일면을 재형성한 자신의, 자신에 대한 업적으로 평가를 받는 개념이다.

개성이 강한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러나 원만하고 칭찬받는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 반드시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것도 아니다. 화려한 개성과 고매한 인격을 함께 갖춘 인물이면 아마도 남들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될 것이기는 하다.

다시 언급해서, 인성교육에는 두 가지의 요구가 있다.

하나는 자아실현의 개념으로 각 개체가 지닌 잠재적 가능성의 발현에 일차적 관심을 두는 개성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측면에서 오히려 젊은이들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사회적-도덕적 규칙의 내면화를 중심으로 각 개체가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인격교육이다.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고자 하는 인격교육은, 한편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주어진 규범과 가치의 학습을 바탕으로 하여 신념체제의 균형과 통합을 기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율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을 하는 이지적 성숙을 기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이지적 성숙성에 기초한 신념의 체제에 일치하는 실천적 행동과 생활의 일관된 성향을 높이려는 노력이다.

협의의 도덕교육, 혹은 도덕교육의 중심개념은 인격의 형성과 그 성장을 의미한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고전적 자연주의와 자아실현의 개념


이미 고전적 자연주의자로 분류되는 교육사상가들은 교육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의 계발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대개 루소(J.J. Rousseau)의 교육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멀리는 로크(John Locke)와 코메니우스(J.A. Comenius) 등의 교육론에서도 그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근대적 의미의 자연주의자라고 일컫기는 어렵지만, 교육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안에서부터 밖으로 계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상가들 중에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도 이 계통에 속한다.

이러한 계발론자들에 의하면, 교육적 가치의 원천은 학습자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의 안에 있으며, 교육은 잠재적인 것의 실현 혹은 내면적인 것의 계발이다.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주입하거나 부과하는 것은 학습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압적일 수 있으므로 권위주의적인 원리일 뿐이다.

이에 비하여, 아동중심적 자연주의의 교육사상은 학습자의 의지와 조건과 소망을 교육적 관심의 중심에 두고자 한 것이다. 그만큼 교육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원리라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19세기의 “신교육운동”2)을 주도한 페스타로지(J.H. Pestalozzi), 헤르바르트(J.F. Herbart), 프뢰벨(K.F. Froebel) 등으로 이어졌다.

2) (New Education Movement)

이러한 고전적 자연주의의 교육사상가들이 설명하는 교육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기체의 목표는 유기체 자체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고 한 것에서 이어진 사고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는 어느 것이나 그 자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목표를 자체의 완성에 두고 있는 것이지 어떤 다른 것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생명체도 성장을 통하여 도달할 목표,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힘을 자체 속에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의 자아에 원천적 본질로서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계발의 과정이 교육이다.

계발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잠재성과 실제성의 관계로 설명하는 논리의 틀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3)

3) Aristotle, “On Generation and Corruption,” The Great Books 8 (Chicago: Encyclopedia Britannica, Inc., 1952), Bk 1, Chapters 9-10, pp. 425-428.

도토리와 참나무를 예로 들면, 실제로 존재하는 도토리는 작은 열매에 불과하지만 잠재성으로 볼 때는 커다란 참나무이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듯이 도토리는 우리의 손가락 한마디 정도에 불과한 작은 열매이지만, 그러한 작은 것이 싹이 터서 자라면 때로는 높이 10미터도 더되는 커다란 참나무가 되기도 한다. 그 작은 열매 속에 발아한 새싹이 그런 큰 참나무로 될 가능성이 자체 속에 잠재하고 있다.

잠재성이 실현되는 성장의 과정은 큰 나무가 전봇대로 바뀌는 것과 같은 변화가 아니다. 잠재된 힘이 발현되면서 변화하고 계속해서 자라고 있는 참나무로 되는 것은 성장이지만, 그런 참나무가 전봇대가 된 것은 단순한 물리적 변화일 뿐이다.

잠재성이 실현되는 과정도 변화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 도토리의 “본질적 실체”는 커다란 참나무에서도 유지된다. 그러나 전봇대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유아도 실제성으로 볼 때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생명체이지만 잠재성으로 볼 때는 고도의 세련된 사고를 하고 체계적으로 사물을 처리하는 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이성적 존재이다.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야말로 위대한 생명체로 성장한다. 이러한 잠재된 힘이 성장하면서 실현되는 과정이 바로 흔히 교육적 용어로 사용되는 “자아실현”의 원리이다. 인간은 자아실현에 의하여 개성을 신장시키고 계속적인 성장을 한다.

이와같이 계발설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흔히 교육을 식물의 성장에 비유한다.

이러한 비유는 인간성장의 적절한 비유로서는 부족한 면이 있다.

그들은 습관에 관해서 오로지 잠재적인 것의 발현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적 환경만큼 사회적-문화적 환경에 관해서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다.

도토리가 싹을 돋우어 자라는 데는 적절한 공기, 적절한 온도, 적절한 수분과 영양분을 지닌 토양, 그리고 태양광선 등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성장에 필요한 조건을 제공해 주면 참나무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그냥 자라게 되어 있고, 인위적인 접목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어떤 요인에 의해서도 자라는 도중에 감나무가 되거나 밤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정원사가 할 일은 성장에 필요한 조건을 관리해 주는 일이면 족하다. 그러면 나무는 그 자체에 내재된 힘의 발현에 따라서, 거기에 내재된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그 자체에 잠복되어 있는 완성의 목표를 향하여 저절로 자라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교육자도 인간의 자아실현에 의한 개성의 신장은 바로 그가 지닌 잠재성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성”이란 어떤 의미에서 한 인간을 다른 어느 인간으로부터도 구별되게 하는 특징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잠재되어 있는 성장적 요소의 계발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이다.

루소의 「에밀」(Emile)에서 보여준 자연주의도 잠재적 가능성이 가장 순수하게 계발될 수 있게 하는 길은 어떤 통제도 배제하고 자연 상태에 두는 것이다.

거기에 통제가 필요하다면 인간의 자연적 발달을 방해하는 외부적 힘의 작용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는 타고난 천성과 부패한 사회를 전제로 한 교육론을 펴고 있다.

잠재력의 완전한 균형적 계발, 그것은 교육의 이상이기 전에 오히려 사회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사상가들도 있다.

공리주의 철학자인 밀(J.S. Mill)은 훔볼트(K.W. von Humboldt)를 인용하여 이렇게 동의하였다. 즉,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완전하고 일관된 전체를 향해서 자신의 역량을 최고도로 가장 균형 있게 계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

4) J.S. Mill, On Liberty, The Great Books 43 (Chicago: Encyclopedia Britannica, Inc., 1952), p. 294.

사회적 전통으로 주어져 있는 제도나 관습은 임의적인 권위로써 개성의 자유로운 표현과 발달을 제약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성의 계발은 인간성에 내재해 있는 잠재성의 계발을 의미한다. 거기에 인간으로서의 완성의 목표가 있고, 거기에 기거하는 이성은 사물과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내면적 실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본질적인 존엄성을 지닌다.

그러나 자아실현을 식물 성장의 비유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삶의 장은 그야말로 자연적 환경에 한정하는 것이 된다.

물론 자연적 생명체들도 그들의 생태적 환경이 있고, 그들 간에는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화로서 주어진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같은 것은 별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자연적 환경 속에서만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사회적 환경 속에 태어나고 거기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사회적 환경이란 단순한 대인관계나 인간집단이 형성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생활의 조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포괄적으로 언어, 관습, 제도, 사상, 예술, 신앙, 기술 등의 문화적 환경을 포함한다.

식물과 동물의 세계에는 축적된 문화의 유산이 없다. 동물에게도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연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나 조건화된 행동 형태에 불과하고, 다음의 세대로 전승되고 축적되고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는 유산으로 전승되고 유업으로 승계된다. 문화란 단순히 인간이 개발해 놓은 현실적인 삶의 방식, 규칙, 제도, 창조물 등의 평면적이고 직접적인 내용만이 아니다. 문화는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그리고 스스로를 대상으로 하여 스스로의 삶 속에서 이루어 놓은 업적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깊이로 말해서 역사성을 지니고 넓이로 말해서 사회성을 말하는 것이다. 깊이와 넓이를 가진 문화는 잠재력을 지닌 인간이 태어나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환경의 중요한 부분이다.

문화는 그 어느 부분의 것이든지 간에 단순한 우연적 산물은 아니다. 그것은 그 부분에 참여하여 활동한 사람들의 업적이며 그만큼의 수월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잘 통합되지 않은 상태의 문화 속에서는 부패된 부분이 있고 왜곡된 부분이 있다. 교육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문화체제, 루소가 우려하였듯이 어쩌면 부분적으로 병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 자체에 적응시키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거기에 적응함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와 목적을 성립시키고 이를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한 변화를 시도하면서 자체의 수월성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개체들은 그러한 부적합한 환경에서도 성장을 시도한다.

교육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병든 문화의 장은 그 자체가 성장을 촉진시키는 일종의 소극적 수단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교육적 경험을 위하여 선택하지 않는다.

교육은 선택된 문화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며 각자가 인간 활동의 수월성을 실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