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독일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 박사/ 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원

영화 로렌조 오일 

[에듀인뉴스] 로렌조의 오일이라는 영화를 아시는가? 유명 배우들이 등장했고, 불치의 유전병을 앓는 아들을 위한 치료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매우매우 감동적인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화가 가지고 있는 힘에 매료되었고 영화 자체도 꽤나 흥행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영화를 처음 접했을 당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주인공 아버지가 꾼 꿈이다. 

치료법을 찾기 위해 끝없이 공부하다 지친 아버지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잠깐 든 잠 속, 꿈에서 아들이 나타나 사슬을 당기는 모습이다. 아들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던 아버지가 꿈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의사에게 달려가 들은 말은 ‘경쟁적 억제제(competitive inhibitor)’라는 전문용어다. 

하나의 효소가 기질과 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생체 내 생화학 과정에서 기질 대신 모양이 비슷한 기질 유사 물질이 동일 효소와 결합하여 효소가 자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될 때 특정 물질은 필요 이상으로 축적되거나 부족할 수 있다. 

생체 내에서 필요 이상은 비정상을 뜻하고 이는 질병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하나의 효소를 두고 두 개의 물질(기질 vs. 유사 기질)이 경쟁할 때 몸을 정상으로 이끌 수 있는 기질을 과잉공급해주면 적어도 질병의 악화를 둔화시킬 수는 있는 것이다. 

정확한 물질이 규명되었을 경우다. 영화에서 등장한, 로렌조의 부모에 의해 합성된 올레산과 에루크산을 4:1로 섞은 혼합물은 ‘로렌조오일’이라는 고유명사를 갖게 되었다. 

메탄올과 에탄올은 비슷한 알코올이지만 체내에서 분해되었을 때 생기는 물질 때문에 전자는 치명적이고 후자는 (비교적) 무해하다. 잘 못 해서 메탄올을 섭취했을 때, 약이 없을 경우 응급처치로 술을 먹는 방법이 있다.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에탄올을 선택할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술을 보통 알코올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알코올 중에서 에탄올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는가. 술도 많이 섭취한다면 상당히(!) 유해하다는 사례들이 많지만 그것은 다른 카테고리라 볼 수 있다. 

효소는 아니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비슷한 사례들을 들어보자면 일산화탄소 중독이 있다. 흔히 말하는 연탄 중독, 혈액 속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 산소 대신 연탄 연소 과정에서 생기는 일산화탄소와 결합하게 되고 우리 몸은 산소부족으로 호흡곤란을 거쳐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현상이다. 

한 술 더 떠 일산화탄소와 산소는 헤모글로빈을 사이에 둔 그저 ‘단순한’ 경쟁 물질이 아니다. 일산화탄소는 산소보다 무려 250배 높은 친화력으로 헤모글로빈과 결합한다. 중독환자의 응급처치법은 우선 환기, 그리고 ‘고압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병원으로 가는 것이 관건이다.

이쯤 되면 짐작할 수 있다. 친화력이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한 산소에게 엄청난 물량으로 경쟁력을 높여주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니 많은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느끼게 된다. ‘나’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자문을 해본다. 그리고 이기적인 인간인 만큼, 어떤 사람이 나라는 효소에 결합해서 정상적인 생성물을 만들어내는 건강한 기질인가 하는 질문을 한다. 

세상은 비즈니스가 아니던가. 나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지속시켜 나간다. 여기서 이익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서적인 것들, 감정적인 것들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친화력이 높고, 편하고, 달콤한 것들이 다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시너지를 낸다는 보장은 없다. 도리어 그 반대경우도 많을 것을 과학이 이미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단군 이래 좋은 시절은 없었다지만, 조선시대에 태어나고 싶니 아니면 현대에서 사는 게 낫겠니, 하는 양자택일의 질문을 누군가에서 받았을 때 절대 조선시대는 싫다는 마음이 들었던 걸 보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대가 가진 여러 장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지속적으로 들리는 것도 현실인데, 그 소음들 속에서 나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들을 찾다보니 로렌조오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피폐하게 만드는 요소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익한 일상 방식과 관계들에 대해서. 각박한 세상의 작은 호의와 감사에 대해서. 

오정세라는 배우가 한 발달장애인과 눈높이를 맞춰 함께 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싶다. 나아가 나도 누군가에게 건강한 기질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감동적인 이야기에 거리낌 없이 눈물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나이듦의 한 장점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눈물은 내 안에 축적된 나쁜 것들을 배출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이정은의 크로스오버는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가 9월부터 재개됩니다.

이정은 
이정은

이정은=독일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 석사를 거쳐 같은 대학 생화학 연구실에서 특정 단백질에 관한 연구로 생물학 박사를 취득했다. 귀국 후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충북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냈고 충북대와 방통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복지관에서 세계문화와 역사교실 강좌를 담당하며 어린 시절 꿈이었던 고고학자에 한 걸음 다가갔다. 또 계간 '어린이와 문학' 편집부에서 함께 일하며 인문학에서 과학으로, 다시 인문학으로 넘나들면서 크로스오버적 시각에서 바이오필로피아를 담은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