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기 말 서양인이 카메라에 담은 동대문의 모습이다. 수도 서울의 동쪽 대문으로, 원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멀리 돌아가 이를 필요가 없다. 동쪽의 대문이라는 뜻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의 옛 서울에는 사대문(四大門)이 있었다. 지금도 도심 한가운데에서 일부가 잘 버티고 서있는 이 사대문을 자세히 보면 누각 높은 곳에 현판이 걸려 있다. 사대문의 ‘본명’이다.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 등은 부르기 좋게 만든 호칭에 불과하다.

이 동대문의 진짜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몇 해 전에 화풀이 노인네의 방화로 불에 탔다가 최근에 복원한 남대문의 본명은 ‘숭례문(崇禮門)’이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서쪽에 버티고 있던 서대문의 진짜 이름은 ‘돈의문(敦義門)’이다. 잘 뜯어보면 유교에서 숭상하는 ‘가치’가 한 글자씩 들어가 있다.

동대문은 어질다는 새김의 ‘인(仁)’, 남대문은 사람의 도리를 뜻하는 ‘예(禮)’, 서대문은 사람 사이의 의리를 의미하는 ‘의(義)’다. 그럼 북대문이 궁금해진다. 지금은 청와대 뒤편에 ‘숙정문(肅靖門)이라는 이름을 걸고 서있다. 그러나 그 전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고, 다시 그 전의 이름은 홍지문(弘智門)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이곳 서울 지역에 도성을 지을 때 정도전(鄭道傳) 등 신진 유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했다고 한다. 그 이름이 원래 홍지문에서 숙청문, 다시 지금의 숙정문으로 바뀐 곡절을 소개하는 자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단지, 원래 이름대로 북대문이 홍지문이었다면 사대문의 판도(版圖)는 이렇게 그려진다.

동쪽의 동대문은 사람의 어짊(仁)을 일으키고(興), 남쪽의 남대문은 사람의 도리(禮)를 떠받들며(崇), 서쪽의 서대문은 의리(義)를 두텁게 쌓으며(敦), 북쪽의 북대문은 지혜(智)를 넓히라(弘)는 뜻이다. 앞에서 조금 순서가 헛갈렸는데, 우리 식의 방위 개념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이므로 이에 맞춰 내용을 다시 정렬하자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다.

이 ‘인의예지’라는 게 무엇인가. 공자(孔子)를 기점으로 해서 약 2500년 동안 동양의 사상계를 지배하다시피 한 유교의 근본적 지향(志向)이다. 사람은 자고로 이 ‘인의예지’를 갖춰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게 유교의 주장이다. 조선은 그 왕조의 성립과 함께 중국에서 발달한 유교, 그 가운데 보다 공격적인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운영의 이념으로 삼았다.

여기다가 중국 한(漢)나라에서 발전시킨 음양(陰陽)과 오행(五行) 이론을 접목해 유교의 이념적 지향인 ‘인의예지’에 모두 방향을 의미하는 방위(方位)와 색깔의 개념을 입혔다. 그래서 어짊은 동쪽, 의로움은 서쪽, 도리를 가리키는 예는 남쪽, 지혜를 이르는 지는 북쪽이라고 했다. 그에 입각해서 조선왕조의 설계자들은 사대문에 ‘인의예지’를 앉혀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500년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역시 늘 논란이다. 엄격한 계급과 숨 막힐 듯한 정치제도로 버티다가 생동감을 잃어 급기야 망국(亡國)의 한을 남겼다는 사람도 있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문화를 이어왔다는 점을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세종(世宗)이 창제한 한글과 왜란(倭亂)에서 나라를 건진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있어서 자랑스럽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어쨌거나 옳든 그르든 과거 500년 역사의 조선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군 토대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걸어왔던 우리 조상의 모든 것을 우러를 필요는 없다. 잘한 것과 잘 못 펼친 것을 냉정하게 가려 장점을 취하되, 그 망국에 이르게 한 조선의 단점은 우리가 보완해야 한다.

동대문의 의미는 어떨까. 비록 유교의 근본적 이념인 성리학에 묻혀 조선이 결국 과도한 당쟁(黨爭)과 세도가의 전횡 때문에 망국으로 치달은 점은 살피더라도, 그 안에 담긴 진정한 뜻은 살리는 게 좋다. 동대문의 이마에 걸린 ‘흥인지문’의 ‘仁’은 우리 식으로 풀자면 ‘어짊’이다. 사람이 어질다는 것은 우선 착하다는 얘기다. 그냥 바보같이 착하면 그 또한 매력이 반감(半減)된다.

사람의 도리, 돈독한 의리, 날카로운 지혜와 함께 어짊을 갖춘 사람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상남자’요, ‘알파걸’이다. 그중에서도 어짊은 사람의 본바탕이 착하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르는 기준이다. 비슷한 한자어로 이 어짊을 풀자면 우선 인자(仁慈)요, 선량(善良)이며, 자비(慈悲)로움이다.

그 어짊을 바탕으로 의술을 베풀면 그게 바로 인술(仁術)이고, 집권해 사람들의 삶을 평안하게 이끌면 우리는 그런 지도자의 정치를 인정(仁政)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어진 데다 행동에도 무게가 있으면 그를 “인후(仁厚)하다”고 평한다. 아울러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애(仁愛)다.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성어도 있다. 상대를 대할 때 모두 한결같이 어짊으로 대한다는 말인데, 사람을 차별적인 시선 없이 상대한다는 뜻이다. ‘살신성인(殺身成仁)’도 우리가 잘 아는 성어다. 제 몸을 희생(殺身)해서라도 그 어짊의 덕목을 이룬다(成仁)는 뜻인데, 그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이런 여러 가지 좋은 뜻을 품고 있는 지향적 글자가 바로 ‘仁’인데, 이를 크게 일으키자는 뜻의 현판이 동대문의 ‘흥인지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시대 500년은 실제 어땠나. 걸어놓은 현판은 좋았으나, 그 어짊을 사방팔방에 결코 펴지 못했다. 양반과 상민, 지체 높은 사람과 상놈의 반상(班常)에 관한 구분이 아주 엄격했으며 심지어 왕조 막바지까지 노비가 상존했던 게 조선의 현실이다.

구호가 좋으면 뭘 하나. 그 속을 채우려는 노력이 더 절실했던 것을. 조선시대의 풍상을 걸어왔던 우리 조상의 진짜 모습은 그럴지도 모른다. 그를 보완하려는 줄기찬 노력이 이어져야 하는데, 아직 힘겹게나마 버티고 서있는 동대문이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는 않을까.

<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 유광종 저, 책밭, 2014년 중에서-

*위 글은 뉴스웍스와 유광종 기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