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몇 년 전 서울의 한 지자체가 지방 단체와 연계하여 서울 가로수 길에 사과나무 75주를 심기로 했다. 작년에도 서울시는 또 다른 지방의 지자체와 공조하여 시민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사과나무 150주를 식재하기로 발표했다. 

왜 시민들은 이렇게 가로수 길에 사과나무를 심자고 제안하고 지자체는 이를 수용하는 정책을 실행할까? 서울시의 한 관리는 “시민에게 고향의 정취와 가을의 풍요로움, 볼거리가 제공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짐작컨데 어쩌면 나무 심기는 세상에서 정말 보람 있는 일인 것 같다. 

필자는 최근에 20년 전에 근무하던 학교를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그 당시 학교 울타리를 따라서 나무를 심었던 곳을 우연한 기회에 다시 찾게 되었다. 당시 한 그루의 작은 묘목이 이제는 제법 필자의 키를 훌쩍 넘을 정도이고 학생들과 함께 심었던 나무들이 무럭무럭 성장한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로 성장한 나무는 정말 보람과 만족을 주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에 이러한 감동과 느낌을 한 번 더 의미 있게 되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숙고할 수 있는 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가 말년에 쓴 불과 4,000여 단어로 이루어진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짤막한 작품을 통해서다. 

앙드레 말로는 그를 20세기 프랑스 대표 작가 3인 중 하나로 꼽았다. 또 헨리 밀러는 ‘장 지오노는 프랑스와도 바꿀 수 없는 작가“라며 그의 문학성과 평화주의, 인류애를 칭송했다. 이 책은 ‘나’라는 사람을 통해서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주인공의 고독하지만 위대한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잠시 책 속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야기의 다음 부분에서 인지할 수 있다. 

“가려고 한 곳에 이르자 그는 땅에 쇠막대기를 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구멍을 파고는 그 안에 도토리를 심고 다시 덮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누구의 땅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도토리 100개를 심었다.” 

이야기 속에서 그는 3년 전부터 황무지에 홀로 나무를 심어왔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도토리 10만 개를 심었다. 그리고 10만 개의 씨에서 2만 그루의 싹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위대한 주인공이었다. 나중에 산림 감시원조차 ‘천연’ 숲이 자라는 것을 위태롭게 할지 모르니 집 밖에서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황폐했던 마을에는 희망이 다시 돌아왔다. 귀향한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해서 마을을 일구고, 채소밭에는 온갖 꽃과 채소들이 싹을 틔웠다. 나지막한 산기슭에는 보리와 호밀이 자랐다. 8년 뒤에는 이 고장 전체가 건강과 번영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오직 정신적, 육체적인 힘만으로 황무지에서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렇다면 다 자란 한 그루의 나무는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까? 잠시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에는 사랑스런 소년 친구가 있었다. 소년은 나무를 좋아했고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자랐다. 어느 날 소년이 나무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자 나무는 자기의 과일을 팔아 쓰라고 했다. 소년은 그렇게 했다, 몇 해 후 소년은 다시 나무에게 집이 있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무는 제 몸의 가지를 잘라서 제목으로 쓰라고 했다, 소년은 집을 짓기 위해 가지를 베어갔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청년이 되어 다시 찾아온 소년은 먼 곳으로 떠날 배 한 척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나무는 이번에는 제 몸통을 베어 만들라고 했다. 소년이 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가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 돌아온 그를 위해 나무는 베어진 나무 밑동에 앉아서 피곤한 몸을 쉬게 해주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찾아온 그 소년을 맞이한 나무는 더없이 행복했다.” 

교육하는 마음도 나무를 심는 마음과 같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무한 사랑으로 교육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어디 쉬운 일일까. 사랑으로 심어 다 자란 나무는 만인에게 차별 없이 자신이 받은 사랑을 되돌려준다. 

마찬가지로 밑 빠진 독에 끊임없이 물을 준 결과 물기를 머금은 콩나물이 자라듯이 아이들은 여전히 교사의 사랑을 머금고 성장한다. 그 효과는 세상의 셈법으로 측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찍이 법정 스님도 "나무를 심고 보살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을 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학교의 교사는 무엇으로 가슴이 따뜻해질까?

요즘 교육을 말하면서 ‘학생은 많으나 진정한 제자는 없고, 교사는 많으나 진정한 스승은 없다’고 한다. 이는 분명 대한민국의 불행이자 우리 교육의 비극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다시 순환하는 선순환의 원리다. 나무를 심는 마음처럼 학생에게 아낌없이 주는 교사의 사랑은 효과가 크다. 그것은 학생의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이고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의미 있는 삶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이루어졌다. 교사는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랑의 전도사’가 되어야 한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19의 사태 속에서 지쳐있는 학생들에겐 ‘사랑의 배터리’가 되어 충전을 시켜주는 것도 교사의 몫이다. 

교육의 위기, 사제지간의 소원(疏遠)함을 말하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나무를 심는 마음은 따뜻함을 넘어 참다운 인격을 드러내는 일이다. 대가 없이 자신이 사는 환경을 돌보고 가꾸는 일은 웬만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고는 힘들다. 역사는 그런 위인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칭송한다.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와 같이 나무를 심는 마음, 그것은 곧 후세대를 위해 밑 빠진 독에 물을 주듯이 교육하는 마음이며 나아가 세상과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의 실천이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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