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http://blog.daum.net/andante_cantabile/762)

[에듀인뉴스] 이제쯤 옛시절 고향마을 초등학교의 추억이 못내 그리운 것은 낯선 인터넷 수업의 차가움과 지긋지긋한 코로나19 펜데믹 때문이다.

김재호 작사 이수인 작곡의 ‘국화꽃 저버린 겨울뜨락에’는 고향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가곡이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다. 독자들과 함께 노랫말을 감상하고 싶어진다. 
  
창 열면 하얗게 무 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들에서 보라/ 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달 가고 해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골 초가마을에/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 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 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세종시 조치원역에서 710번 버스를 타면 고복저수지를 지나 용암리와 쌍류리를 거쳐 종점인 청라리(靑蘿里)에 이른다. 청라리는 세종시의 가장 서쪽 끝 변방에 위치하고 있다. 변방이란 용어는 본래 국경이나 타지방의 접점을 이루는 외진 곳을 가리킨다. 

자동차와 노선버스가 드물던 시절 청라리는 조치원역에서 가장 외지고 높고 먼 곳이었으며, 동시에 푸르고 아름다운 시골이었다. 이 땅을 넘어서면 공주의 강역이 펼쳐진다. 청라리 위 터인 나발터와 아래 터인 양대(陽臺)에서 발원한 시냇물은, 비암사 방향에서 시작하여 쌍류초등학교를 거쳐 흘러온 시냇물과 합쳐져 쌍류(雙流)가 된다. 

이 양 끝의 시냇물 가운데 삼각주인 델타 모양의 동네가 쌍류리이며 이곳에 기름진 물 논이 펼쳐지고 초등학교가 세워진 것은 당연지사다.

조치원의 시내 영역을 벗어난 동쪽의 고복리부터 서쪽의 언덕 끝 청라리까지 4개의 동네(리) 아이들은 모두 쌍류초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엄친이 쌍류초를 졸업했고 우리 4형제가 모두 동문이며 4개 동네의 동무들이 동창이다. 

우리 모두는 두 개의 시냇물 사이에서 공부하고 뛰어놀았으며 어디든 산재해 있는 들판의 연못을 뒤지며 물고기를 잡았다. 새삼 동네 이름을 들먹이며 추억하는 것은 동네 이름도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청라(靑蘿)리는 이름 그대로 예나 지금이나 파란 댕댕이 풀넝쿨처럼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7,80년대만 해도 벼농사와 보리농사가 주를 이루었고 부모들은 그 마른 곡식을 먹인 소를 팔아 자식들을 도회지 학교에 유학 보냈다. 청라리의 윗터 나발터 사람들은 순하고 억세지 않았다.

반면 아래 터 양대(陽臺) 사람들은 직격탄으로 아침햇살부터 저녁놀까지 받아서 그런지 성질이 예민하고 드센 편이다. 해를 걸러 양대 뒷동산인 왕재의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남정네들이 나왔다. 화병을 삭히지 못한 탓이다.

쌍류리는 북쪽의 생촌에서 고복저수지의 상류에 위치한 솔티에 이르기까지 온통 물로 둘러싸여서 그런지 사람들 성질이 한군데로 모이지 않고 단합이 잘 안 되었다. 청라리에서 시작된 물이 쌍류리를 거처 용암리에 이르면 제법 깊고 넓은 시냇물이 되었다. 

그 물을 막아서 ‘고복저수지’를 만들었다. 용암(龍岩)리는 용이 물속에 엎드려 있는 형국이며 동네 이름조차 저수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아마 어느 고대에 용암리는 본래 저수지나 큰 못이었을 것이다. 

용암리 사는 동무들은 유난히 드셌다. 싸움도 잘하고 시끄럽고 씩씩했다. 지금도 씩씩대며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은 태식이며 희영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역시 동창회의 주역들이다. 
 
고복리 아이들은 가장 먼 곳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제일 일찍 등교했다. 창수며 억수가 지각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고복리 아이들은 유난히 남녀 동무들끼리 결속력이 강하고 다정했다. 고복(高福)리는 복이 높다는 뜻을 가졌지만 슬픈 동네이기도 하다. 

4개 리 중에 남자들이 각종 사고로 많이 죽은 편이어서 부인들이 슬픈 곳이라는 말이 있다. 아래 터 고복리는 수장이 되었고 위 터 고복리는 저수지가 되어 절반만 수장되었다. 온 동네가 수장되는 화는 면했지만 다급히 피난 가다 보니 복이 높은 언덕으로 몰려가서 겨우 숨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안쓰럽다.

청라리에서 발원한 물이 쌍류리를 거쳐 용암리로 흘러 고복저수지를 이루고 그 물이 조천으로 내려가서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합쳐지니, 청라리는 곧 세종시의 모천이며 젖줄이다. 

쌍류초등학교

4개 동네는 자신의 몸을 내주어 세종시민을 먹이고 있으니, 변방의 희생과 은덕이 크고 깊다. 고복저수지로 가로막혀 더욱 오지가 된 청라리와 쌍류리의 주민들, 온통 물에 잠겨서 실향의 아픔을 겪은 용암리와 고복리의 동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리도 사무치게 아름다웠던 내 고향의 강역은 행정도시 세종시가 들어서면서 퇴색되고, 부동산 투기와 서울 사람들의 범람으로 욕망의 도시가 되었다. 애향심은 지리멸렬하고 신도심과 구도심의 부조화로 인심은 흉흉해졌다. 

원주민은 구도심에 몰려 살고 서울사람들과 호남사람들이 신도심에 눌러앉아 신(新)토호세력을 형성했다. 다만 인구의 증가로 폐교 위기에 몰렸던 내 모교 쌍류초등학교는 혁신학교가 되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어서 여름이 지나고 창 열면 하얗게 무 서리 내리는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김대유 경기대학교 초빙교수
김대유 경기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