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체험적 사고와 교육! 이는 과거의 해묵은 이론을 소환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영국의 경험론과 독일의 관념론적 철학사상의 대립을 부르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시대에 근대철학의 두 가지 방대한 대립적 사상을 논하는 것은 별로 효용성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교육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계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살아있는 인류의 메시지이고 앞으로도 인류가 살아가야 할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특히나 우리에게는 혁신교육과 맞물려 체험적 사고는 학교 현장에 더없이 필요한 변화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선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증폭되어 왔고 그것은 곧 창의적 체험학습으로 이어져 왔다. 

현재는 유치원과 초중고 모든 학교의 2015 개정 교육과정의 한 중심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전통적인 관념적 사고의 관성이 여전히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남아 경험적 사고를 고양하려는 현장의 실천적 의지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다시금 왜 체험적 사고이고 이를 키우는 교육에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은 지리학, 경제학, 경영학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분리된 공간에서 공부할수록 학문적 탐구 대상인 현장과는 거리가 먼 학문으로 전문화된다. 

공부는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며 손발을 움직여 실천하는 가운데 점차 완성되어 간다. 이는 한 마디로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내 몸을 움직여 적용하고 체험하지 않으면 결코 나의 것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20년 경력의 구멍가게 아줌마와 동일 경력의 대학교수 지능지수(IQ)를 비교하면 구멍가게 아줌마가 더 높을 수 있다. 이는 우석훈이 《나와 너의 사회과학》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왜 그럴까? IQ는 어떤 문제를 단순하게 이해하고 해결하는 지능을 넘어서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복합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구멍가게 아줌마는 구매, 품질, 회계, 재무, 마케팅, 인사, 노무 등을 혼자서 다 해낸다. 하지만 경영학을 전공한 교수는 자기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세분해서 공부한다. 결과는 어떨까? 

당연히 경영 전반을 폭넓게 이해하는 능력은 구멍가게 아줌마보다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체험 없이 보편적 이론으로 지식을 구축하려는 것은 편협하고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는 “몸으로 체득했기에 그것이 밑바닥의 진실이며 마지막 진실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처럼 밑바닥 진실, 마지막 진실은 몸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몸이 동반되지 않는 관념적 공부는 진심을 담아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밑바닥 진실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습득한 언어에는 생명력이 있고 울림이 있다. 관념의 거품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처럼 체험의 열기 속으로 빠져야 자신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면 재능은 오로지 몸으로 실천하고 도모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항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경험을 지나치게 포장해서 강조할수록 과거에 얽매인 진부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경험은 최고의 스승이라 하지만 그 반대로 또 다른 가능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경험은 부단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경험에 안주하는 순간 발목이 잡혀 오히려 자신의 성장에 독이 되기도 한다. 또 현장과 몸이 만나는 것에서 가치관의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고뇌의 깊은 바다에 빠져 사투를 벌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죽비를 맞는 것과 흡사하다. 이를 계기로 지식인의 자리매김을 다시금 확실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지식인은 진정으로 고통 곁에 있는 사람이어야지 고통 곁에 있는 척하다 떠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 

교육의 핵심은 타자의 아픔을 감싸는 능력과 그 아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인지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스스로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 공감 능력은 책상에서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몸으로 체험해야만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책상에서 배울 수 없는 것과 같다.

간단한 예로써 열십자를 놓고 보자. 교통경찰은 사거리를 생각한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으로 생각하고 약사는 녹십자라고 생각하며 목사는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체험해본 영역 내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부인과 의사가 과연 열십자를 보고 교통경찰처럼 사거리로 생각할 수 있을까? 답은 분명하다. 이처럼 역지사지는 말과 같이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그동안 지나치게 책상머리 공부를 통해 지능을 연마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교육 패러다임으로 인해서 우리는 지식과 삶이 분리되는 이분법적 교육을 실시해 온 것이다. 이에 대한 후유증은 오늘날 학교 교육의 본질은 설 자리를 잃고 그 속에서 공교육은 기능을 상실한 채 오직 상급학교 입시를 위한 예비학교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국민의 불신을 촉발하여 교육 개혁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상황에 와 있다. 이러한 현상이 날로 심화되어 이제는 이른바 신뢰를 상실해 설 수 없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의 상태를 넘어 백 가지 약 처방이 무색한 무원고립(無援孤立)으로 접어들었다. 

다시금 우리 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돌아보자. 배움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체험적 사고를 간과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이론적인 지식을 현장과 유리시켜 가르치는 지금의 교육 패러다임은 전면적인 해체 위기에 놓여 있다.

현장과 무관한 생각은 쓸모가 없다. 그동안 우리는 교육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답은 현장에 있다"고 누차 강조해 왔다.

이제 우리 교육이 그동안 탁상행정이나 외국에서 들여오는 이국적인 교육 콘텐츠를 벗어나 우리의 고유한 삶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정리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하는 체험적 사고를 중시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배움이 즐겁고 실생활에 유익한 교육으로 전환되는 보다 적극적인 창의적 체험학습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 나오는 말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 섬의 어른들은, 비록 오늬죽의 맛에 날카롭지는 못했어도, 소금 그 자체의 맛에는 너나없이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어김없이 알아맞혔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