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제 관심 영역은 한국 사회에서 교사의 전문 직업성, 학력시장과 입시제도 등입니다. 이 요소들이 각기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앞으로 배민 칼럼을 통해 순차적으로 풀어나가려 합니다. 특히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은 교육학적으로 중요한 교직관 중 하나이면서도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서 가장 무심하게 지나쳐온 개념입니다. 아무래도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게 될 것 같네요. 

[에듀인뉴스] 복잡하고 많은 교육문제들(가령 입시제도나 진학)에 대해 한국의 교사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교사가 교육 현실과 교육 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교사가 자각하든 못하든 그 자신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도 연관되어 있다.   

가령 사회를 시장의 원리로 이해하는 시각으로 볼 때는 교사가 입시에 가급적 개입을 자제할 수 있는 국가시험 제도 그리고 객관적으로 학생을 평가할 수 있는 내신 성적 위주로 입시가 가야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지난 30여년간 그 비중이 높아져온 수시 제도는 분명 학력 시장의 관점에서 (학생 선발을 자율적으로 하고자 하는) 대학이 선호하는 제도다. 학력시장에서 대학이 학생 선발에 행사하고자 하는 자율권(autonomy)은 입시의 신뢰성(reliability)과 현실에서 많은 부분 상충하기도 한다. 

반면 사회를 시장의 관점이 아닌 공동체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교사가 적극적으로 학생 평가에 개입할 수 있는 학종 비중이 높은 현재의 수시제도를 긍정적으로 볼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학교는 ‘경쟁을 심화’시키게 되는 시험에 의존하기 보다 ‘협력을 배워’ 가기 위한 장소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진학에 있어서 어디까지 교사가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애매모호하게 남는다. 그보다 문제는, 수시 비중이 높은 입시 체제에서 교사의 개입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한국에서 근래 30여년간 지속적으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후자의 사회적 시각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경향이 강화되어 왔다고 본다. 

가령 수시 전형의 비중이 높아지고 협동학습, 교실 민주화 등 가치가 중시되어온 추세는 이를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이러한 평등과 공동체, 복지와 인권 등의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시각이 20세기 내내 역사학, 사회학, 교육학 등 많은 학문 분야의 주류 시각이었다. 

하지만 주류의 시각이 옳은 시각을 뜻하지는 않으며, 많은 경우 논쟁적인 성격을 가지기도 한다. 가령 모든 인간이 상호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칸트적 철학의 원리는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학생의 인권, 노동자의 인권 등의 개념은 상충하는 대립적 개념을 전제로 한 논쟁적 사안이기도 하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미국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는 여성의 인권, 흑인의 인권 등 분절화된 집단적 인권에 초점을 맞추는 주장을 일종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시도로 간주한다.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서 보자면, 전자보다 후자, 간략히 말해 시장보다는 공동체에 경도되는 시각은,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얻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 사이의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한) 갈등을 집단적 통제(collective regulation)를 통해 해결하는 사회를 지향하게 된다. 

이는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데, 그 본질적 이유는 세상에서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가는 방법은 결국 ‘법적으로는’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적 재산권 및 사적 자치에 근본을 둔) 경쟁(competition) 혹은 (개인의 사적 영역에 국가가 복리증진을 위해 개입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믿음에 근본을 둔) 강요(enforcement). 

학교는 경쟁과 강요의 두 법적 원리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많이들 생각한다. 가령 협동(cooperation)은 법이 아닌 윤리의 문제이며, 학교는 법보다는 윤리로서 학생을 지도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윤리가 ‘강제’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윤리가 아니라 강요의 차원에 발을 디디게 된다. 유교 성리학의 국가 조선의 역사를 보면 된다. 

지난 십여년 넘게 학교에서 교칙을 놓고 존재해온 학교 관리자와 학생 사이의 서로 다른 입장이 순수히 윤리로서 해결되었을까?

많은 학생들은 학교의 ‘윤리적’ 지도에 철학적 토론을 통해 문제를 접근했다기보다 자신들에게 ‘불편한’ 학교 교칙에 대항해 자신들의 ‘민주적’ 저항(다수의 목소리라는 힘)을 통해 타협을 얻어내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왜 그랬을까? 애초에 학교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그 본질로 할 수 밖에 없는 학교의 ‘윤리적’ 지도(이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님)는 학생이 그에 맞서 철학적 토론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학교 교육 행위의 상당수는 경쟁과 강요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수업과 생활지도는 강요에, 진학지도처럼 강요가 힘든 영역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입시 경쟁의 구도 자체에 학교와 교사들이 의존해왔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시장의 원리에 혹은 공동체의 가치에 무게를 두는 상이한 사회적 시각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을 시장의 원리로 바라본다는 시각 자체에 한국 사회는 많은 편견을 갖고 바라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가령 이러한 시각의 교육 접근은 입시 경쟁을 증폭시키고 교사가 학생에게 진학에 대한 과도한 중압감을 갖도록 한다고 보는 오해가 그것이다. 

사교육에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을 시장의 원리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학교 교사의 지도도 진학이 아닌 진로에 국한 될 수밖에 없으며 학생 개인의 욕망 실현에 교사의 주관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실제로 진학을 지나치게 학생을 위한 입시전략의 차원에서 접근해온 한국의 학교 현장의 모습은 일선 교육청들과 학교 교사들이 공교육의 역할과 의미를 진정으로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교육을 시장 아니면 공동체의 논리 중 양자택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고의 편향성(bias)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기 쉽지 않은 존재다. 자신의 사고가 어떤 방향에 기울어 있는지를 ‘자각’하게 된 이후에야 교사 자신이 갖고 있는 교육적 행위와 원칙들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사고의 피상성은 사고의 편향성과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시장이라는 단어에 탐욕을, 협동이라는 단어에 이타심을 떠올리는 차원의 피상적 사고, 즉 사회적 시각이 가진 논쟁성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유아적 사고와도 같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인간을 함부로 판단해선 안되듯,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으로 생각 없이 가지게 된 사회적 시각은 그 시각의 주체인 개인을 편협하게 만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교사로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인문학적 감성과 공감 능력도 중요하겠으나 교사로서 처해 있는 현실(교실과 학교, 제도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성과 판단 능력 역시 간과 되어선 안 된다. 

실제로 시장보다 공동체 가치에 경도되는 시각은 갈등론적 사회관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가진 자에 의한 착취로부터 못 가진 자를 보호해야한다는 사회적 시각, 즉 전통적으로 맑시즘(Marxism)에서 주장하는 사회관에 그 철학적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적 시각의 정치성에 무심한 것과 진영 논리를 경계하는 것은 다르다. 

오히려 전자는 후자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우파적 혹은 좌파적 정치경제관의 차이 역시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개인의 시각 차이를 반영하는 문제다. 

학생들에게 늘 자유롭고 창의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교사로서 주된 임무 중 하나임을 인식하면서도 정작 교육에 대해 교사의 사고가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어떤 사회적 시각에 의해 확증편향의 논리적 오류 속에 빠져 있게 되면 아이러니라 해야 할 것이다. 

 

배민 서울 숭의여고 역사 교사
배민 서울 숭의여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