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나는 1980년, 그 해를 살았다. 그게 역사가 된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나는 2020년을 살고 있다. 올해가 새로운 역사가 되리라는 예감이 강렬하다. 시대와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에듀인뉴스] 코로나 19는, 등교한 학생들마저 다시 독방으로 집어넣는다. 교실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친구끼리 같이할 수 없고 친구라고 가까이할 수도 없다. 함께 숨 쉬는 것조차 위험하다며 시시때때로 교실을 환기하라고까지 한다. 학교에 나왔지만, 학생들은 저마다의 독방에 내몰리는 셈이다.

연필 좀 빌려달라는 친구의 청을 거절하면, 예전에는 밉상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청을 선선히 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진상이다.

연필을 빌려주는 것이 우정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주고받는 끔찍한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과는 정반대의 행동이 칭찬받는 뉴노멀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도 학교에 나오면 그나마 낫다. 마스크를 끼고 대화를 하지만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의 친근한 눈빛이 거기에 있고, 껴안지는 못해도 느껴지는 친구들의 온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걸핏하면 범람하는 코로나 19는 학교에 나온 학생들을 다시 진짜 독방으로 처넣는다.

이렇게 하다 금방 끝날 것이라면 힘들어도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그렇게 쉽사리 물러갈 것 같지 않다. 어떤 이는 짧게 잡아 2024년까지라고 하고, 어떤 이는 감기처럼 아예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인류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전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하지만 독방에서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고, 그러기에 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었지만, 코로나 팬데믹의 근본적 원인은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뒤늦게 배우고 있다. 코로나 19가, 나는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해 주었다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코로나 19가 가져올 전혀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시장의 실패에 따른 강한 국가의 귀환을 많은 사람이 예견한다. 맞는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세계화의 시장이 얼마나 야만적인지를 우리는 몸서리를 치며 목격하였다. 넘쳐나는 주검을 감당할 수가 없어, 미국에서는 냉동 탑차에 시신을 보관하기도 하고, 그럴 사정조차 안 되는 남미에서는 시신을 관에 넣은 채 골목길에 쌓아 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가져온 더욱 파괴적인 양상을 우리는, 눈앞에서 보아야 했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광경을 광화문 광장에서 보아야 했고, 사람을 살리라고 주어진 메스가 도리어 병든 사람들의 가슴을 헤집는 참혹한 광경을 히포크라테스의 동상이 있는 건물에서 보아야 했다. 종교의 이름으로 의술의 이름으로 민주의 이름으로 신이 죽고 사람이 죽고 민주주의가 죽어가고 있었다.


“아프냐?”

“…….”

“나도 아프다.”


아주 오래전 「다모」라는 드라마에서 종사관 황보윤이 사랑하는 사람 채옥에게 한 말이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마르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든 공감의 언어였다.

하지만 이 시대는 공감의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 아프다고 외쳐도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메아리만 들려올 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궁핍한 시대를 살아간 시인 윤동주를 소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출처=https://blog.naver.com/lhe8318/221558475243)
(출처=https://blog.naver.com/lhe8318/221558475243)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길」


시 속의 화자는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고 있다.

그런데 문득 화자의 시선이 지상의 돌담길만을 내려다보다가 천상의 하늘로 향한다.

아, 거기에 푸른 하늘이 있었다. 그 하늘에, 그 하늘의 푸른 모습에, 시적 화자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존재 각성은 부끄러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준엄한 자기 성찰이다. 막스 쉴러의 지적대로, ‘부끄러움’은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동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그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다. 참된 나를 찾으려는 자기 성찰은 시대 인식으로 그 지평이 확대되어,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는 저항과 위안의 목소리로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20세기는 근대적 삶의 압축판이었다. 보이는 ‘외부 세계’에 집착하여 욕망을 좀 더 빨리, 좀 더 많이, 좀 더 높이 쌓아 올리려고 발버둥 친 물질 만능의 시대였다. 맘몬(Mammon)이라는 거대한 신 앞에 모든 가치가 무릎 꿇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시대였다.

그런데 코로나 19는 근대적 삶의 터전을 흔들어 놓으며, 그 사실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놈은 우리의 허약한 인간성마저 그 바닥을 드러내게 하며, 독방에 처박힌 우리를 마음껏 조롱하고 있다. 탈근대(脫近代)를 향한 움직임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정한 ‘나’를 알자는 움직임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자아를 최초로 문제 삼은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그가 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세상을 인식한다. 이때, 나의 지식이 반드시 참인 것만은 아니다. 거짓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아’와 ‘그런 지식의 참과 거짓을 끊임없이 검토하는 반성적인 자아’를 구별하여, ‘반성적 자아’를 참된 나라고 하였다.

정말이지 근대적 삶에서 사람들은 ‘나’만의 영역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여 버렸다. 나와 다른 것은, 그것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간에 나의 필요에 의해 나에게서 배제되거나 나의 틀에 포섭하여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조차도 ‘나’의 필요에 따라 분류되는 사물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성에서 레비나스는 ‘타자의 사유’를 내놓았다. 나의 시각에서 벗어나, 남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그래야지 다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 세상은 그런가. 학교에서 가장 순수한 아이가 ‘목사’가 되고,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가 ‘의사’가 된다. 그렇게 정결한 아이가 그렇게 명철한 아이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납득 되지 않는 광경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이 살아 있다면 그는 이렇게 통곡할 것이다.

(출처=https://blog.naver.com/rah21/220009733369)
(출처=https://blog.naver.com/rah21/220009733369)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절망」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해도 갈까 말까 하는 곳이 의대이고, 그런 출중한 성적에 탁월한 성장까지 보여 준 이가 의사이다. 한마디로 의사는 학교 교육의 이데아이다. 그런데 왜들 저렇게 되었을까.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한때는 학생이었고, 그들을 그렇게 괴물로 만든 데에는 교사의 책임도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러고 보니 진정으로 반성해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아프지만 사실이었다.

 

30년 넘게 교단을 지키다가 이제는 물러난, 엊그제만 해도 ‘교사’였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앞에 무릎 꿇는 통렬한 자기반성뿐이었다. ‘반성적 사유를 통한 자아 찾기’라는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나’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

인간은 홀로 있으면서도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학교, 가만히만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침묵의 학교,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기만의 학교, 부끄러움을 가르치지 못한 야만의 학교에서 ‘나’는 오랫동안 너무 잘 지내왔다.

그러면서 성적을 이야기하고 성장을 이야기하고 교육을 이야기하였다. 그런 ‘나’를 부디 용서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