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중국, 가까운 듯하면서 이질감이 드는 곳이다. G2로 미국과 견주고 있는 중국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을 비웃는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 지리상으로 가까워 문화적으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중국. <에듀인뉴스>는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를 통해 중국의 도시에 살아가면서 느낀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현지에서 중국을 접하고 알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인해 중국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과거에 대한 이해와 미래를 예측해보는 작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알다가도 모를 중국!

난징 로커우 공항에 전시된 효릉신도의 석상로 사진.(사진=김현진 교사)
난징 로커우 공항에 전시된 효릉신도의 석상로 사진.(사진=김현진 교사)

중국의 4대 고도 '난징'

[에듀인뉴스] 난징의 고대 역사는 10개의 왕조와 관련이 있다.

최초로 왕조의 수도가 된 곳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이 도읍을 정한 때로 당시에는 건업이라고 불렸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 오, 동진, 송, 제, 양, 진의 6왕조의 수도였기에 육조고도라고도 부른다.

1356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난징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하면서 명나라의 수도로 정하였지만 명나라 3대 영락제 때 다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난징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며 타이완으로 국민당 정부가 옮겨가면서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아직도 타이완(중화민국)의 실제 수도는 타이베이지만 명목상 수도는 난징으로 되어 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과거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의 위상을 고의로 떨어뜨렸지만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장수성의 성도로서의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산릉에서 내려다 본 난징 시내.(사진=김현진 교사)
중산릉에서 내려다 본 난징 시내.(사진=김현진 교사)

중국에는 4대 석굴, 3대 고성 등 손으로 꼽는 것들이 매우 많다. 베이징, 난징(남경), 시안(장안), 뤄양(낙양)은 함께 중국의 4대 고도라고도 불리고 여름에 굉장히 더워 우한, 충칭과 함께 중국의 3대 화로라고도 불린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난징을 방문하게 되니 설레기도 했지만 여행자의 관점에서는 여러 부분을 고려해야 했다. 막상 가면 덥거나 추운 날씨에 피곤함과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여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추억으로 남게 되며 그 기억을 반복하려고 하는 것이 여행의 매력인 것 같다.

‘6월 초 난징은 덥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덜 덥다’는 이야기도 있다.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옷 몇 벌을 더 챙기게 된다.

가족 여행 1주일 전 비행기 예약한 곳으로부터 비행 일정이 익일로 대체된다는 메시지가 왔다. 중국 자체가 항공편 지연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사전에 비행 자체가 취소되고 해당 항공편이 익일로 대체되는 것을 겪으니 매우 당황스럽다.

여행 자체를 포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거주하고 있는 집이 공사를 하는 관계로 어차피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난징행 항공권을 바로 전 날 새로 예약해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난징행 비행기는 아침 8시 50분 출발이다. 2시간 전쯤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공항까지 1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적어도 5시쯤엔 일어나야 한다. 어쨌든 전날 짐을 꾸리고 일찍 잠을 청한 후 일어나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다롄에서 난징 로커우 공항까지는 1시간 30~50분 정도가 걸린다. 잠을 잘 못 잔 관계로 피곤함이 몰려온다.

국민당 정부가 있던 총통부 난징은 고대의 수도이기도 했지만 장수성의 성도 지금도 번화한 도시이다. 그래서 대중교통이 매우 잘 되어 있다.

난징 부자묘 인근 친하이허(秦淮河) 야경.(사진=김현진 교사)
난징 부자묘 인근 친하이허(秦淮河) 야경.(사진=김현진 교사)

루커우 공항에서 난징의 최대 번화가인 부자묘(夫子廟)와 신지에코우(新街口)까지는 지하철로 연결이 되어 있어 이동이 편하다.

부자묘 근처에 숙소를 잡아 놓았기 때문에 짐을 호텔에 놓고 처음 가기로 한 총통부로 이동을 하였다.

총통부는 명나라, 청나라 때 행궁 및 저택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건물로 사용되었다. 후에는 대행궁(大行宫)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태평천국 운동에는 난징을 다시 수도로 정하고 천경(天京)이라 칭하였기에 천왕부(天王府)를 조성했다.

천왕부 표지석.(사진=김현진 교사)
천왕부 표지석.(사진=김현진 교사)

1912년에는 신해혁명으로 쑨원(孙文)이 이곳에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면서 대총통부(大总统府)로 개칭되었다.

현재 난징에 있는 총통부에는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때 조성된 대행궁과 태평천국 시대의 천왕부는 화재로 소실되어 찾아볼 수 없으며, 중화민국 시대의 대총통부와 국민당 총통부의 흔적만 그대로 남아 있다.

총통부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총통부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난징은 중국 여러 나라의 수도이기도 했지만 중국 근대사의 여러 아픔이 담겨 있는 도시이다.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이며 중국국민당을 세웠던 쑨원(孫文)이 죽은 후 장제스(蔣介石)는 1928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석을 지냈고 1949년 이후에는 타이완의 국민정부 주석을 지냈다.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중국 북부의 군벌들을 제압하고 중국 전역을 장악했으나,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한 후 국공내전을 시작하여 1949년 중국 대륙 본토를 공산당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는 국민당 잔여부대를 이끌고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국민당 지도자들과 함께 중화민국을 건국하고 장기간 통치했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 비해 자유중국이라 불리는 타이완과의 교류가 많았다. 반공의 이데올로기가 강했던 시절이라 타이완과 우리나라의 처지가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어느새 중국과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중공이라는 표기를 중국으로 바꿔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기에 타이완과의 국교가 단절되고 만다.

명나라, 청나라의 시대까지는 모르겠으나 타이완으로 옮겨간 국민당 정부의 흔적이 중국 본토에 남겨져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국민당을 세운 쑨원(孫文)이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국부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였다.

부자묘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대행궁(大行宫)역 5번 출구로 나가 조금만 걸으면 총통부가 있다. 바로 옆이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상점 1912 거리가 있어 총통부를 관람한 후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셔도 괜찮을 것 같다.

총통부 입장권.(사진=김현진 교사)
총통부 입장권.(사진=김현진 교사)

단오절이라 인산인해이다. 총통부 입구 양 옆에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할인 티켓이나 더운 날씨에 먹을 생수와 빙과류를 파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할인티켓을 사려고 하였으나 정확한 의사소통이 어려운 관계로 정식 매표소에 들어가 입장권을 구매하였다. 입장권 창구는 현금 전용과 위챗 전용 창구로 나누어져 있다. 성인은 40위안, 학생은 20위안 인데 외국인이라 신분증 대신 여권을 보여줬더니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은 무료로 입장을 하였다.

자신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기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총통부 안 곳곳에서도 보인다. 우리나라 국토의 몇 십 배가 되는 대륙 곳곳에서 며칠, 몇 시간씩 걸려와 자신들의 유물, 유적들을 보고 자랑스러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대단하게 생각된다.

현재의 총통부 건물은 쑨원과 장제스의 국민당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신해혁명 당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인 쑨원(孫文)의 집무실로 사용되었고 장제스(蔣介石)가 북벌을 시작하면서 이곳을 국민정부의 본부로 삼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료와 함께 국민정부가 건물 이름을 ‘總統府’로 바꾸었으나, 불과 2년 만인 1949년 4월에 공산군에 함락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후 이 건물을 장수성 정부청사로 쓰다가, 지금은 중국근현대사 박물관으로 공개하고 있다.

천왕부 표지석,(사진=김현진 교사)
총통부내 천하위공 편액,(사진=김현진 교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쑨원이 직접 쓴 편액 ‘천하위공’(天下为公-온 세상은 일반 국민이 공유하는 것.)이 보인다. 많은 관광객이 편액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총통부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난징 총통부 시절 내부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 대통령 별장 청남대에 가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국민당 회의실, 국민당 시대의 훈장, 국민당원의 단체 사진 등을 볼 수 있으며 장제스의 집무실도 보존되어 있다. 중국의 근대사뿐 아니라 정원, 옛 정취까지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이 난징 총통부이다.

난징 박물관 본관.(사진=김현진 교사)
난징 박물관 본관.(사진=김현진 교사)

난징 박물관과 명고궁터

중국의 3대 박물관은 베이징의 고궁 박물원, 시안의 산시 역사 박물관, 난징의 난징 박물원을 가리킨다.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인 대만의 고궁 박물원의 명성 때문에 가려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난징 박물원은 지역의 특색을 잘 살린 박물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에서는 박물관보다 규모가 크고 종합적인 곳을 박물원이라고 부른다. 난징 박물원은 1933년 개관 되었을 때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중국의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개관 초기에는 국보급 소장품들이 많았으나, 국공 내전 당시인 1948년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퇴각하는 과정에 국보급 유물 대부분을 가지고 갔다.

이 과정에서 국립 중앙 박물원 건립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난징 박물원은 여전히 중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박물관이다. 총 40만 점의 문물이 전시돼 있고, 그중 10여 점이 국보급이다.

중국의 대도시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점은 지하철이 도시 곳곳으로 잘 연결되어 있고 깨끗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 난징 박물원은 ‘明故宫站’ 1번 출구를 나와, 조금만 걸으면 된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신분증이나 여권을 보여주면 박물관 입장권을 준다.

난징 박물원은 총 6개 테마인 역사관, 기획전시관, 예술관, 디지털관, 민국관, 무형문화관으로 나뉘어 있다. 모두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 이동하기 편리 하다.

역사관은 장쑤성 일대에서 발굴된 선사시대부터 청대까지의 문물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중앙에 있으며 2층으로 입장해서 1층으로 관람하는 구조다.

선사시대 유물.(사진=김현진 교사)
선사시대 유물.(사진=김현진 교사)

공룡과 매머드 화석부터 토기와 청동기 유물을 볼 수 있다. 전국시대의 착금은립조기하문호(错金银立鸟几何纹壶)가 국보급 유물이다. 남조의 죽림칠현(竹林七贤) 역시 수작이다.

민국관은 중화민국 시절의 난징 거리를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다. 기차 플랫폼, 우체국, 옛 상점 등이 즐비해서 기념사진을 찍기 좋다. 우체국에서는 실제로 엽서를 붙일 수 있다. 그밖에 매 분기 특별전이 열리는 기획 전시관도 볼만한다.

난징 박물관 반대쪽 명고궁역 2번, 혹은 3번 출구로 나오면 명고궁과 우문을 볼 수 있다. 궁은 없고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명고궁은 명태조가 처음 도읍을 정했을 당시의 황궁터이다. 베이징 자금성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형식은 같다.

궁의 규모를 짐작할 만한 것으로는 황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오문(午門)의 축대가 남아있다. 건물은 없어져 버렸지만 축대만 으로도 장대했을 규모가 짐작된다.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