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체의 질성적 구조와 성장의 원리를 탐색하다

[에듀인뉴스]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출처=https://blog.naver.com/n_clinic/70141757729)
(출처=https://blog.naver.com/n_clinic/70141757729)

[에듀인뉴스] 인격은 수많은 도덕적 습관들의 구성체이고, 이러한 도덕적 습관들은 어떤 규칙(규범)에 따른 구체적 행동들이나 어떤 원리를 지키는 암묵적 행위들이 습관화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달리는 동작이나 웃는 표정이나 인사하는 몸가짐과 같이 구체적 행동들에서 지키는 규칙의 특징은 위기에 대처하거나 갈등을 해결하거나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행위에서 지키는 규칙의 특징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구체적 행동의 규칙이고 후자는 추상적 행위의 규칙이다. 추상적 행위에는 자체 속에 다양한 구체적 행동들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그 두 가지의 수준을 구별하여 전자는 “구체적(혹은 일차적) 습관의 규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추상적(혹은 고차적) 습관의 규칙”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행동과 행위와 습관은 각기 지닌 편재적 질성에 의해서 식별된다.

한 개체의 인격은 구체적 행동의 습관들이거나 추상적 행위의 습관들의 총체로서 구성된다. 습관들은 원자론적 구성체라기보다는 유기체적 관계로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인격체를 성립케 한다.

그 전체를 지배하는 편재적 질성은 그 인격의 개성을 나타내면서 다른 인격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한 편재적 질성은 그 인격체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임를 보여주든가, 불교적이거나 기독교도적인 인격적 특징을 나타내거나, 고매함을 평가받는 품격의 소유자이거나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보이거나, 온화한 인격의 소유자이거나 역동적 개성의 소유자이거나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전체로서 나타낸 인격은 구체적 언어로써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그 자체를 지배하는 매우 고차적인 정신이나 이념에 따라서 습관화된 편재적 질성으로 개별화된 것이다.

구체적 행동이거나 추상적 행위(혹은 품위)는 실천된 결과로서 인격의 구성 요소가 된 것이다.

실천된 행동, 행위, 습관은 어떤 수준의 도덕적 규범에 일관된 실천의 결과이므로 사소하든지 진지하든지 간에 도덕적 규칙 혹은 원리에 대한 어떤 수준의 학습과 이해, 혹은 자율적-타율적 선택과 변용을 거친 것들이다.

그러나 습관들 사이에는 도덕적 규칙이나 원리에 대한 이해와 신념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규칙의 준수에 대한 이해도, 진지성, 일관성, 충실도 등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한 인격은 이런 저런 습관들, 즉 조잡스러운 것도 있고 고상한 것도 있으며, 경직된 것도 있고 유연한 것도 있으며, 이지적 특징을 지닌 것도 있고 감성적 민감성을 지닌 것도 있다.

모든 습관들은 생명력이나 활용성이나 저항력 등에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전체로서 인격을 형성하는데 다양한 모양으로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인 낱개로서, 한 묶음으로서, 서로의 적극적-소극적 관계로서, 혹은 서로의 조화적-대조적 관계로서 인격의 형성에 각기 지닌 질성을 가지고 참여한 것이다.

인격은 모든 습관이 지닌 질성들이 하나의 전체로서 이루어진 “총체적 질성”1)이고 요소들을 수단으로 한 목적의 위치에 있는 질성이다.

1) (total quality)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차적-고차적 규칙에 의한 습관들은 목적의 질성에 대한 수단들이며 총체적인 것의 “요소적 질성들”2)이다.

2) (component qualities)

총체는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체도 아니고 기계적으로 서로 인접한 상태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어떤 편재적 질성에 의해서 유기체적 관계에 있게 되고 전체로서 “하나의 상황”으로 성립된다.

편재적 질성은 추구하는 바의 “목적”에 해당하는 총체적 질성과 “수단”으로 동원되는 요소적 질성들을 연결하고 조정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시 여기서 우리는 인격의 형성에서 도덕적 습관을 선택하고 조정하고 통합하는 사고와 방법적 기능을 담당하면서 편재적 질성을 생산하는 지력, 이를 “도덕적 지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적 상황에서 언급하는 “양심”에 상당하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즉 편재적 질성이 총체적 질성의 목적과 요소적 질성의 수단들을 관계짓는 과정에서 도덕적 지력의 작용이 양심의 기능을 대행한다는 것이다.

(출처=양심의기초위에세운정열)
(출처=양심의기초위에세운정열)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인격을 도야한다는 것은 양심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옳고 그름을 알고 그 알고 있는바 그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일컬어 우리는 쉽게 “양심”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냥 통속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인간이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양심의 힘이 발휘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양심이 우리의 마음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우습게도 한국인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면, 대개는 가슴을 가리키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은 거의 한 결같이 머리를 가리킨다.

마음 혹은 양심에 관하여 한국인은 느끼고 움직이는 감성적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고, 영어권의 사람들은 생각하고 분별하는 이지적 성질의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양심”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잘 분석해 보면, 위의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양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우선,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여 있다고 호소하면, 주변에서 조언하기를 “양심에 비추어서 판단하라”고 일러 준다.

이 경우에 양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지시해주는 일종의 “권위적 능력”이 있음을 상정한다. 거기에 호소하면 선악을 분별하고 정의와 불의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양심이란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도덕적 판단의 권위”라고 생각한다.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다는 표현은 도덕적으로 매우 단호한 표현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면서도 부도덕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평하여, “양심이 마비된 사람,” 혹은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한 판단의 권위가 발동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기피할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달리,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종종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고 하면서 죄의식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한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유사한 상황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저항하기도 한다.

그리고 “양심을 가진 사람이면 그런 짓을 하지 아니 한다”라는 표현에서는 “양심”이라는 말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거나 소극적으로 악을 기피하는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실천의 동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유혹에 대한 저항과 과오를 저지른 후의 죄의식과 같은 것은 이러한 실천적 동기의 작용으로 이해되며,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도덕적 행동에 관한 연구에서 흔히 양심의 행동적 증후3)로 상정하기도 한다.

3) (behavioral syndrome)

내심(內心)의 판단적 권위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나 규칙을 밝혀주는 것이므로 이지적(지적) 도덕성의 능력이며, 행동의 동기적 상태는 그것을 이행하려는 경향성을 의미하므로 실천적(행적) 도덕성의 능력이다.

양심의 개념에는 이 두 가지의 특징을 모두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이러한 양심이라는 능력은 선천적인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인 것인가?

고대 동양의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사이에 쟁점이었듯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성선설(性善說)과 후천적이라고 주장하면 성악설(性惡說)이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1724.4~1804.2). 비판철학을 통해 서양 근대철학을 종합한 철학자로 평가 받는다.
임마누엘 칸트(1724.4~1804.2). 비판철학을 통해 서양 근대철학을 종합한 철학자로 평가 받는다.

칸트(I. Kant)에 의하면, 양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내심의 법정”4)으로 비유될 수 있다.

4) (inner moral court)

개인은 혼자서 양심의 법정에 선다. 즉 원고도 되고 피고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판사도 된다. 그리고 언도하고 형을 집행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여러 역할을 개인이 동시에 수행할 때 일종의 부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양심의 법정에 선 개인은 자신의 일을 전적으로 자기 혼자서 다루되, 자신을 대하기를 마치 타인을 대하듯이 다루어야 하는 기이한 특징을 지닌다. 왜냐하면, 소송 사건을 법정에 가져갔지만, 양심에 의해서 고소된 피고와 그것을 심판하는 판사가 동일한 존재이면 원고가 언제나 패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정은 정의에 입각한 것일 수 없는 부조리의 법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적 의무에 관한 한에서, 양심은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다른 주체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심판자로 삼아야만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이 다른 주체는 이성이 낳은 참다운 인간 혹은 오로지 이상적인 인간이어야만 한다.5)”

5) I. Kant, The Metaphysics of Morals, M.J. Georgor (trans.) (Philadelphia :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64), p.104.


칸트는 이러한 부조리의 문제를 “실체적 자아”와 “현상적 자아”6)를 구분함으로써 설명하고자 하였다.

6) (homo noumenon, noumenal self / homo phenomenon, phenomenal self)

그는 자유에 근거하여 도덕적 입법을 행사하는 주체로서의 자아가 있고, 이성을 가지고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아를 구별하였다.

전자는 자신에게 법을 정하여 적용하면서 거기에 복종하려는 도덕적 입법자이고 또한 원고이다. 이를 “실체적 자아”라고 한다. 후자는 현실적인 삶을 영위해가는 “현상적 자아”이며, 자신의 행위에 관련하여 필요한 경우에 그 양심의 법정에 피고로서 나타나야 한다.

피고는 역시 변호를 맡는다. 그리고 심판의 과정이 끝나면 권위를 부여받는 공정한 내심의 판사는 행복이나 불행의 언도를 내린다.7)

7) 위의 책, pp. 104-105.

칸트의 이와 같은 실체적 자아와 현상적 자아의 구별은 한 개인이 도덕적 입법자이며 동시에 복종자일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도덕적 자율성은 여전히 문제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구성원이 자신이 입법한 것에만 복종하면서 살아간다면, 사실상 사회적인 구속력을 지니는 도덕적 법칙은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도덕적 자율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타인의 입법에도 복종하는 가능성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최선의 것은 자신의 입법과 상충되지 않는 타인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방식, 즉 보편성을 지닌 개인적 도덕률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입법적 의지가 일치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자신의 행위 자체가 보편적 법칙일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률(格律)로 도덕적 자율성이 보편성을 지향할 것을 말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실체적 자아와 현상적 자아의 관계로서 설명되는 양심이 우리의 내심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즉 선천적인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인 것인가에 관해서는 그냥 인간에 주어진 선천적 능력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나 나의 마음속에 비치는 양심은 신비로울 뿐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계몽사상적 이성관을 지닌 철학자이니만큼 양심은 선악을 분별하는 이성적 능력과 동일한 판단력을 가진 선천적 능력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그 선천성이라는 것이 모든 인간이 공유한 능력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개인 마다 서로 다르게 소유한 선천성을 말하는 것인가는 분명치가 않다.

이 맥락에서는 사실상 신비주의적 사고에 의한 선천성을 언급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답을 유보한 상태에 두고 조금 후에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러나 어떻든 적어도 우리의 내심에서 작용하는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의 조건을 설명하여 주는 하나의 탁월한 이론적 모형이기도 하다. 그의 보편적 법칙론은 도덕성 자체가 요구하는 사회적 구속력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