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중국, 가까운 듯하면서 이질감이 드는 곳이다. G2로 미국과 견주고 있는 중국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을 비웃는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 지리상으로 가까워 문화적으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중국. <에듀인뉴스>는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를 통해 중국의 도시에 살아가면서 느낀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현지에서 중국을 접하고 알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인해 중국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과거에 대한 이해와 미래를 예측해보는 작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알다가도 모를 중국!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

[에듀인뉴스] 중국 난징은 강남지역의 따뜻한 기후 특성상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따뜻한 기후와 함께 길거리에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많은 가로수가 심어져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대도시이면서도 나무가 많은 모습을 보면 삭막한 도시 속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그래서 난징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것일까?

난징의 유명한 작가는 ‘오동나무는 난징 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이다’라고 했다. 그만큼 난징 곳곳에는 두 갈래로 갈라진 오동나무가 많다.

국민당 정부가 난징을 수도로 삼았을 때 장제스는 오동나무에 반해 프랑스에서 수입하는 계획을 세웠고 거리 곳곳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하늘을 가린 오동나무 가로수 길은 중국과 서양의 조화를 나타내주는 난징의 상징이 되었다. 숙소에서 나와 기분 좋게 오동나무 가로수길의 그늘을 걸으면서 다음 여행지로 향했다.

난징대학살기념관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난징대학살기념관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잊지는 말자" 난징 대학살 기념관

지하철 2호선 윈진루(云锦路) 역에 하차하면 바로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도착한다. 그러나 2번 출구를 공안이 막고 건너편 출구로 나가라고 한다. 일단 나가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기념관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아 2번 출구로 많은 사람이 몰려 일방통행식으로 입구를 조절하는 것 같다.

더운 날씨와 함께 기념관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 기념관 관람을 위해서는 아침부터 서두르는 것이 좋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피곤함에 호텔에서 조금 여유를 부렸더니... 40분 남짓 긴 줄을 선 후 공안이 몸을 수색하고 엑스레이 검사를 한 후에야 입장할 수 있다.

여행을 오기 전 블로그를 통해 난징대학살에 대한 영상을 봤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난징 시민들은 그때를 떠올리며 분노와 함께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당시 많은 학살로 양쯔강이 핏물로 변했다는 증언도 있다. 일본은 사과하지 않고 중국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라며 잘못을 숨기고 있다.

기념관 곳곳에는 난징대학살시 학살된 희생자 수 300,000 이라는 숫자가 곳곳에 표기되어 있다.(사진=김현진 교사)
기념관 곳곳에는 난징대학살시 학살된 희생자 수 300,000 이라는 숫자가 곳곳에 표기되어 있다.(사진=김현진 교사)

기념관 곳곳에 표기된 300,000이라는 숫자는 난징에서 6주 동안 대학살로 희생된 희생자의 수를 의미한다. 1937년 12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되어 30만 명이 죽은 난징대학살은 중국인들의 아픔이다. 12초에 한 명 꼴로 희생이 되었다고 하여 전시관 내부에는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곳도 있다.

같은 아픔을 가진 민족으로서 마음이 아려온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앞에는 엄마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동상이 있는데, 동상만 보고 있어도 당시의 처절함이 느껴진다.

난징대학살기념관에 들어가면 희생자의 사진이 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일본이 집단 학살을 자행했던 13곳 중 한 곳이다. 하루 만에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1만 명을 이곳에서 기관총으로 살해했다. 수백여 구의 유해가 발굴된 현장을 보존해 놓은 곳도 있다.

대학살기념관은 크게 3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진다. 학살지에서 발견된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실, 일본군 만행 전시실, 일본 군국주의 침략사 전시실로 나뉘어지며 야외에는 통곡의 벽, 생존자들의 발자국 부조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끝에는 历史可以宽恕, 但不可以忘却. 前事不忘, 后是之師(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기억해 미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며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역사의 일이다.

세계문화유산 명효릉

명효릉(明孝陵)은 명나라 태조인 홍무제 주원장과 마황후의 무덤이다. 효릉(孝陵)이라는 명칭은 마황후의 시호인 효자(孝慈)에서 따왔다. 주원장 생전인 1381년 착공을 시작하여 3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명효릉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보통 중산릉, 영곡사와 함께 일정을 짠다. 중산릉은 입장료가 무료이지만 명효릉과 영곡사는 패키지 입장권을 판매하고 있다.

명효릉은 난징의 숲이 울창한 쯔진산(紫金山)의 중산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중산공원은 난징 중산 풍경명승구로 불리는데 굉장히 넓은 면적에 명효릉뿐 아니라 중산릉, 손권묘, 영곡사, 쉬안우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워낙 넓어서 작은 셔틀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더운 날씨 탓에 지하철 2호선 하마방(下马坊) 역에서 내려서 입장권을 판매하는 매표소를 찾았다. 명효릉 쪽으로 올라가는 도로는 단오절 관광지에 찾아온 관광객들의 차로 막히는 상황이다.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어떻게 표를 구매하는지 알아 놨지만 막상 매표소 앞의 많은 인파와 조금은 다른 안내 문구 등으로 혼돈스러웠다.

중산릉 셔틀버스 입장권.(사진=김현진 교사)
중산릉 셔틀버스 입장권.(사진=김현진 교사)

시간이 좀 늦기도 했고 더운 날씨에 지쳐 있기도 해서 명효릉과 중산릉만 보고 올 생각에 표와 탑승권을 끊었다. 친절하게도 아들의 표는 학생이라 무료라고 안내를 받았지만 명효릉 앞에 가서 결국엔 학생 표를 다시 구매해야 했다.

명효릉 안내판.(사진=김현진 교사)
명효릉 안내판.(사진=김현진 교사)

줄을 서서 셔틀버스를 타고 명효릉 인근에 도착하였다. 구매한 입장권을 보여준 후 입장을 하는데 공항에서 사진을 배경으로 찍었던 신도상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있지?' 일단 명효릉과 세계문화유산이 표시되어 있는 표지석에서 사진을 한 컷 찍은 후 입장했다.

중국은 무엇이든 크게 만든다. 크기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경복궁 근정전을 보다가 자금성의 그 크기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고속열차를 타고 2~3시간 걸리는 거리는 가깝다고 말하는 이곳, 고속열차 밖으로 보이는 많은 산과 건물들을 다 헤아리려면 이곳의 규모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결국엔 놀라움과 함께 부러움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한 나라를 세운 태조의 무덤답게 그 규모가 크다. 30년 동안 이 무덤을 만들면서 건국한 나라를 파탄시킬 위험까지 몰고 갈 정도였다 한다. 지금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전쟁이 일어나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주원장은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당시 시대가 혼란해서 도적들의 약탈과 난이 자주 일어나곤 했는데 주원장도 홍건적의 난에 참여하고 두각을 나타내면서 군을 통솔하고 명나라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명효릉을 따라가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다리는 돌로 된 아치형 모양으로 5채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정북쪽 200미터 안의 5개 궁문과 일직선 상에 있다. 첫 번째 문 입구까지가 상당히 멀다.

문무방문은 명효릉 능실의 첫번째 문이다. 담벽 아래 보존된 일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어, 러시아어 6개국 문자로 조각된 ‘특별고시’비는 청나라 때 명효릉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비다.

비 양쪽에는 건륭황제의 글자가 적혀 있는 어비가 보존되어 있다. 향전은 주원장과 황후, 임금 소실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세층의 돌을 쌓아 만든 기초 위에 건축된 정면 9칸, 측면 5칸의 거대한 나무 구조의 건축으로서 지금도 56개 주춧돌이 보존되어 있다.

승선교는 아치가 하나인 석조다리이며 양쪽에 난간이 있는데 주원장의 영구가 이 다리를 거쳐 지나가 승선교라고 한다.

명효릉 명루.(사진=김현진 교사)
명효릉 명루.(사진=김현진 교사)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높은 성루의 높이가 굉장히 높다. 명루는 명효릉이 처음 개척한 건축형식으로 명효릉 건축의 최고점이다. 지붕은 황색 기와로 덮였고 남쪽에 아치형 문이 3개 있고 동, 서, 북쪽에 각각 아치형문 1개씩 있다.

명루의 문을 통과해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있다. 명루의 지붕은 청나라 함풍년 시기 전란에 훼손됐다.

명효릉 전체에 울창한 산림이 조성되어 있어 명루가 높기는 하지만 주변 풍경을 모두 조망할 만큼 높지는 않다.

명루 뒤쪽의 야산이 주원장이 묻힌 무덤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무덤 위를 관리하지 않고 풀과 나무가 나는 대로 두기 때문에 무덤인지 알 수가 없다. 그 크기 또한 우리나라의 왕릉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크다.

명효릉을 보고 나서 찾은 석상로는 효릉신도의 첫 부분으로서 사자, 해태, 낙타, 코끼리, 기린(전설상의 기린), 말 등 6종류의 석상이 차례대로 세워져 있다.

석상로 효릉신도.(사진=김현진 교사)
석상로 효릉신도.(사진=김현진 교사)

능 앞에 낙타를 세워 놓은 것은 명효릉이 처음이다. 낙타를 세워 놓음으로 서역과의 교류를 통한 국력의 강성 국가의 번영을 상징한다.

기린은 고대 사람들이 상상해낸 길한 동물이며 호랑이, 사자, 소, 용의 형태를 한 몸에 가지고 있는 동물로서 황제의 인덕을 나타낸 길한 동물이며 황제릉에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해태는 곰의 눈과 독뿔을 가진 동물이며 또한 법수로 불려지는 전설 중의 신수이다. 능 앞에 세워 놓음은 정직함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데 있다.

사자는 짐승의 왕으로 존칭되고 있으며 영활하고 용맹하여 다른 짐승들이 무서워한다. 또한 불교에서는 호법의 영물로 여긴다. 능 앞에 놓여진 석사자는 황제의 위엄과 세력의 강대함을 보여준다.

석 코끼리는 조형이 간단하고 생동하다. 말은 명나라 때 조회 의식 때 능 앞에 반드시 비치되는 동물이다. 석마의 두 눈 눈빛은 살아 있듯이 의기양양하며 마치 황제생전의 공적을 자랑하는 듯하다.

신기함과 중국 특유의 오묘함을 느끼면서 중산릉으로 향하였다. 거리가 조금 있긴 하지만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에 급하게 서둘러 중산릉으로 갔다.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티켓을 받아야 입장할 수 있으며 사전예약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인터넷 및 휴대폰 QR 코드를 통하여 2시간 단위별로 사전예약을 할 수가 있다.

외국인이면 여권을 보여주면 입장을 할 수도 있다고 얼핏 본 기억이 나 관광 센터 창구 직원에게 번역기 등을 통해서 도움을 구했는데 입장이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 5시 30분부터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번역기의 오류인가?

중산릉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중산릉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중산릉 입구에는 QR 코드를 통해 열심히 입장권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 그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그들도 정확히는 모르는 것 같았다.

셔틀버스 도우미 아주머니께 중산릉 몇 시까지 입장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5시에 끝난다고 한다. 누구 말이 맞는 거지? 일단 시간도 늦은 것 같고 지치기도 해서 내일 아침을 기약하며 숙소 근처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