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거침없이 교육’은 ‘나’의 입장에서 본 ‘교육’을 ‘거침없이’ 쓸 예정이다. 글은 자기중심적이고 편파적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글 중에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편파적이지 않은 글이 얼마나 될까? 객관적인 척 포장할 뿐이다. 차라리 나의 편파성을 공개하고, 조금 더 솔직해지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 잘 될까 모르겠다. 다루는 내용은, 교육과 관련된 거라면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비판적 시각에서 쓴 교육제도, 교육정책, 교육담론, 교실 이야기 등에 나의 편파성을 실어 나르리라.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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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튀면 안 되는 이유


어떤 한 반이, 튄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것도 교육적으로 좋은 쪽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급운영 어떻게 할까?>(이영근, 보리, 2016)를 지은 이영근 선생님처럼, 학교 등교하기 전 아이들과 만나 주변 동산에 오르고 아침을 같이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햇살’을 한다든지, 일주일에 한 번 마지막 날 주제를 정해 모두가 함께 재미 있는 분장을 하거나, 같은 옷을 입어 일체감을 느끼며 재밌게 즐기는 ‘아띠’를 한다든지, 기타 동아리를 만들어 모든 아이들이 기타를 치며 즐겁게 노래하는 모습을 보인다든지, 아이의 생일날 간단한 선물과 함께, 아이의 신청곡을 교사가 불러주고 교사가 아이를 업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식의 특색 있는 생일 파티를 한다든지 하는 등의 모습으로 말이다.

물론 성급하게 일반화해서도 안 되고, 학교마다, 선생님마다 다 다르긴 하지만, 교직사회는 튀지 말아야 하는 분위기가 은근하게 흐르고 있다.

좀 튀면 안 되는가? 안 된다. 왜일까?

그 튀는 행동이 교육적이지 않은 행동, 예컨대 학교 한켠에서 교사가 담배를 핀다거나, 아이들에게 체벌을 한다거나 단체 기합을 주는 등의 행동도 아닌데 말이다. 교육적 열정이 과해서 생긴 튀는 행동일 뿐인데, 대체 왜 안 되는 걸까?

이유는, 민원과 관련이 있다. 물론, 그 튀는 반 자체는 민원이 없다. 그 반 학부모 만족도는 당연히 상당히 높다. 문제는 다른 반 학부모의 민원이다.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떤 반은 이러저러한 것들을 한다는데, 우리 반은 그런 거 안 하냐.”

이 ‘옆 반은 하는데 우리 반은 안 하냐’는 한 마디는 교사의 가슴 속을 매우 강력하게 파고든다.

이 민원이라는 게, 꼭 교사에게 대놓고 정식으로 제기하는 것만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건너건너 입소문처럼 들려오는 것까지 포함된다.

입소문이 더 무섭다. 그 얘기가 얼마나 깊고 넓게 퍼졌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평판에 민감하며, 옆 사람과의 비교는 치명적이다.

학부모 입소문도 치명적이지만, 더 치명적인 건, 매일 얼굴을 보고 마주하는 내 반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의 직접적인 ‘민원’이 가장 치명적이다.

“선생님, 옆 반은 저거 하는데 우리는 저런 거 안 해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강력하게 비수를 찌르는지 모른다. 방어심리가 작동해 교사들은 “그거 하고 싶으면 옆 반으로 가!”라고 농담 반 식의 협박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서는 그 ‘튀는 교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이런 민원을 받은 건 다 그 ‘옆 반 튀는 교사놈’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 날 선 감정을 표현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옆 반 튀는 교사의 튀는 학급 운영에 알게 모르게, 알 듯 모를 듯 불만을 드러낸다.

“나도 옛날엔 저런 거 많이 했었는데, 다 부질없어.”

“선생님, 너무 대단해요. 우리 반 애들도 막 그거 하자고 그러는데 난감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농담 식으로 웃으면서) 적당히 좀 해 줘요.”

‘튀는 교사’에게는 저런 말들이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아, 내가 혹시 다른 반 선생님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아이들과의 활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진다. 그래서 아이들과 매우 즐겁게 하던 활동들도 하지 않거나, 몰래 할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이게 무엇 하는 짓일까. 이런 모습이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 튀는 교사 옆 반 교사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


튀는 교사가 튀지 좀 않았으면 하는 그 심리가,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비교 당하면서, 순식간에 열심히 하지 않는 교사 취급당하는 심정이 오죽할까.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 왔고, 학급 운영을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옆 반 때문에 무너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잘하고 열심히 하는 교사를 위축시키는 게 잘하는 짓은 아니다.

옆 반 튀는 교사가 비교육적 행동을 해서 우리 반에 영향을 끼치거나,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면(그 반에서 자주 함성소리가 들려 수업에 지장을 준다거나, 수업 시간 중 떠들며 복도를 돌아다니는 아이가 많다거나) 당연히 그 반의 수업과 교육방식을 존중해 줘야 한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해서 더 강조하기도 민망하다.

그럼 아이들과 학부모의 민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듣고만 있어야 하는가?

일단, 교사 본인의 교육과, 자기 반 아이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는가? 내가 부족한 게 있는가? 내가 잘못한 게 있고 부족한 게 있으면 이 기회를 삼아 고치려고 노력하면 된다.

옆 반에 자극받아 더 좋은 수업을 만들고 더 좋은 학급 운영을 한다면, 나에게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다. 옆 반은 긍정적인 영향을 나에게 미친다.

그런데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게 없다면? 내가 부족한 것도 그렇게 크지 않고, 내 나름의 학급운영방식이 있어 굳이 옆 반처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렇다면 굳이 옆 반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내 중심을 잡고 굳건히 지금처럼 해 나가면 된다.

학부모와 아이들의 민원이 그럼에도 계속 지나치게 제기된다면, 그건 어쨌든 학부모와 아이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들러(Alfred Adler)의 말을 끌어와 표현하자면, ‘타인의 과제’를 내가 과하게 끌어안을 필요가 없다. ‘과제 분리’가 필요하다.

“너희들이 옆 친구와 비교하는 걸 싫어하듯이, 선생님도 다른 반 선생님과 비교하는 건 싫어요. 옆 반과 비교하지 말고, 우리 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게 있다면 차근차근 얘기해줘요.”

이런 정도의 말을 아이들에게 해야 하지 않을까. 괜히 열심히 하는 애먼 옆 반 튀는 교사 잡지 말고.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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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할까? - 튀는 교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튀는 교사는 쫄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한 번쯤 문제의 소지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이영근 선생님이 정시 등교 전 아이들과 산에 올라 아침 먹고 이야기 나누는 ‘아침 햇살’ 프로그램도 기안을 올리고 관리자의 결재 하에 한다.

어쨌든 우리는 공교육 교사이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내 열정을 무작정 쏟아붓는 게 꼭 옳은 것만은 아니다. 안전을 생각해야 하고, 적절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렇게 안전상 문제가 없고,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활동이라면, 그야말로 정말 쫄지 말아야 한다. 주변의 시샘과 압박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가장 중심이 돼야 할 것은, 아이들이다. 내가 하는 교육이 아이들에게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야지, 내 주변 선생님들이 내 교육적 열정에 불편해할지 안 할지를 따지는 건, 본말이 전도됐다.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옆 동료 교사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참 싫은 일이다. 하지만 그건 옆 동료 교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 또한 ‘나의 과제’가 아니며, ‘과제 분리’가 필요한 일이다.

다만, 옆 동료교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성심성의껏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와 자료를 아낌없이 풀어야 한다. 거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어떻게 해야 할까? - 관리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관리자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 튀는 교사의 교육적 열정을 위축시켜서는 당연히 안 된다. 그런 교사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튀는 교사의 열정과 교육적 노력을 마치 모든 교사가 본받거나 따라 해야 할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튀는 교사의 교육적 활동을 위축시키는 행동이다.

모든 교사는 각자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 하에 격려하고 지지해 줘야 한다.

튀는 교사의 열정과 그렇지 않은 교사의 열정을 비교하여 교사들의 사기를 꺾지 말지어다. 그렇지 않았던 다른 교사가 자기의 교육적 열정을 내비췄을 때, 그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또 지원해주면 그만이다. 관리자의 오지랖은 적을수록 좋다.


온라인 수업, 욕먹을 수밖에 없는 교사


온라인 수업,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이 엄혹한 시기에 교사들 욕은 하고 싶지 않다. 교육부 욕이나 실컷 하고 싶고, 몇몇 학부모들의 과한 비판을 비판하고 싶은 심정이다.

교육부는 현장과의 교감은 제대로 하지도 않은 채, 교육부 관료들이 옳다고 여기는 바대로 결정하고 발표했다. 교사들은 항상 TV의 교육부 발표를 듣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코로나 시대, 긴박하게 결정하고 발표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정도 이해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온라인 수업도 급작스럽게 발표했는데, 그래도 그건 최소한 안정적인 플랫폼을 구축하고서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e학습터와 ebs 온라인클래스의 버벅거림은 초기 혼란을 초래했고, 플랫폼 자체도 제한된 기능밖에 없는, 다소 불편하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일부 학부모들의 비난은 거셌다. 부실한 플랫폼에 부실한 수업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한편으로는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비난이 교사들에게 향해져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교사들은 교실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대면 수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대학에서도 그걸 전제하며 공부해왔고, 지금껏 교실 속에서 의미 있는 만남과 수업을 만들어왔다.

교사들은 단적으로 말해 교실 수업 전문가다. 다소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으나, 온라인 수업 전문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임시 상황이라 판단했고, 상황이 나아진다면 언제고 교실 수업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야 어쩌면 이게 임시가 아니라 계속될 상황일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상상도 해야 했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사 개인이 온라인 수업의 질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를 원하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다.

학교에 온라인 수업을 하기 위한 각종 장비와 지원체제가 체계적으로 갖춰지지 않았다. 그건 개개인이 어떻게 하기에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다. 당연히 교육부와 교육청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지원은 없다시피 했다. 이학습터와 온라인클래스를 활용하도록 했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부실했다. 부실한 지원 속에, 부실한 수업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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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수업, 튀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지금부터 하는 온라인 수업에 대한 얘기는 위의 얘기와 결이 조금 다르다. 위에서 교사가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대체적으로 그러하고, 그 제한성을 교사들 탓으로 돌리는 건 여전히 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사들은 그런 와중에도 돌파구를 찾으려 꾸준히 노력했다. 이것저것 알아보고 장비를 구입해 스스로 영상을 제작하고 올리는 교사가 많아졌다. 온라인 수업으로 할 수 있는 각종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들도 넘쳐났다. ‘줌’ 프로그램으로 화상수업을 하기도 했다.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돌파구를 찾아 나서는 교사들을 격려하고 응원해도 모자랄 판에, 찬물을 끼얹는 건, 다름 아닌 교사들 자신이었다. 튀지 말아야 하는 이 몹쓸 문화가 여기서도 여지 이 작동을 해 버린 것이다.

많은 교사는 온라인수업에서 특히 더 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차원에서 온라인 수업 플랫폼을 통일한 경우 많았고, 그것만을 쓰길 원했으며, 그 외에 다른 플랫폼을 쓰는 게 용납되지 않는 학교가 의외로 많았다.

혼자 ‘줌’으로 화상수업을 하면, 눈치를 봐야 했다. 너 혼자 튀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생각보다 크게 작용했다. 이제 와서 교육부는 쌍방향 실시간 수업을 사실상 ‘강제’하니, ‘줌’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게 무언의 압박까지 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억지로 ‘줌’을 사용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이게 좋은 건지는 또 모르겠다. 이에 대한 얘기만 또 한 바닥이다.


우리 안의 전체주의를 뚫고


그릇된 모습들이다. 그건 다름 아닌 전체주의다. 다양성이 제대로 존중되지 않는, 한 사람의 튀는 사람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전체주의 문화. 그 문화가 교직 사회 안에 아직 있다.

전체주의 문화가 교직 사회 안에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부끄럽다고 덮을 일은 아니다. 우리 안에 전체주의가 있음을 인정하고 조금씩 걷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많은 교사가 이미 그 문화를 뚫고, 많이 튀고 있다. 나는 글만 싸질러 놓고 정작 튈 능력도 용기도 없다.

다만, 그럴 용기와 능력과 열정이 있는, 수많은 튀는 교사들을 열렬히 응원하고 지지한다. 튀지 않지만,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교사들은 물론이고.

곽노근 경기 파주 적암초등학교 교사. "파주 깊은 산골 적암초에서 근무하고 있고, 초등토론교육연구회, 서울경기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좇아 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잘 되지 않음을 느낀다. 삶과 계급과 교육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되,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
곽노근 경기 파주 적암초등학교 교사. "파주 깊은 산골 적암초에서 근무하고 있고, 초등토론교육연구회, 서울경기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좇아 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잘 되지 않음을 느낀다. 삶과 계급과 교육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되,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