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배낭에 담을 ‘인권 감수성’이 없다②
코로나 시대 "아이들이 공감과 연대로 난관 뚫을 인권 감수성 심어야"

[에듀인뉴스] 나는 1980년, 그 해를 살았다. 그게 역사가 된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나는 2020년을 살고 있다. 올해가 새로운 역사가 되리라는 예감이 강렬하다. 시대와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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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인권 공식’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별거 아니다. A가 B에게 C를 근거로 D를 요구하는 것이 인권 공식이다.

여기에서 A는 ‘권리의 주체’인 인간이고, B는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의무의 주체’인 국가 또는 이에 준하는 자이며, C는 ‘권리를 주장하게 된 근거’이고, D는 ‘침해당한 권리의 내용’이다.

그런데 A, B, D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권리의 근거 C는 언제나 동일하다. 이게 핵심이다.

우리가 어떤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근거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A가 B에게 ‘인간’임을 근거로 D를 요구하는 게 인권이라는 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국가에 ‘인간’임을 근거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는 게, 그게 인권이다.

그렇다면 이 인권 공식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이 또한 별거 아니다. “인권에는 중립이 없다”는 그 사실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인권은 누군가를 편드는 것이다. 마땅히 누려야 할 인간으로서 권리를 빼앗긴 자가 있다면, 그들의 입장에 서는 것이 인권이다.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인권이다.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 제목은 은유이지만, 우리에게는 쇠망치다. 중립이 때로는 강자의 폭력에 대한 방임이자 묵인이며 동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 기차가 오늘도 달리고 있다.

기관사는 제멋대로 기차를 몰고 있다. 그런 기차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기관사가 마음대로 하라고 용인하는 방조다.

히틀러 암살 작전에 가담했던 본회퍼는 이렇게 고백한다.

“목사가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하는 질타에 대한 대답이다.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만이 목사의 할 일이 아니다.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목사인 내가 할 일이다.”

노암 촘스키는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서 우리의 치부를 들추어낸다.

진보적 교사 단체의 지도자들마저 노동조합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지위 향상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들이 교육 권력을 쥐어도, 권력 행사자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그 어떤 근본적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교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손발이고, 여전히 학생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학습 기계다.

그 어떤 비판적 사고도 그 어떤 전복적 사유도 정해진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가능한 학교, 교사도 학생도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그들마저, 약육강식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에 철저하게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닫힌 교문을 참교육의 이념으로 열어젖혔지만, 그들이 열린 교문으로 맞아들인 건 학생을 소비자로 보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였다.

소비자 중심 교육을 학생 중심 교육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도 해 보았지만, 걸레는 빨아도 걸레였다. ‘잘 산다’는 게 ‘물건을 잘 사는 능력’이라는 환치가, 이전이나 이후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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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코로나19가 학교를 폭격했다. 그 폭격에 제일 먼저 노출되는 이들이 바로 ‘학교에서 자는 놈들’이었다.

1명의 부자가 있기 위해서 500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자는,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다. 이게 지구촌의 현실 자본주의다.

그런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할 일도 없고 무엇을 할 의지도 없어 보이는 놈들을 부랑자, 실업자, 유랑자, 범죄자, 사기꾼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검사도 필요하고 판사도 필요하고 의사도 필요하고 목사도 필요하고 교수도 필요하고 학자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축복받은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웃음’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오랜 고정관념에 똥침을 날렸다. 부자들만 자기들끼리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 기후위기가 지난여름 지구촌을 포격하면서 지구인을 다시 흔들어 깨웠다. 가진 자들만 끼리끼리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펼쳐 보여 주었다.

“숨을 쉴 수 없다”고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지금은 ‘수업시간에 잠자는 자들’이지만, 만약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 둔다면 결국 ‘수업시간에 깨어 있는 자들’도 숨을 쉴 수 없다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묵시록처럼 우리에게 계시해 주었다.

신자유주의가 손짓하여 불러들인 게 코로나19다. 신자유주의가 더욱 빨리 불러들인 게 기후위기다.

그렇다면 이제, 자본이 자연을 제멋대로 착취해도 되는 자유, 자본이 노동자를 내키는 대로 해고해도 되는 자유, 국가가 다른 국가를 서슴없이 침탈해도 되는 자유, 인간이 더 약한 인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억압해도 되는 ‘신자유’는 이제 거두어들여야 한다.

당연히 그딴 ‘신자유 교육’도 거두어들여야 한다.

“이 세상에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잠자는 아이들을 ‘잉여’로 취급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고서는, 호모사피엔스에게 미래는 없다.

이런 궁핍한 시대에 대한민국 교육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시도별로 각기 다른 철길에서, 각기 다른 기관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모습이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전선의 최전방에 있는 야전 사령부라 할 만한, 16개 시도교육청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모든 교육청은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무사히 목적지까지 태우고 가려고, 총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모든 교육청에서는 ‘교육 방향’, ‘교육 비전’, ‘교육 기치’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아이들과 함께 갈 새로운 교육 세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강원교육청(교육감 민병희): 모두를 위한 교육, 행복한 학교 함께하는 강원교육

경기교육청(교육감 이재정): 경기교육은 학생과 현장이 주도하는 혁신교육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교육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경남교육청(교육감 박종훈):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경남교육

경북교육청(교육감 임종식): 삶의 힘을 키우는 따뜻한 경북교육

광주교육청(교육감 장휘국): 함께 배우고 나누는 행복한 광주교육

대구교육청(교육감 강은희): 미래를 배운다 함께 성장한다

대전교육청(교육감 설동호): 행복한 학교 미래를 여는 대전교육

부산교육청(교육감 김석준): 미래를 함께 여는 부산 교육

서울교육청(교육감 조희연): 창의적 민주시민을 기르는 혁신미래교육

울산교육청(교육감 노옥희):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울산교육을 실현하겠습니다.

인천교육청(교육감 도성훈): 삶의 힘이 자라는 우리 인천교육

전남교육청(교육감 장석웅): 전남교육은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전북교육청(교육감 김승환): 가고 싶은 학교, 행복한 교육 공동체

제주교육청(교육감 이석문): 제주교육은 존중입니다. 아이 한 명 한 명을 존중하겠습니다.

충남교육청(교육감 김지철): 참학력을 갖춘 미래인재 육성

충북교육청(교육감 김병우): 교육의 힘으로 행복한 세상

그런데 제주교육청과 전남교육청, 그리고 울산교육청의 슬로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제주교육청은 “제주교육은 존중입니다. 아이 한 명 한 명을 존중하겠습니다”라고 했고, 전남교육청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전남교육은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으며, 울산교육청도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울산교육을 실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경기도교육청 홈페이지 캡처.
경기도교육청 홈페이지 캡처.

고맙게도, 경기교육청에서도 “경기교육은 학생과 현장이 주도하는 혁신교육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교육을 만들어 가겠습니다”라고 제시해 놓고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라고 한 뒤 “1.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고 있었다.

그런 슬로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겨울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고 말씀하시던 신영복 선생이 떠올랐다.

‘한 명’을 이야기하는 게 정말이지, 고맙고 찬란했다.

‘아이 한 명’, ‘한 아이’, ‘한 명의 아이’, ‘단 한 명의 아이’가 누구인가. 바로 그들이 수업시간마다 자고 있는 그 아이 아닌가. 그들이 바로 학교의 소수자 아닌가. 사회적 약자 아닌가. 우리 시대의 마이너리티 아닌가. 그들이야말로 존중해야 할 인간이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인류가 아닌가. 인간이기에 권리의 주체이고, 인류이기에 권리의 근거가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교육청 홈페이지의 슬로건 속의 학교는, 더 이상 출석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안 나오면 졸업장을 안 주겠다면서 협박하는 그런 관공서가 아니었다.

슬로건 속에 있는 학생들은 ‘한 명의 아이’까지 꿈이 있었고 미래가 있었고 인생이 있었다. ‘단 한 명의 아이’까지도 자기의 꿈을, 자기의 미래를, 자기의 인생을 설계할 권리가 있다고 슬로건은 선언하고 있었다.

그렇다. 공부 못하면 꿈도 꿀 수 없는 학교는 학교가 아니다. 정글이다. 하지만 학교에는 그런 아이가 아직도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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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를 만났다. 수업시간에 맨날 자는 놈, 쉬는 시간에는 담배 피우는 놈, 점심시간이면 아이들 후미진 곳으로 불러다 겁박하는 놈. 어찌어찌 그놈과 말을 텄다.

그러고서 한번 불렀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불쑥, “너는 꿈이 뭐야?”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놈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잠시 후, 눈이 퉁퉁 부은 채 들어왔다. 그러고 이렇게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아무도 나한테 꿈을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놈은 다시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 뒤, 그런 놈들을 불러다 물었다. 묻고 또 물었다.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를 나라도 전달해 주고 싶어서였다.

정말이지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다. 꿈을 꿀 수 있는 학교, 꿈을 꿀 수 있는 교실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학교는 잠재태가 현실태로 바뀌는 곳, 꿈이라는 가능태가 뼈와 살과 피를 얻어 행복한 삶으로 실체화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다닐 학교’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가는 ‘특수목적고등학교’가 아니라, 공부 못하는 놈들도 가는 ‘특수목적고등학교’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아니, 거기까지 안 해 주어도 된다고 했다. 학교 운동부도 오전에만 수업 받고 오후에는 운동하러 가지 않느냐며, 자기들이 오후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동네 빵집, 동네 미용실, 동네 중국집, 동네 양장점, 동네 양복점, 동네 세탁소, 동네 자동차정비소, 동네 인테리어집, 동네 꽃집, 동네 과수원, 돈에 태권도장, 동네 체육관, 또 동네 어디어디에 가서 하고 싶은 것, 하게 해 달라고 했다.

숨을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써먹을 수 있는 실용 기술을 배워서, 꿈을 꿀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원하는 선생님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물론 ‘나’도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선생님은 ‘교사 임용 시험’이라는 그런 죽음의 터널을 뚫고 나온 창백한 합격생이 아니었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할 테니까, 그 괴로운 교과서에, 참고서에, 자습서에, 문제집에, 마지막으로는 이비에스 수능특강에, 이비에스 수능완성에, 자기들을 밀어넣지 말아 달라고 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낡은 형식을 깨고 기존의 틀을 부수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 잔다. 그러다 영원히 잠들기도 한다.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다.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 2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 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40대가 되면 1위인 암에 밀려 자살이 사망원인 2위가 된다. 세포에 발생하여 차차 다른 곳으로 번져 가는 악성 종양이 암이다. 조직을 파괴하고 출혈을 초래하며 전신의 영양 장애를 일으키는 게 암이다.

그런데 암은 자살과 뿌리가 같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우리 아이들을, 아니 10대를, 20대를, 30대를, 40대를 그렇게 잠들게 하고 있다. 전 세계 최고다.

책 '학교는 죽었다' 표지.(에버레트 라이머 저, 김석원 역, 한마당, 1982)
책 '학교는 죽었다' 표지.(에버레트 라이머 저, 김석원 역, 한마당, 1982)

『학교는 죽었다(School Is Dead)』는 책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충격이 컸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하며 어느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과 겹쳐지면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삼십 몇 년이 흘렀는데, 이제는 그 말을 들어도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교육 자원의 분배는 공정과는 한참 멀게 더욱 왜곡되었고, 학교는 계층을 고착화하는 역할에 더욱 열심이었지만, 다들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지 한 세대가 훌쩍 지났지만, 더욱 악화한 사태를 보며 포기했을까. 다들 고개를 돌렸다. 부러 외면했다. 그러고 각자도생을 택하였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고 기후위기가 닥치면서, 사람들은 지구 최후의 날을 떠올렸다. 이제는 발상을 바꾸지 않으면 다 죽게 되었다는 것을, 마스크를 끼고 등교하는 초등학교 1학년의 불안한 눈빛에서 보게 되었다.

일반계 고등학교니 전문계 고등학교니, 특수목적 고등학교니 특성화 고등학교니, 구별하기도 힘든 지금의 교육 시스템으로는 아이들을 살릴 수는 없다.

전혀 다른 길,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한 아이’에게까지 살길을 열어 줄 수 있다.

오늘날 학교는 자본과 기술에 순종하는 신민들을 생산하는 제도로 변한 지 오래다. 가난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겪는 모멸감은, 공부를 못하게 되면서 더욱 내면화된다.

서구의 종교적 황혼에 “신은 죽었다”고 슬프게 말하던 니체처럼, 인간을 잃은 교육적 황혼에 “학교는 죽었다”고 누군가 울며 말해야 한다. 그래야 교육의 부활이 있다. 그래야 인간의 회복이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한민국 유권자가 참으로 현명하다는 사실이다. 눈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빠, 왜 히틀러에게 투표했어요?”라는 어느 독일 어린이의 질문이 필요 없는 선택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럴 만한 분들에게 ‘교육감이라는 권력’을, 그것을 행사할 만한 자격이 있는 분들에게 ‘아이들을 살릴 힘에의 의지’를 허락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삼가 말씀드리는데, 행동하시라. 교육부만 쳐다보지 마시라. 교육감들끼리 연대하시라. 교육감 중에 학자가 몇 분이며, 교육운동가가 몇 분이며, 교육행정가가 몇 분인가. 코로나 시대로 더욱 벌어져 가는 교육 격차를 인권 문제로 심각하게 바라보시라. 사랑도 받아 보아야 줄 줄 알 듯, 사람도 대접을 받아 봐야 남을 대접할 줄 안다.

이것이 진정한 인권 교육의 출발이고, 그래야만 학생들도 서로를 아끼는 ‘인권 감수성’을 비로소 체득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모든 재앙의 일차적 피해자는 항상 사회적 약자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이 필요하다.

학교는 인권 감수성이라는 생존 물품을 ‘단 한 명의 아이’의 생존배낭에까지 넣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아이들이 공감하고 연대하며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다.

그 선봉에 누가 있어야 하는가. 교육감이다. 교육감들이다. 교육감은 ‘교사 중의 교사’가 아닌가. 교육감이 움직이면, 교육장이 움직이고, 교장이 움직이고, 교감이 움직이고, 결국 교사가 움직인다.

아직도 이게 학교다. 그래서 아직은 톱다운(top-down) 방식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보텀업(bottom-up)이라는 새로운 방식이 교육 공동체를 움직이게 되면, 그때 학교는 부활의 첫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16개 시도교육청 교육감들의 집단지성이, 신비롭게 빛나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 궁핍한 시대의 우리 교육계를 새롭게 변화시킬 때, 인권 감수성은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다.

그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만, 비로소 ‘잠자는 아이들’의 생존배낭에까지 인권 감수성이라는 생존 물품을 넣어줄 수 있다.

코로나 시대, 기후위기 시대. 이 길 말고, 대한민국 교육계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