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사진=에듀인뉴스DB)
원격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사진=에듀인뉴스DB)

[에듀인뉴스] 사상초유의 온라인 개학으로 전국 학교가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4월 무렵의 일이다. 고경력 교사들의 병가 신청과 더불어 명예퇴직에 대한 문의도 부쩍 늘었다. 코비드19로 인한 급격한 변화, 불규칙한 학사일정, 그리고 난생 처음 만져보는 각종 원격수업 기술에 대한 두려움, 정보 인프라가 부족한 상태에서 교사 갈아넣기 방식으로 진행되는 원격수업으로 인한 자기효능감 저하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8월말이 되어 명예퇴직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정년 전에 교직을 떠나는 고경력 교사의 숫자가 오히려 예년보다 더 줄어들었다. 고경력 교사들이 원격수업에 생각보다 빨리 적응한 것이다. 교육방송 링크나 건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콘텐츠를 자체제작하는 비율도 75%가 넘었다.

밖에서 보면 나이 많은 아줌마 선생들에 불과하지만 그 또래 직장인 그 누구보다도 새로운 환경과 매체에 빨리 적응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비상 상황이라는 인식 하에 교육부, 교육청이 적극적으로 각종 정책사업과 행정업무를 감축하거나 중단한 효과가 컸다. 정책사업과 행정업무가 사라진 학교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교육기관'이 되었다. “수십년 경력 중 처음으로 교사가 교육자라는 것을 실감하며 근무한다”고 말하는 고경력 교사들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아무리 업무 난이도가 높아지고 낯선 기술에 적응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가르치기 위한 일”인 한 고경력 교사들은 이를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출처=참쌤스쿨)
(출처=참쌤스쿨)

그동안 교사의 열정을 차갑게 얼려 버리고, 명예퇴직 신청서나 만지작 거리게 만드는 원인으로 ‘교권실추’를 자주 거론하였다. 그런데 코로나 시국은 그 교권실추의 범인이 학생이나 학부모가 아니라 오히려 교사를 말단 행정직원처럼 부리고 창조성이라고는 전혀 발휘할 수 없는 행정기계의 톱니바퀴로 만드는 교육부, 교육청의 관료와 그들이 펼치는 각종 관료적 행정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 경험을 단지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교훈을 얻고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특히 진보 교육감을 자처한 분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동안 진보교육감들은 한결같이 정책사업과 행정업무 감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이를 실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각종 정책사업, 행정업무 담당자들이 저마다 그 불가피성을 강변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사업, 행정업무도 담당 장학사, 장학관에게 물어보면 다 교육에 도움이되고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문제는 정말 그러한지, 또 그 효과가 얼마나 얼마나 그러한지 평가할 방법도 기회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책사업이 중단되고 많은 행정업무가 유예되거나 감축된 2020년은 바로 이를 평가할 절호의 기회다. 평가 방법도 간단하다. 중단이나 유예의 결과가 학교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만 보면 된다.

그 결과는 다음 셋 중 하나로 나타날 것이니 여기 따라 분류하면 된다.

1. 그것을 중단하거나 감축함으로써 학교 교육 현장에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발생하였다.

2. 그것을 중단하거나 감축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 현장에 아무런 애로사항이 발생하지 않았다.

3. 그것을 중단하거나 감축함으로써 학교 교육 현장이 오히려 더 활발해지고 교육이 살아났다.

1에 해당되는 사업이나 업무라는 꼭 필요한 사업이나 업무라는 뜻이다. 여기 해당되는 것들이라면 다소 힘들고 복잡하더라도 코로나가 완화되면 다시 복구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교육부, 교육청에서 학교에 요구해왔던 사업이나 업무들 중에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그들에게는 매우 섭섭한 소식이겠지만 2020년 10월 현재 교육부, 교육청의 각종 정책사업이나 업무가 중단되거나 감축되어서 학교 현장에서 교육에 어떤 어려움이 발생하고 교사들이 고충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은 바 없고, 보고된 바도 없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업이나 업무는 2나 3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2에 해당되는 사업이나 업무는 한 마디로 쓸모없는 일이다. 있으면 누군가 하긴 해야하니 수고스럽고 없어도 하나도 티가 나지 않는 그런 일들이다. 사실 교육부, 교육청이 학교에 요구한 사업이나 업무들 중 대다수가 바로 여기에 속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사업이나 업무들이 딱히 해롭거나 교육 방해요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도움도 좀 된다. 그래서 교사들은 없는 것 보다는 났겠지 하는 마음에 이를 감내하는데, 여기에 투입되는 시간이 턱없이 많아 정상적인 교육 활동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를 소극적인 교육 장애물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3에 해당되는 사업이나 업무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아예 교육에 방해가 되는 사업이나 업무,이것을 수행하려면 정상적인 교육과정 운영을 잠시 멈추고 여기 몰두해야 하지만, 막상 도움은 전혀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능동적인 교육 장애물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분류가 끝나면 교육부, 교육청은 코로나 국면이 진정 되더라도, 이전에 하던 사업이나 업무를 기계적으로 되돌리지 말고, 하지 않아도 별 문제 없었던 사업이나 업무들을 영구적으로 일몰시켜버리면 된다.

코로나 국면 때 안 해도 문제 없었던 일이, 코로나가 진정되었다고 더 필요해 질 이유는 없다.

특히 ‘진보 교육감’을 자처했던 분들은 더더욱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동안 그들이 외친  ‘교육이 중심이 되는 행정’이라는 구호를 기억한다.

교사에게 학생과 교육을 찾아주겠다며, 모니터가 아니라 아이들을 보며 살아갈 수 있게 하겠다고 그 얼마나 아름다운 구호들을 외쳐 왔던가?

진보는 결과로 말한다. 진보라는 것이 어디서 가져온 이념이나 구호를 현실에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진보가 아니라 수백년 전 사화와 당쟁으로 국력을 낭비한 사림과 다를 바 없다. 진보는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오래된 신념이나 가치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열린 태도다.

진보교육감은 이념과 가치가 아니라 그 임기가 끝날 무렵 이전/이후 무엇이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 그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 기간 동안 교육 현장이 더 활기차 지고, 교사들은 더 많은 보람과 열정을 느끼며, 학생들은 보다 확장된 성장과 발달의 가능성을 보장받도록 바뀌었는가? 교육의 혁신과 발전을 가로막던 여러 낡은 관행, 규정, 절차, 그리고 교육의 목적 전치 현상을 일으키는 장애물들이 타파 되었는가?

여기서 긍정정인 대답을 얻어낼 수 있다면 이념과 가치야 뭐가 되었건 진보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는 커녕 수구보수나 다름 없으며, 심지어 표리부동하다는 비난을 추가로 더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진보라 부르면 그만큼 책임이 큰 것이다. 사실 그 동안 진보교육감들은 진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2학기 들어 그 동안 유보되거나 감축되었던 각종 행정 업무들이 다시 부활하며 학교 현장은 댐에서 방류하듯 쏟아지는 공문과 업무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명퇴하려던 교사들마저 붙잡았던 잠깐의 시기를 그저 우연한 에피소드로 만들 것인지, 진보의 계기로 만들것이지, 그 갈림길이 열려있다.

부디 진보의 길을 선택하기 바란다. 아름다운 말 보다는 구체적인 결과로.

권재원 서울 마장중 선생님/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사진=지성배 기자)
권재원 서울 마장중 선생님/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사진=지성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