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경쟁에서 이겨야만 성공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이다. 

경쟁이 일반화된 현재에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경쟁하지 마세요”라고 주장하는 지식인이 있다. 바로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베스트 셀러 작가이자 전직 미국 대학의 교수이고 승려인 혜민 스님이다. 

그는 중앙일보의 칼럼(2020.10.14.)에서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키면서 성공하고 싶다면 경쟁이 없는 곳으로 가서 독창성을 가지고 새로운 사업이나 창작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처음엔 주위 반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세상을 바꾸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경쟁에 찌들어 행복을 찾기 어려운 요즘의 우리들에게 이색적인 제안처럼 들린다. 하지만 학자들 중에는 이미 경쟁을 야만과 동일시하면서 경쟁교육에 레드카드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먼저 오늘날 우리 세상에서 경쟁의 실태를 살펴보자.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모든 것을 경쟁(競爭)의 논리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을 위주로 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신자유주의 정책 시스템은 그 기저에 극심한 경쟁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경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제반 영역까지도 지배하고 사람들은 이에 희생되어 삭막하고 끔찍한 삶을 살아간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하게 될 경쟁은 이른바 ‘폭력사회’ 내지 ‘야만사회’의 주범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경쟁은 이미 ‘국시(國是): national policy’가 되어 버렸다. 

현재의 진보 정권에 ‘교육혁명’을 기대한 사람들의 실망이 크다. 지금은 교육을 뿌리부터 혁신해야 할 때라고 믿는데 이에 발등에 도끼를 찍힌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밥에 그 나물’처럼 무늬만 개혁을 부르짖던 보수 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이젠 보수, 진보할 것 없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한국 교육의 영혼이자 원리인 경쟁 이데올로기를 폐기하는 것이다. 

경쟁 이데올로기는 교육 영역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지배해온 이념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경쟁을 긍정하고, 심지어 당연하게 여기는 보기 드문 사회이다. 경쟁 자체가 ‘악’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중세 시대에는 경쟁이 죄악이었고 때로는 살인에 처해지는 중범죄였다. 

하지만 현대는 이런 인식 자체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실로 경쟁지상주의 천국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전락한 중요한 요인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한국 사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지적했다.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가 그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쟁이 다른 부정적 특성들의 원인이라는 사실이다. 목숨을 건 경쟁으로 인해 개인주의가 극심해졌고, 일상은 황폐한 사막이 되었으며, 생활 리듬은 살인적인 속도를 장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그러나 눈길을 외부로 돌려보자. 오늘날 독일교육의 초석을 놓은 1970년대 교육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경쟁에서 야만의 징후를 주시했다. 

“경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교육에 반하는 원리”로서 “인간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결코 경쟁 본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또 그는 경쟁을 “의심의 여지없는 야만”이라고 힐난한다. 

경쟁에 반대하는 아도르노의 교육이념이 실현됨에 따라서 독일의 학교에서는 경쟁은 야만 행위로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우열을 가리는 석차는 사라졌다. 학생은 서로 다른 취향과 재능을 지닌 개성적 존재이지, 우열을 나누어 일렬로 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독일인에게 부러운 사실은 그들이 어떤 일에 종사하든 모두가 당당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비친 많은 독일인에게서 좀처럼 열등감을 가진 이를 찾기가 힘든 이유이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신기한 별나라 교육환경일 뿐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어떤가? 한국에선 열등감이 없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판사, 검사, 의사, 교수도 예외가 아니다. 끝없는 경쟁의 수직적 위계 속에서 언제나 누군가가 나보다 위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망국의 근원이라는 ‘사교육’도 결국 타인에게 뒤지지 않기 위한 경쟁의 논리가 압도적이다. 타인보다 탁월함, 유능함을 발휘하여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서구사회에서의 교육적 접근은 애초부터 불행을 자초하는 한국과는 근본이 다르다. 

 『제로 투 원』의 저자이자 페이팔을 창업했던 피터 틸에 따르면 경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경쟁을 하다 보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경쟁하는데 소모적으로 다 쓰게 되어 정작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이나 새로운 시장의 개척 없이 단지 생존만을 위해 싸우다 다 함께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미국 항공사들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갈수록 이윤이 작아져 결국 여러 항공사들이 우르르 파산했던 경우가 그것의 예(例)이다. 

마이크로 소프트(MS)와 구글(Google)이 검색엔진을 포함한 비슷한 여러 사업에서 경쟁하는 동안 애플(Apple)이 아이폰과 같은 신기술로 세계 최고 기업 가치 회사가 된 것도 또 다른 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적어도 교육 분야에서만큼은 시사점을 얻어야 한다. 즉, 교육혁명은 경쟁교육의 폐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교육의 본질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소양과 재능, 잠재력을 발현(發現)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다. 모든 인간을 획일화된 기준에 맞춰 줄 세우고, 수직적 위계질서에 배치하는 가혹한 경쟁교육이 초래하는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어린 학생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경쟁교육에서 공존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에게 이런 교육을 기대한다는 것은 과연 언제나 가능할까?

교육부의 미래 시계도 국방부의 시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정해진 목표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힘차게 돌기를 간절히 욕망(欲望)하는 바이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