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의 메카 '회족거리',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곳 '화청지'

[에듀인뉴스] 중국, 가까운 듯하면서 이질감이 드는 곳이다. G2로 미국과 견주고 있는 중국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을 비웃는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 지리상으로 가까워 문화적으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중국. <에듀인뉴스>는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를 통해 중국의 도시에 살아가면서 느낀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현지에서 중국을 접하고 알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인해 중국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과거에 대한 이해와 미래를 예측해보는 작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알다가도 모를 중국!

시안 성벽 안 중심가에 있는 종루.(사진=김현진 교사)
시안 성벽 안 중심가에 있는 종루.(사진=김현진 교사)

다양성의 메카 '회족거리'를 가다


[에듀인뉴스] 중국의 시안은 당나라 시절 장안으로 불렸다. 실크로드 기점으로 인구 100만명의 국제적인 도시였다. 신라 1000년의 수도였던 경주도 장안과 함께 국제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높이 5m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장안은 지금의 신도시들처럼 바둑판 모양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실크로드의 영향으로 외국인들이 많이 장안으로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이중 대표적인 민족이 아랍민족인 회족이다. 현재는 언어와 모습에서 한족과 별 차이는 없지만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에서 구별이 된다. 지금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장족, 만주족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약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종루 옆 상가를 비집고 들어가면 나오는 고루.(사진=김현진 교사)
종루 옆 상가를 비집고 들어가면 나오는 고루.(사진=김현진 교사)

고루의 뒤쪽에 형성된 회족거리에는 흰 모자를 쓴 회족들이 여러 상점에서 장사하고 있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즉석에서 양고기를 발골하고 나무 꼬치에 끼워 다양한 향신료를 뿌려 양꼬치를 굽는다.

그 밖에도 기름에 구은 만두, 서안 회민가라고 적힌 예쁜 병에 담긴 요거트 등 다양한 먹거리 등을 팔고 있다.

다양한 간식거리를 사먹으며 회족거리를 체험해보는 것도 좋다. 입이 짧은 나에게 한국에서 똑같이 파는 회오리감자, 튀김만두, 요거트 등은 맛이 있어 먹을 만하다.

고루 옆 회민가.(사진=김현진 교사)
고루 옆 회민가.(사진=김현진 교사)

기다랗게 이어진 회민가를 걷다보면 한국의 인사동 또는 인천 차이나타운 거리를 걷는 느낌이 든다. 크게는 여러 나라 사람들, 좁게는 국내 여러 지역의 사는 모습들을 보면 우리 삶과 비슷한 면도 다른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도 알아가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근래 한국학교에서는 다양한 문화 인식 및 이해를 통해 틀림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해 가는 세계시민교육과 다문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이라 하지만 56개의 민족들이 서로의 문화를 포용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거기서 벌어지는 충돌(?) 등을 보면 물리적인 통일은 처음부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회족거리를 돌아 나오며 다시 한번 고루와 종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본다. 상점 간판에 장안이라는 글자를 보면 이곳이 옛 당나라 시절의 국제도시였음을 다시 짐작해보게 한다.

화청지 입구 장한가 매표소.(사진=김현진 교사)
화청지 입구 장한가 매표소.(사진=김현진 교사)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곳 '화청지'


시안 여행 계획을 처음 세울 때에는 길게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일정이 2박 3일로 짧아 꼭 가볼 곳만 가자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오고 가는 날을 빼면 두 번째 날에 가장 우리 몸을 힘들게 하는 일정으로 정해야 했다.

시안에 가면 꼭 가봐야 할 장소들이 5악 중에 하나인 화산, 그리고 비슷한 장소에 몰려 있는 화청지, 병마용, 진시황릉 등이다.

일단은 두 번째 날 일정으로 화청지, 병마용, 진시황릉을 정하고 화산을 마지막 날 무리해서 다녀오려고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화산은 이번에 생략하는 것으로 하였다. 또 언제 올지 모를 곳이라 자꾸 여행일정을 무리하게 세우는 습관이 생긴다. 그러다 못 가는 곳이 생기면 아쉬움이 든다.

한국에 있을 때도 고궁을 가거나 유적지에 가면 문화 해설사를 꼭 신청하여 설명을 들었다. 시교육청 특별연구교사를 수행하면서 학급의 아이들과 송내관과 함께하는 경복궁 역사체험을 간 적이 있었다.

다양한 설명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활동들을 하니 아이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체험 중에 관광객 중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경복궁에 대한 문제를 내고 맞추게 하는 동영상 촬영 미션이 있었다. 지금은 고등학생인 그 친구들이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역사체험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역사수업도 이렇다면 좋을 텐데...

가족들과 중국 여행을 다니면서 나름 공부한 내용을 설명해 주는데 내용의 부실인지, 아니면 가족이라 너무 편해서 그런지 잘 안 듣는다.

그래서 시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화청지, 병마용, 진시황릉에서는 여행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고자 한국 가이드가 있는 1일 투어를 신청하였다.

양귀비와 당현종의 사랑 이야기인 장한가 공연을 함께 보고 싶었지만 패키지로 엮는 상품은 다 팔렸다고 하여 1일 투어만 하기로 했다.

가는 교통편, 입장권 예매하는 문제 등 신경을 안 써도 되니 한결 편한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9시에 종루벨 호텔 로비에서 가이드를 만나기로 하였다. 우리 호텔 바로 옆에 있는 호텔이다. 가이드 그리고 투어에 함께 할 다른 일행을 만나 인사를 하였다. 우리와 함께 투어를 하게 된 한국일행가족은 아빠, 엄마, 중학생 딸이다. 잠깐 휴가를 내어 가족이 함께 온 모양이다.

12인승 버스에 올라서자마자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중국,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에서 시안이 갖는 의미, 시안의 유명한 문화재들, 화청지, 병마용, 지하궁전, 진시황릉에 대한 설명들을 1시간가량 듣다 졸다 하면서 첫 번째 방문지인 화청지 앞에 도착하였다.

화청지 전경.(사진=김현진 교사)
화청지 전경.(사진=김현진 교사)

화청지(华清池)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에서 북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곳에 있는 유명한 온천지 중 하나이다. 아직도 인근에 온천이 꽤 많다. 진나라의 시황제나 한나라의 무제(武帝) 등 여러 황제들은 이곳에 별궁을 두어 온천을 이용했다고 한다. 화청지로 가는 버스에서 밖을 보니 온천이 있는 리조트와 대학이 많이 보인다.

화청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생활한 왕실 원림으로 이곳에 궁을 만들어 화청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한가(長恨歌)에도 화청지가 등장한다. 화청지 앞 동상에서 사진을 찍고 나니 많은 관광객들 속에 설명을 잘 듣지 못할까봐 가이드가 이어폰을 주었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보니 중국 전통의 건물들과 앞에 어우러진 연못, 그리고 뒷부분의 여산과 케이블카 등이 보인다. 저녁 무렵에는 저 연못에 조명을 비추고 무대가 올라와 장한가 공연이 시작된다고 한다.

자유여행과 일일투어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여행이 아니다 보니 여행 장소에 대한 물리적 이해가 떨이지게 된다.

장소에 대한 구조를 파악한 후 동선을 생각하면서 장소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동시에 하게 된다. 그런데 수동적으로 따라다니다 보니 비슷한 건물을 연속적으로 보게 되니 기억에 남는 것이 많지 않다.

양귀비의 동상을 본 후 양귀비와 당현종이 목욕을 했던 온천탕 여러 개를 차례로 봤는데 방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양귀비와 당현종이 목욕을 했던 온천탕.(사진=김현진 교사)
양귀비와 당현종이 목욕을 했던 온천탕.(사진=김현진 교사)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연화탕, 양귀비가 목욕을 하던 귀비지나 부용탕이라 불리기도 하는 해당탕이 있다. 연속으로 태자탕, 관리들이 목욕하던 상식탕도 있다.

양귀비가 온천을 한 후에 머리를 말리던 누각, 양귀비상, 두 사람의 침실이었던 비상전 등 화청지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를 배경으로 하는 장소이다.

양귀비는 중국의 4대미녀(서시, 왕소군,초선, 양귀비)로 아름답고 가무에 능해 음악을 사랑하는 당나라 현종 임금의 마음을 한 눈에 빠지게 했다. 양귀비에게 한 눈에 반하여 상사병에 걸린 시아버지 당현종이다.

양귀비는 혼인했던 남편과 인연을 정리하고 양귀비가 되었고 현종은 양귀비를 일러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라 불렀다. 그만큼 양귀비를 많이 사랑했고, 양귀비에 빠져 국정운영에도 소홀하게 되었다.

양귀비와 당현종은 천생연분이라고 하는데, 양귀비는 아름답지만 암내가 심해서 항상 향수를 지니고 다녔으나 당현종은 비염으로 냄새를 잘 맡지 못했다고 한다.

화청지 안 양귀비 상.(사진=김현진 교사)
화청지 안 양귀비 상.(사진=김현진 교사)

양귀비는 지금의 미인상과는 다르게 165cm키에 70kg으로 통통하였다.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니고 있으며, 희고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온천물에 목욕하고, 매일 다른 화장을 했다.

안녹산의 난으로 인하여 양귀비가 죽으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끝을 맺고 만다.

화청지는 1936년 시안사변이 일어났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중국의 역사와 시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를 한국에서 여행 온 관광객 정도로만 알고 있는지 시안사변 관련 장소를 가보지 않고 슬쩍 넘어간다.

나중에 점심장소로 이동할 때 물어보니 별볼 것이 없다고 넘어간다. 이래서 개인 자유여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시안사변은 시안의 화청지에서 국민당의 장제스를 장쉐량이 감금한 일인데 이 사변으로 거의 소멸되어 가던 공산당이 기사회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가 중국의 군벌 세력을 통일시킬 즈음 중국 본토로 일본이 침략하여 들어오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공산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 섬멸작전을 시작했고 공산당인 홍군은 서쪽의 산악지대를 도는 대장정을 통해 도망을 간다.

공산당이 거의 섬멸되기 직전 장쉐량은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합작을 통해 대륙을 침입한 일본을 먼저 몰아내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이를 받아들인 장제스를 감금에서 풀어줬다.

이 시안사건으로 장제스는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정치범을 풀어주며 2차 국공합작을 맺게 된다.

장쉐량은 만주 군벌의 아들로 일본에 항거하기 위하여 장제스 휘하로 들어온 인물이다. 선양에서 가봤던 장씨수부가 바로 장쉐량 가족의 가옥이다.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기사회생하게 한 장쉐량이 영웅일 수 있지만 국민당의 입장에서는 본토를 버리고 타이완 섬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것이다.

시안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중국의 역사가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대부분 중국사람이 국민당에 등을 돌린 게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지만 국민당은 월등하게 유리한 상황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나중에는 중국 본토를 공산당에게 내주고 타이완섬으로 쫓겨 가게 된 것이다.

장쉐량은 타이완에서 1990년대까지 연금 상태로 갇혀 지내게 되었으며 장제스가 죽은 후 하와이로 떠났다가 그 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리기 전까지 장제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던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처음 타이완 섬으로 쫓겨 간 장제스와 국민당 지도부들은 다시 대륙으로 금방 올 줄 알았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면 역사는 참 아이러니 하다.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