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이라는 이름

여기까지 오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지난시간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이 첫 번째 고갯길이었습니다. 축구로 치면 전반전이 끝난 셈이지요. 지금부터는 완만한 내리막길이라 한결 수월할 겁니다. 그럼, 높은 데서 아래로 물이 흐르듯이 스르륵 가볼까요.

기분이 차분해지는 정경입니다. 연못 앞에 이층집이 있군요. 어쩌면 작은 호숫가 어귀처럼도 보입니다. 곧게 솟은 나무가 집 정면을 약간 가리고요. 가로등이 하나 켜져 있습니다. 어둑할 무렵인데, 이층왼쪽 끝 창문 두개만 불이 들어와 있고, 나머지 창들은 덧문이 닫힌 채라 불을 끈 건지 아닌지 알지는 못합니다.

하늘은 한낮처럼 보입니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가득 떠있습니다. 대비효과 때문에 집은 더 어둡게, 하늘도 덩달아 약간 어둡게 느껴집니다. (명도, 채도대비라는 건데 넘어갑니다.) 화집을 펼치면 흔히 “낮과 밤, 하늘과 땅이라는 상반된 대조를 한 화면에 놓아, 낯설고 환상적인 정경을 연출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제 눈엔 그저 평범한 풍경으로만 보입니다. 북유럽에서 보는 ‘백야’ 같습니다만, 여름날 해질 무렵이면 가끔 저런 장면이 나타납니다. 길은 어둑한데 하늘을 보면 아직 훤한, 그런 경험들 있으시지요? 어떨 땐 새벽인지 초저녁인지 헷갈립니다. (제 후배는 어릴 때 낮잠 자고 일어나선 멋모르고 학교간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백야가 아니라면, 저런 현상이 나타나는 시간은 짧습니다. ‘매직 아워(Magic Hours)’라고 부릅니다. 그 시간에 맞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일본영화였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되어 내용은 기억 안 납니다. 아무튼 완전히 ‘허구인 공간’ 같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림은 보는 사람 마음이니까요.

작가가 일부러 낮과 밤을 섞어놓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작품은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세상 모든 작품의 숙명입니다. 그러려니 해야 되겠지요. 자식을 키워 결혼시키는 부모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너를 낳고 길렀지만 이제 네 갈 길로 가거라. 울든 웃든, 비포장이든 가시밭이든 네가 가야 되는 길이다. 부디 잘 가렴.” 예전에 어디선가 대충 이런 구절을 읽은 것 같습니다. 뭐 그런 거지요.

아니면, 작가가 아주 미세하게, 살짝만 ‘기술’을 쓴 건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바로 위에 절묘하게 서있다”는 것인데요. 작가가 일부러 서로 상반되거나 낯선 소재를 끌어와 한 화면에 늘어놓는 경우 대개는 이렇게 됩니다.

‘낯선 만남’이라고 번역되는 기법입니다. 어느 프랑스시인이 처음 썼습니다. 현실 같지만 현실이 아닌, 그래서 ‘초현실’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이상한 미술흐름을 일으킨 양반입니다. 지금 갑자기 성함은 생각 안 납니다. 정확한지는 자신 없으나 대충 이런 시 구절입니다. “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만나듯이 아름다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검시용 해부대 위에 재봉틀과 시커먼 우산을 같이 올려놓으면 깨나 어울리기도 하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생뚱맞은, ‘낯선 만남을 통해 뭔가 정감을 이끌어낸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마그리트가 이런 흐름을 따른 대표적 작가입니다. 달리와 에른스트도 있는데 제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에른스트는 (동성애자라) 친구마누라의 남편을 꼬드겨서 안 좋아하고, 달리는 친구마누라를 홀랑 빼앗아서 안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취향일 뿐입니다. 그림을 하나 더 보시지요.

‘꿈으로 가는 열쇠’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창밖너머 파란 하늘에 또 뭉게구름이 둥실 떠있고, 아스라이 수평선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방 안쪽으로 약간 열린 창문에도 구름이 비치네요. 얼핏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합니다. 열린 창문사이로 보이는 바깥은 깜깜하고요. 오른쪽창문 모서리윗부분은 유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립니다. 투명한 유리창너머 바깥풍경이 보이는 건지, 또 다른 방향의 풍경이 이쪽창문에 비치는 건지를 도통 모르게 그려놓았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그림입니다.

이번에는 방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또 헷갈립니다. 투명한 통유리집인지, 뭉게구름벽지를 바른 집에 때마침 구름이 걸쳐진 순간인지... 왼쪽문틀아래에 놓인 하얀 알 모양의 방향제처럼 생긴 동그란 원은 또 뭘까요? (여성용피임기구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림을 보노라니 묵은 기억이 슬며시 떠오릅니다. 하도 오래되어 뒤죽박죽인데 억지로 되살려 보겠습니다.

기형도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중앙일보 기자였습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라는 시로 등단했습니다. 젊을 때 이 시인의 시를 한번만 읽으면 누구든 팬이 됩니다. 묘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시 세계를 가졌습니다.

그가 등단하기 전 아직 학생일 때 우연히 신촌서 만났습니다. ‘천재화가 손상기 편’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너나없이 다들 집시처럼 살던 시절입니다. 술을 같이 마셨습니다. 저보다 세 살 위입니다. 객기가 철철 넘치던 시절이라 형이라고 안 불렀습니다. 그게 불만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자기 기분에 그랬는지는 모릅니다. 한창 술 마시며 각자 헛소리를 늘어놓던 중에 그가 불쑥 그림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미술학교 다니는 학생한테 미술학교 안 다니는 학생이 그림이야기를 먼저 꺼내면, 결투신청으로 간주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말도 안 되는 짓거린데 그런 시절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벌써 30년도 넘었군요. “니들 르네를 아냐?” 이랬던 거 같습니다.

안 그래도 다들 심심하던 차에 “마그리트를 아냐?”고 했으면 됐을 걸, 하필이면 이름을 물어볼게 또 뭐란 말입니까. 폴 메카트니는 한국에서는 보통 폴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사단이 났습니다. 르네는 또 뭔데? 어쩌고 하며 시비가 붙는 바람에 그날 아름답던 술자리는 생각하기도 싫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한두 번인가 더 만나 술 마셨습니다. (지금은 못 마시지만 그때는 제가 그럭저럭 마신 축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미술학교를 다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마그리트 이야기를 또 하더군요. “어차피 하려고 했던 건데 그날 못했으니 다시 한다”면서. 술 먹고 들은 소리라 정확하게는 기억 못합니다. 세월도 많이 지났고요. 억지로 이어붙이면 아마 이런 정도이지 싶습니다.

“세상은 텅 빈, 집이나 방이다. 인간의 삶은 그 빈집 창문에 무심히 잠깐 비친 구름과 같다. 마그리트 그림을 봐라.”

몇 년 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 인간(‘그 인간’의 오자 아님)이 신문사 취직했다고 술 사준단다”며 같이 가자던 친구한테서 들었습니다. 친구는 “하필이면 종로 ‘파고다극장’ 안에서 죽었냐?”고도 했습니다. ‘왜 하필 그 극장’인지 부분은 자세히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당시 그곳은 동성애자들의 접선장소로 유명)

죽은 그해인 1989년 사후시집이 나왔습니다. 제가 늦게 간 군대를 제대하던 해입니다. 시집을 사서 방 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꼼짝도 안하고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자 슬며시 눈물이 나더군요. “니들 르네를 아냐?”던 눈빛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시니컬하고 외로움에 떨던 그 눈빛. 떠올린 김에 기형도의 시 몇 편 소개하고 마칩니다. ...괜히 술 생각이 나는군요, 이런!

<대학 시절>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