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영국교장노조는 조합원 75% 지지로 12월에 교사노조와 함께 파업에 동참하기로 결의했다.(사진=영국데일리메일) 

[에듀인뉴스] 영국과 프랑스에서 교장들이 시위를 하고 파업을 결의하는 일은 낯설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교사가 파업하면 부분 수업이라도 진행되지만 교장이 파업하면 학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교사의 연금 삭감 등 정부의 신교육개혁 조치에 대해 영국의 교장노조(NAHT)는 파업을 결의한 적이 있고, 유럽의 많은 국가가 교장들의 시위와 파업을 놓고 고심하는 일이 적잖다. 

최근 서구 OECD 국가의 교장 시위는 빈번해지고 있다. 러시아 같은 보수 국가에서도 교장들의 거리 시위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영국처럼 교장들이 파업을 결의한  예가 없다.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비슷한 전례는 있다. 이명박 정부 때 일제고사 강행에 대해 전교조 출신 전북 장수 중학교의 김인봉 교장이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 지침을 거부하면서 일제고사를 시행하지 않았고, 1989년 전교조 해직 사태 때 거창고등학교는 정부의 해직 명령을 거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인 1인 시위 같은 것일 뿐 우리나라에서 교장들의 집단행동은 없었다. 교장들이 보수적인 교원단체를 등에 업고 정년 단축이나 교육위원회의 지방의회 통합, 지역교육청 폐지 등 교육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집단 성명서를 내고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 전부였다.

한국에 시위하는 교장들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집단시위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교육정책이 완벽한 것일까? 아니면 본래 의학적으로 시위를 하지 않는 DNA를 지닌 교원들로만 교장을 선발한 것인가? 교장들이 시위를 해도 큰 문제지만 ‘전혀 시위를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시위를 하지 않는, 혹은 하지 못하는 교장은 인간적으로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전혀 오류를 느끼지 않거나, 혹은 느끼지 못하는 교장들에게 정부 주도의 교육정책은 완벽한 것이고 그 완벽한 교육정책에 반기를 들거나 불평을 하는 교사와 학생은 ‘불완전한 존재’로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교장들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때로 공개적인 의사 표현도 하고 집단시위도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지식인으로 정상이 아닐까? 교장들은 해방이후 지난 75년 동안 별말 없이 잘 지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피터스(Peters)는 “교육은 그 목표가 아무리 선해도 그것을 이루는 과정이 정의롭지 못하면 교육이랄 수 없다”고 했다. 그렇기에 교육은 종종 토론과 표현으로 인해 시끄러울 수 있고 반대도 하고 시위도 하는 것이다. 

이 땅의 교장선생님들에게 ‘교육의 목표는 침묵’으로 느껴지는가? 교장들의 침묵!, 그것은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알지 않고는 교육개혁의 실패를 진정으로 논하기 어렵다. 

교장은 학교 구성원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최대의 요인이고 교육정책의 현장 집행자이기 때문이다. 교장이 바뀌면 학교가 바뀌고 교장이 무능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 교장들의 정체성(Identity)을 꿰뚫어 보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야 말로 교육개혁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정부와 교육계는 이 문제를 애써 외면해 왔다. 교장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책의 마련이 시급하다. 

(사진=kbs 캡처)

42만 교사들과 900만 학생의 아우성보다 5만명 전교조 교사들의 연가투쟁보다 1만2000명 교장들의 능동적 사고와 적극적인 행동이 교육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교장들이 데모를 못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교육개혁의 근원적인 숙제를 푸는 일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한국의 교장들은 겉보기보다 행복하지 못하다. 학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도를 바꾸거나 교육과정의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별로 없다. 학교의 예산권과 교사 징계권, 인사권도 제대로 주어져 있지 않다. 

경영권은 없고 교육청으로부터 하교를 위탁받아서 시키는대로 운영하는 한계에 그친다. 그러니, 그저 교사들을 붙잡고 조퇴와 연가를 시켜주느니 마느니 씨름하면서 주의장만 남발하는 가운데 인간성만 나빠진다. 

유일하게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근평조차 전가의 보도로 쓰이지 못한다. 막강한 근평도 ‘교포’(교장승진을 포기한 교사)들이나 전교조 교사들에게는 녹슨 칼일 뿐이다. 

교장들은 교육부의 단위제 교육과정이 얼마나 경직되었는지는 알면서도 뻔히 눈 뜨고 교육부가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다. 코로나19의 방역 전체를 전문적인 실무사 배치도 없이 교직원이 감당해야하는 모순에도 입 벙긋 못하고 있다. 수업일수 190일을 유지하면서 주5일제수업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교장들은 묵묵히 수용한다.

교사들에게 그런 교장의 모습은 ‘마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장은 자리를 보전하고 무탈하게 임기를 마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은 사람으로 비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매우 개혁적이고 혁신적인 마인드를 지닌 교장들일수록 교육정책에 불만이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연대하여 정부에게 시정을 촉구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태생부터가 할 수 없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장들이 잘 할 수 있은 것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승진게임이다. 한국에서 차기 교장은 대체로 현직 교장만이 만들 수 있다. 과정과 내용이 그렇다는 뜻이다. 교사가 교장이 되기 위해서는 근무평정(근평) 1등을 받아 교감으로 승진하거나 일찌감치 교육전문직으로 진출하여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교감․교장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다. 

평교사가 교감이 되려면 평균 25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지만 교육전문직은 교직경력 15년 내외면 응시할 수 있고, 합격이 되면 대략 7년 안에 교감과 교장자격증을 취득한다. 그들에게는 순탄하고 빠른 승진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교육전문직을 교장 승진의 엘리베이터라고 부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실상 ‘대한민국의 차기 교장은 현직 교장이 임명하는’ 이상한 승진체계가 형성되었다.

교장 임용에 있어서 유일한 결정권자는 현직 교장인 것이다. 대통령이나 교육부 장관이나 교육감도 여기에 관여할 수 없고 학부모도 끼어들 수 없다. 

한국의 교장제도는 교사의 삶을 규정한다. 한국에서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승진이다. 승진을 추구하는 승진파 교사들은 승진을 위한 생활주기(Life Cycle)를 살아야 하고, 승진에서 소외되는 교사나 승진을 추구하지 않는 교사들은 아무리 열심히 소신을 갖고 일해도 결국은 교육활동에서 승진한 자들의 지시를 이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승진을 못한 교사는 자기의 소신과 철학과 상관없이 ‘패배자’ 취급을 당한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하고 싶은 교육활동에 대해 승진한 동료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견제를 당한다. 아무도, 누구도 이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장 승진구조는 한국의 교육을 규정하는 정체성(Identity)이다. 

이러한 먹이사슬 구조는 교장의 정체성을 다중화시킨다. 제도를 바꾸거나 시정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져 있지 않되 교사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관리권’을 불하받았으니, 오직 통치하고 군림하는 제도만 열려 있다. 

교장 개인의 마인드와 능력이 혁신적이라 하더라도 제도를 개혁할 수 없으니 그저 통치하고 군림하는 것이다. 데모? 어림도 없는 말이다. 이렇게 태어난 교장들이 어떻게 데모를 할 수 있는가?

대안은 언제든 있다. 교장 선생님들에게 데모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주자. 그분들이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집단 투쟁도 하게 하자.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교장이 되도록 배려해주자. 어찌해야 할까? 우리 사회가 먼저 두 가지를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첫째, 교장을 본래의 교사로 되돌리자. 교장은 본래 교사다. 외국은 대체로 교장, 교감, 교사는 서로의 직무가 다소 다를지라도 신분은 ‘교사’ 하나로 통일되어 있고, 거의 모두 함께 교사노조에 가입되어 있다. 

교장, 교감, 교사의 공통 명칭은 그냥 ‘교사’(teacher)다. 우리나라처럼 ‘교원’(Kyowon)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쓰는 나라는 중국과 일본 밖에 없고, 그나마 교사, 교감, 교장의 자격증을 별도로 분리하여 신분을 달리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영국은 교장의 자격요건이 헤드십(Head Ship)이고, 미국은 스탠다드(Standard)이다. 독일은 헌법에 교장은 교사라고 되어 있고, 프랑스나 일본도 교장은 교사이며 별도의 자격증이 없다. 그러니 정부의 교육개혁에 대해 교사와 교장이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는 것이다. 함께 같은 처지에서 교육을 걱정하고 정부에 문제제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교장노조를 만들어 주자. 영국의 전국교장협의회(NAHT)는 영국의 Head Teacher(교장)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다. 영국 내 초등학교 85%, 중학교 40% 이상이 전국교장협의회에 가입해 있으며 회원수만 2만4000명에 이른다. 

예컨대 과거 영국에서는 일제고사(SATS)와 관련 교장노조에서 총 투표로 교장의 61.3%가 일제고사 감독 거부에 찬성해 보이콧을 결정한 적이 있다. 교장의 노동조합 가입은 대부분 선진국들의 일반적 현상이다. 미국의 최대 교원노조인 NEA에는 평교사와 교장, 교육행정가, 학교 직원이 모두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핀란드는 역시 교장도 교사노조에 가입되어 있다. 
 
교장이 데모를 하면 교육이 변한다. 교장은 학교의 운영자이고 학교행정의 최종 결정권자다. 그런 교장들이 무력하게 정부의 지시만 맹종한다면 교육의 발전은 없다. 교장들이 데모도 하면서 학교현장의 소식을 대통령과 정부에 전할 때 진정한 동반자적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장의 권력은 위를 바라보며 지시에 순응하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래로부터 제기되는 학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위해 온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영웅이 될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교장을 잘 모른다. 자기 학교에 근무하는 교장의 이름을 알고 기억하는 학생이 드물다. 아이들이 이름도 모르고 존경도 하지 않는 교장에게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이 땅의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존경받는 스승이 되었으면 좋겠다.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우선 그 첫걸음을 떼어야 한다. 데모다. 교장 선생님, 그 분들에게 데모를 허하자. 

김대유 경기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