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 습관의 개념 ⑤도덕성의 인지적-실천적 조건은?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 습관의 개념 ⑤도덕성의 인지적-실천적 조건은?
  •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20.11.1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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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에듀인뉴스] 두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 하나를 두고 서로 가지겠다고 싸우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본래 그 장난감 자동차는 창수의 것인데 영수가 한 자리에 있게 되면서 그것을 두고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창수는 자동차가 자기 것이니까 영수가 뺏어가지 않도록 그것을 지키고자 하고, 영수는 그것이 탐나서 가지고 싶어 한 것이다.

뺏고 지키고 하는 싸움이 계속되면 어른들은 아주 초보적인 도덕교육을 시작한다. 아마도 먼저 영수로 하여금 그 자동차가 창수의 것이니까 마구 뺏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창수로 하여금 그 자동차를 영수와 함께 가지고 놀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러한 어른들의 설명과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싸움은 계속된다. 달리 말릴 길이 없으므로 영수의 엄마는 아이를 억지로 데리고 그곳을 떠나고 만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도덕성의 인지적 조건 : 누구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런 경우에 우리는 창수도 영수도 도덕적으로 잘못된 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영수는 남의 소유물을 뺏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창수는 장난감을 친구와 함께 가지고 노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옳고 그름을 알고 바로 그 알고 있는 바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저지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단순한 일종의 사고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대체적으로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 저지른 행동은 이를 참작하여 용서하되 일깨워서 우선 그 규칙을 알게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규칙 자체를 알게 하고 그 뜻을 이해시킬 수 없는 대상일 때는 도덕적 징벌(懲罰)보다는 다른 방도를 취한다.

우리는 이지적으로 성숙한 정도만큼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그렇고, 정신적으로 박약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며, 우리의 관습과 규범을 잘 모르는 낯선 외국인의 경우에도 그렇다.

물론 외국인이 충분히 성장한 성인이고 도덕적 행동이 기대되는 수준의 사람이라면, “로마에서는 로마인이 하는 대로 하라”는 속담이 있듯이, 남의 나라에 있을 때는 그 나라의 관습과 규칙을 익힐 필요가 있고 어떤 의미에서 그럴 의무도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물을 때, 그 사람이 그 행동에 관련된 도덕적 가치, 즉 규범이나 규칙을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인간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가능한 수준만큼, 도덕적 삶의 경지에 입문하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조금도 입문하지 못한 수준에 있다면, 그 사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아직 인격적 존재라고하기가 어렵고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무도덕적 상태에 있는 것이다.

양심의 개념도 거기에 적용할 수가 없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이해, 그리고 선택과 판단의 능력이 성숙된 만큼, 성숙된 도덕적 삶을 사는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내가 보기로, 앞서 논의에서 평가를 유보해 둔 칸트의 양심은 모든 인간이 공히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도덕적 능력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존재의 이지적 성숙성에서 “기대되는 능력의 목표”이고, 내심의 법정은 이지적으로 완성된 수준의 도덕적 장치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있다.

그러한 보편적 능력의 완성된 장치를 타고났다고 보면, 듀이가 말하는 “관조적 인식론자의 오류”에 해당하는 결과가 되고, 일종의 초경험적 신비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된다.

오히려 정신분석심리학자인 프로이드(S. Freud)에 의하면, 인간은 어릴 때 부모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과 벌, 모방, 선망 등에 의해서 일종의 습관의 형성과 같은 것으로 양심이 형성된다.

자연주의적 설명이기도 하다. 본능적 욕구체제인 이드(Id)가 작동하면 이성적 능력인 자아(Ego)는 스스로 제어하는 역할을 하지만 실패한 경우에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유혹에 저항하는 양심적 검열의 장치인 초자아(Superego)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선인가를 알며 또한 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양심이 있으면, 인간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선을 아는 지적 권위이며, 선을 행하는 데 실패하지 않게 하는 의지와도 같은 것이고, 비도덕적 희생에 대해서 의협심과 동정을 가지게 하며, 비행에 대하여 분개를 느끼게 하고, 충동이나 욕망 따위를 제어하는 능력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구체적 실체로서 자리 잡고 있으면서 어떤 실체적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라기보다는, 선천적-잠재적 요소가 환경적-사회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성향, 즉 일종의 도덕적 습관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양심의 개념도 습관의 개념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지적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이 세련되었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완성된 수준에 있다고 평가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도덕적 자질은 가치의 인식수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에서 요청하는 바가 실천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직”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모르는 어린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 규범(가치)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다만 “보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규범(규칙)을 알고 있어야 할 정도로 인지적 능력이 성숙한 수준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특정한 규범에 대한 당연한 이해의 수준에 있지 않으면, 도덕적 관점에서 우리는 그를 “우려의 대상”으로 두게 된다.

규범에 대한 인지적 조건이 충족되었고, 즉 규범에 대하여 이해가 가능한 수준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는 행동과 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의 대상”으로 두게 된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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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습관


도덕적 가치를 아는 것을 “이지적(理知的) 도덕성”이라 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을 “실천적(實踐的) 도덕성”이라고 한다면, 이지적 도덕성은 실천적 도덕성의 논리적 필요조건이다.

여기에 일종의 파라독스가 있다. 이지적 도덕성이 세련될수록 실천적 도덕성의 부담이 높아가고, 이지적-실천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

“비도덕적”이라는 평가는 그러한 일관성의 유지에 실패한 경우, 도덕적 가치 혹은 규범(규칙)에 관한 이해가 있으면서 그것을 실천하지 못할 때 적용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지적 도덕성의 수준이 천박할수록 이지적-실천적 일관성의 요구는 덜 절실해진다. 도덕적 행위자의 주관적 부담에서도 그러하고, 객관적 평가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인격의 성장을 겨냥하는 도덕성의 교육은 이지적 도덕성을 세련되게 하고 이와 일관되게 실천적 도덕성을 생활화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이지적 도덕성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수준의 규칙(혹은 규범)을 내면화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하나는 “관습적 수준”의 규칙이고, 다른 하나는 “반성적 수준”의 규칙이다.

관습적 규칙을 중심으로 하는 도덕교육은 정직, 효도, 협동, 애국, 우애 등과 같이 좋은 행실이나 착한 태도라고 관습적으로 평가받는 규범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관습적 규칙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실천하는 구체적 행동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회적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도덕생활의 기본적 규칙으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 어느 사회에서나 성장의 초기에 이러한 기본적 규칙들을 구체적 행동이나 생활에서 실천하도록 가르친다.

관습적 규칙에 따른 습관은 대개 좋은 습관임에 틀림이 없으나, 구체적 상황에서 때때로 복수의 규범들이 충돌하는 경우에 사회적 문제 혹은 개인적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강한 애국심이 때로는 독선적 행동을 낳고 나라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애국하려는 의도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어쩌면 더욱 중요한 것이 국가적 수준의 단결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범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우정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범행을 저질은 것은 나쁘지만 그것으로 친구를 불행에서 구하고 그 범행으로 인한 징벌을 달게 받겠다는 선택이라면 권장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상적 상황에서 많은 도덕적 문제들이 관습적 규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혹은 이기적으로 어느 것을 충실하게만 지키고자 할 때 발생하기도 한다.

반성적 규칙의 준수는 대개 인지적 수준에서 성숙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고, 또한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 보통이다.

경직된 관습에만 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위의 규칙을 선택하고 재검토하면서 판단의 기준을 세우면서 생활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직해야 한다는 관습적 규범을 특정한 상황에서 꼭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스스로 여러 가지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나의 인격을 관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할 때, 내가 설정한 원칙이나 신념이나 지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반성적 규칙이 요청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특정한 상황에서 관습적 규범들이 서로 충돌하지만 거기서 꼭 지켜야 할 적절한 제3의 관습 혹은 규범이 마음에 떠오르지 않을 때, 그리고 자신의 인격과 신념을 일관되게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의 방식과 행동의 기준을 포기하거나 유보할 수 없다고 여길 때, 이런 경우에 자신의 성찰에 의하여 규범을 선택하거나 조정하거나 변통하여 지키고자 하는 결단을 할 수도 있다.

쉽게 생각하기로 이지적 도덕성은 인지적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규범 혹은 규칙)의 실천에서 요구되는 습관의 형성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습관의 개념은 실천적 도덕성의 수준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실천하는 습관에만 도덕적 습관이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는 습관, 내심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엄중하게 생각하는 습관, 충동이나 격분을 참고 스스로 조정하는 습관,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주저 없이 용기를 발휘하는 습관 등은 간접적으로는 실천과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직접적으로는 실천보다 성찰, 반성, 숙고 등의 내면적인 이지적 노력이며 그 수준에서의 습관이다.

도덕적 습관으로는 두 가지, 즉 행동이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유지되는 실천적 도덕성의 습관이 있고, 도덕적 규칙의 이해와 판단에 작용하는 이지적 도덕성의 습관이 있다.

그러면 이지적 도덕성에는 규범체제에 대한 관습적 이해의 수준과 자율적 판단의 수준이 있고, 실천적 도덕성에는 구체적 행동 수준의 실천이 있고 일상적 생활 상황의 실천이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이지적-실천적 인격의 구조


사람에 따라서는 이지적 도덕성과 실천적 도덕성에는 각기 강한 특징과 약한 특징, 즉 건전하거나 세련되었거나 일관성 있는 습관을 유지하는 성숙한 도덕성을 지닌 경우가 있고, 불건전하거나 어리석다거나 일관성이 없는 습관을 지닌 취약한 도덕성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조합해 보면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된다.

이지적으로 취약하고 실천적으로도 취약한(일관성이 없는) 사람=무지하고 무례한 사람이 이 범주에 속한다. 선악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고 일상적으로 무례한 행동과 절제 없는 생활을 하는, 말하자면 도덕적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이 범주에 속하지만, 신체적으로나 연령으로나 성장한 사람들 중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있다.

이지적으로는 취약하지만 실천적으로는 일관된 사람=우직하고 순진한 사람이 이 범주에 속한다. 머리가 나쁘거나 공부를 적게 했기 때문에 세련된 판단과 문제해결은 잘 하지 못하지만, 우직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고 지내는 것에는 충실하며 오히려 “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도 있지만, “벙어리 삼룡이,” “노테르담의 곱추” 등의 작품에서 그 표본을 볼 수도 있다.

(이지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실천적으로 취약한 사람=이중인격자가 여기에 속한다. 적어도 관습적 수준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는다는 것을 비교적 잘 알고 있고, 때때로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지혜를 보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도덕적 상황의 선택과 처신에 관해서 도움을 주기도 하는 유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실천적 행동과 생활에서 보면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다. 흔히 우리가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대상은 이 범주에 속한다. 대개 많이 배워서 “지식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많고, 지식인은 누구나 다소간 이중인격자일지도 모른다.

이지적으로도 출중하고 실천적으로도 일관된 사람=이 범주에 속하면서 출중하게 뛰어난 사람은 “성인” 혹은 “군자”라고 칭송을 받는다. 잘 통합된 신념체제를 소유하고 있으며, 매사의 판단과 실천이 일관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만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판단과 선택을 신뢰하고 생활에서 사표로서 본받고자 한다. 우리는 모두가 이 경지에 오르기가 어렵고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 대하여 존경과 칭송의 태도를 보인다.

도덕성의 발달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를 주도한 피아제(J. Piaget), 콜버그(L. Kohlberg) 등도 도덕성의 성장은 일차적으로 인지적 성숙성만큼 기대된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먼저 규칙의 학습으로 시작되고 인지적 세련성, 즉 규칙의 이해, 적용, 판단의 능력이 신장되면 그만큼 도덕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적 성장은 관습적으로 요구되는 규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타율성”에서 시작하여 반성적 사고의 도움으로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스스로 규칙을 제정하면서 생활하는 “자율성”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였다.

피아제는 그러한 전환은 구체적 조작의 시기에서 형식적 조직이 가능한 시기(11-12세)에 진행되는 과정으로 설명하지만, 콜버그는 진행되는 단계를 제시하지만 특정한 연령대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로는, 성장기의 누구든지 도덕적 타율성에서 자율성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전환을 주도하는 능력은 주로 판단의 능력에 의한 것이므로 어느 성장 시기의 연령대를 기준으로 그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전환도 일시에 총체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점진적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체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는 해결하기에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자의 판단능력이 성숙해 가는 정도에 따라서 타율성에서 자율성으로 전환을 할 것이며, 그 과정은 경험의 성장(재구성)처럼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

어떻든,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 관습적 규칙에 맹목적으로 매여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의지가 작용하지 못하는 도덕적 타율성에 묶여있는 셈이다.

반성적 규칙은 도덕적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수준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자율적인 사람이 관습적 규칙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관습적 규칙을 이해하고 준수하는 일종의 사회적 의무감을 완전히 버리고 자의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자율적 도덕성의 소유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자율적 선택과 대안은 관습적 규칙을 요청하는 사회의 도덕적 의미와 기준에 비추어 정당화된다.

자율성을 중시하더라고 일상생활에서 예컨대 어떤 도덕적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고 해서 거짓말을 아무런 고민 없이 한다거나, 그것을 계기로 해서 정직하기를 포기하는 습관을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자율성이 아무리 세련된 수준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관습적으로 공허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지적 측면이 자율적 수준으로 성숙되었다고 하는 것은 관습적 규칙 자체에 대한 기본적 학습, 그 규칙이 성립하는 이유나 그것에 따른 행동의 결과를 분석적으로,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능력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즉 관습적 규칙의 충분한 이해와 내면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기대되는 것이다.

예컨대 “애국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어떤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숙고해 보는 경지로 성숙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관습에 매였던 타율적 도덕성에 머물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력과 독자성을 발휘하며, 새로운 상황, 지식, 혹은 통찰에 비추어 학습한 도덕적 원리를 수정하거나 선택을 행사하는 수준의 세련된 판단의 능력 등도 이 범주에 포괄된다.

아마도 자율적 도덕성의 가장 중요한 경지는 자율적 통합의 수준이다. 잘 통합된 인격체에는 습관들이 서로 일관된 관계를 유지한다.

가까운 이웃에 대해서는 서로 친절히 도우며 의좋게 지내면서 모르는 타인에게는 함부로 폭언하고 거짓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잘 통합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이중인격자, 기회주의적 삶을 사는 사람, 투철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으나 화합을 못하는 사람, 좋은 목적을 추구하고 있으나 실천의 규칙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사람 등은 통합된 인격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물론 잘 통합된 인격을 지닌 완벽한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것을 지향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좋은 습관의 기준이 된다.

상당한 정도로 자율적 수준의 규칙을 소유한 경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습관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애국심은 그 자체로서 추상적 개념이지만, 실제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고 나라의 발전에 협조하는 것은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된다.

실천적 도덕성은 규칙들을 실제의 행동으로 일관되게 이행하는 습관을 의미한다. 외형적으로 관찰되는 도덕적 행동과 생활은 실천적 측면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심리적 활동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애국하는 삶은 사람에 따라서 열정적이거나 미온적인 것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애국을 실천하는 삶에 요구되는 동기나 감정이 굳혀져서 일종의 습관적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은 애국자의 모습을 지닌 상태에서 실제로 행동이나 생활을 이끌어 가는 셈이다.

실천적 도덕성은 인지적 도덕성에 의해서 방향이 잡혀진 습관을 의미한다.

만약에 기본적 규칙의 이해 방식에 동요가 발생하거나, 규칙들이 충돌하는 갈등의 상황에 직면하거나, 규범의 실천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가 존재하거나, 새로운 낯선 경험의 장에 임하거나 하는 등, 인지적 영역에 혼란이 발생하면 실천적 도덕성은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일관성을 잃게 된다.

이러한 문제 상황은 인지적 능력의 발달 수준에 따라서 그 복잡성의 정도도 달라진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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