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중국, 가까운 듯하면서 이질감이 드는 곳이다. G2로 미국과 견주고 있는 중국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을 비웃는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 지리상으로 가까워 문화적으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중국. <에듀인뉴스>는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를 통해 중국의 도시에 살아가면서 느낀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현지에서 중국을 접하고 알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인해 중국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과거에 대한 이해와 미래를 예측해보는 작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알다가도 모를 중국!

병마용 인근 진시황릉 모형을 재현한 지하궁전.(사진=김현진 교사)
병마용 인근 진시황릉 모형을 재현한 지하궁전.(사진=김현진 교사)

진시황릉과 병마용

점심식사를 하기 전 한군데를 더 방문한다고 한다. 진시황릉을 모형으로 나타낸 지하궁전이다.

추석임에도 우리가 갔던 때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좋았다. 조선족인 가이드는 시안과 진시황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전해준다. 인터넷을 통해 사전에 알았던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이야기들도 있어 좋다. 지하궁전에서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가기 전 대략의 이야기를 듣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진시황(秦始皇)’은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통일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된 나라의 황제로서 150만 명이라는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사후에 묻힐 무덤을 생각하고 39년간 340여 만 명의 인부들이 동원된 무덤 조성공사를 통해 지상의 황궁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였다.

진시황릉은 50㎢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부지에 조성되었다. 무덤 속에는 수많은 보물을 묻었으며 무덤공사에 동원된 모든 사람도 무덤에 대한 보안을 이유로 그대로 생매장했다.

진시황릉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상상 이외의 방법들을 동원했던 것이 신기하다. 그리고 아직까지 훼손 등의 이유로 발굴을 하지 않고 있는 중국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아침부터 비도 오고 서둘렀더니 배가 고프다. 착각을 했나? 일일 투어요금에 점심식사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병마용 및 화청지 일대에도 한식당이 꽤 있는 듯하다. 버스를 타고 인근의 한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한국 전통의 된장찌개 맛이 난다.

중국에도 냉면, 김치찌개 등 한국음식을 파는 음식점들이 많긴 하지만 한국 전통의 음식 맛이 나는 곳이 많지는 않다. 개인여행으로 이곳에 왔다면 식당을 또 찾느라 고생 했을텐데 이런 점은 또 좋다.

한 그릇을 정신없이 비웠더니 식당 점원이 금방 밥그릇에 밥을 채워준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오다보니 카운터에 한국의 믹스커피가 있다. 종이컵과 함께 꺼내 마시려 했더니 10위안이라고 써있다. 공짜가 없네.

밥도 맛있게 먹고 어릴 때부터 보고 싶었던 병마용을 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가족들과 함께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다.

‘진시황’ 사후 약 2,100년이 지나서야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지하에 묻힌 방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뒷날 고고학자들에 의해 6,000구가 넘는 실물크기의 병사와 말 인형들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이것을 ‘병마용갱’이라 한다.

병마용 입장티켓.(사진=김현진 교사)
병마용 입장티켓.(사진=김현진 교사)

붐비지 않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꽤 많다. 가이드가 사온 티켓을 가지고 약 5분정도 숲길을 걸어가니 병마용 1호갱 입구가 나온다. 표는 진시황릉 표와 같이 붙어 있어 잘 보관해야 한다.

병마용 1호갱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병마용 1호갱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1974년 발굴된 14,260㎡ 면적의 ‘병마용갱’ 1호갱에서는 6,000구의 병사와 전차 40대가 발굴되었다. 가장 먼저 발굴되기도 했고 규모도 가장 크다. 그 장관을 볼 수 있다니 입장부터 떨린다.

병마용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고 하고, 그 많은 병사의 얼굴 표정과 모양이 다른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병사의 얼굴 및 몸에 색칠이 되어 있었지만 발굴되면서 햇빛을 비추니 색이 바래 지금은 색칠한 부분 일부만 보인다.

손에 들었던 무기들은 진나라가 멸망하고 유방과 항우 시절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다 빼갔다고도 한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진시황제의 병마용의 키는 지금 성인 평균 키에 비해 180㎝ 중반을 넘는 등 큰 편이다. 그리고 장군이 병사들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우리 가족들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모습들을 사진을 보듯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빨리 자리를 떠나게 되는 것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병마용 1호갱 보수하는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병마용 1호갱 보수하는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1호 갱의 가장자리에서는 발굴된 병사들을 고증을 통해 재조립하고 있다. 진시황의 보병부대인 1호갱이 제일 크고, 장교 위주로 구성된 3호갱이 가장 작고, 말과 마차 등이 중심인 2호갱이 중간 크기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서 8천점의 병사와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아직도 상당수가 흙벽 속에 묻혀 있어 중국정부에서는 추가로 발굴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2호갱 관람을 마치고 들어간 1976년에 발굴된 3호갱은 발굴된 병마용갱 중 가장 작은 500㎡ 규모로, 아직 발굴된 토우들이 조립되지 않은 채 땅에 쓰러져 섞여 있으며, 조립 전 각 부위별로 번호표를 붙여놓았다.

2호갱과 3호갱은 아직도 발굴을 안 한 채로 남겨진 부분들이 꽤 많다. 1호갱에 비해 2, 3호갱은 많이 어둡다. 그 이유는 햇빛을 받아 채색이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3호갱 옆에는 발굴 당시 여러 형태의 토우들을 전시해 놓아 아직도 그 당시 채색이 그대로 남아있다.

온전히 전시된 토우.(사진=김현진 교사)
온전히 전시된 토우.(사진=김현진 교사)

이렇게 금방 자리를 뜨는 게 아쉽다. 하지만 급하게 사진을 마저 찍고 마지막 장소인 진시황릉으로 이동했다.

진시황릉은 병마용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입구에서 병마용갱 들어갈 때 샀던 나머지 티켓을 보여준 후 입장을 하였다.

근데 입구에 들어서면 진시황릉 표지석만 있고, 무덤은 저 멀리 뒷 편의 산만 보일 뿐이다. 좀 황당하기도 하지만 가이드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진시황릉 일정은 끝이 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진시황릉은 산처럼 보일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무덤인데 아직 발굴하지 않고 있고 피라미드 형태의 산처럼 보이도록 조성되었다. 높이가 더 높았지만 지금은 오랜 시간이 흘러 많이 낮아졌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릉 내부에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바닥에 수은을 흐르게 하여 무덤을 파게 하는 사람은 수은중독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13세의 어린나이에 진나라 31대왕에 오른 진시황은 39세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만리장성, 아방궁 등 불로장생을 꿈꾸어 왔으나 통일을 시킨 지 불과 10여 년 만에 통일국가 진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대안탑 마지막 장소 진시황릉을 그렇게 쉽게 마무리하고 나니 오후 4시쯤 시안 시내로 돌아왔다. 피곤한 마음에 숙소로 들어가 좀 쉬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번에는 짧은 일정이었기에 좀 더 부지런히 서둘러서 다음 장소로 갔다.

시안 성벽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시안 성벽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시안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왔더니 성곽으로 올라가는 곳들이 나온다. 내일 마지막 날 오전에 잠깐 섬서 역사 박물관과 함께 들를 생각이었기에 일단 오늘은 ‘대안탑(大雁塔)’이 있는 대안탑역으로 가기로 하고 지하철을 탔다.

9월 중순의 시안은 비도 제법 많이 오고 추워지기 시작한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니 대안탑 남광장이다. 중국에서 가장 많이 가본 패스트 푸드점인 KFC가있다. 중국 음식이 어려운 우리들에게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이다.

우리가 가본 관광지의 모든 KFC는 들어갈 때마다 많은 사람들로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아들이 좋아하는 조각 케이크과 치킨버거 세트로 가볍게 이른 저녁을 먹었다.

어둑어둑 해지고 조금은 쌀쌀한 날씨에 바이두 지도를 켜고 대안탑을 찾아보았다. 대안탑 북광장에서는 교향악단이 함께 하는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인다.

시안 성벽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삼장법사 동상과 대안탑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그러고 보니 저 위쪽으로 탑이 보인다. 서유기에 의하면 수양 기간에는 ‘현장법사’였는데,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부터 ‘삼장’이란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한 가지에 정통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삼장에 모두 정통한 법사란 극진한 존경의 뜻이 포함된 호칭이다.

중국에서는 인도와 서역에서 불경을 들여와 한자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역경삼장이나 삼장법사라고 불렀다. 가장 알려진 사람이 중국 최대의 번역승려인 현장이다.

특히 현장이 인도-천축(天竺)에서 불경을 들여온 일을 소설화한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와 명나라 때의 장편백화소설인 《서유기(西遊記)》가 세상에 소개된 뒤부터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을 제자로 삼아 천축으로 모험과 고난의 여행을 하는 구법승려인 현장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대안탑이 정면에서 봤을 때는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실제로 지하수를 뽑아 쓰다 보니 지반이 주저앉아서 기울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지하수를 다시 채우고 바로 잡는 노력을 하고 있다.

대당 불야성 거리 시안미술관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대당 불야성 거리 시안미술관 모습.(사진=김현진 교사)

가까이 가서 본 대안탑은 생각보다 높다. 대안탑(大雁塔)의 원래명칭은 자은사탑(慈恩寺塔)이다.

652년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 건립된 4각형의 누각식 탑이며, 명(明)나라 때 외벽에 한 겹의 벽돌을 더 둘러쌓았다. 모두 7층이며, 전체 높이는 64m이다.

천축(天竺)을 다녀온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하여 석탑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자재와 비용을 구하기 어려워 표면만 벽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세웠다.

이 탑은 견고하지 못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고, 701년에서 704년 사이에 측천무후의 명으로 허물고 다시 건립되었다.

자은사(대안탑)를 중심으로 북쪽광장과 남쪽광장으로 나뉜다. 대안탑 남쪽광장으로 오면 자은사의 입구와 함께 현장법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대자은사(慈恩寺)는 648년 당나라 고종이 죽은 자신의 어머니(문덕황후)를 위하여 세운 절이다.

건립 당시에는 23만㎡의 부지에 1,897칸으로 지어진 큰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당나라 말기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은 청대에 지어졌다.

대자은사 경내 대웅보전 뒤에 대안탑(大雁塔)이 있다. 대안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야 하나 어둑해지고 쌀쌀한 날씨에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대안탑 인근에는 정말로 많은 상점과 백화점 등이 있었다. 오래된 문화재와 현대의 백화점 등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하다.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