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배낭에 담을 ‘세계 시민성’이 없다①
코로나 시대이자 기후 위기 시대 ‘세계 시민성’은 인류의 생존 물품

[에듀인뉴스] 나는 1980년, 그 해를 살았다. 그게 역사가 된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나는 2020년을 살고 있다. 올해가 새로운 역사가 되리라는 예감이 강렬하다. 시대와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진=심상정 대표 페이스북)
(사진=심상정 의원 페이스북)

[에듀인뉴스] 벌컥,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젊은 기자들’이라는 학생 기자단을 이끄는 차분한 녀석인데,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서, 그 까닭을 물었다. 안타깝게도 짐작했던 대로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그때만 해도 선거 연령을 18세로 조정하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였다.

“18세면 결혼도 할 수 있고, 운전면허도 딸 수 있고, 군대도 갈 수 있는데, 투표만은 안 된다고요? 이러시면 안 되죠”하며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아이들은, 그래도 교육감은 자기네 편일 거라고 여겼나 보다. 교육감과 인터뷰한 걸 신문에 실으면, 선거 연령을 조정하자는 운동에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해 9월 1일, 비서실을 통해 교육감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교육감님이 안 계신다”며 나중에 전화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9월 5일 다시 전화하여, 교육감이 바쁘시다면 ‘서면 인터뷰’라도 가능한지 묻고,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9월 7일에 질문지를 보냈지만, 한 달이 넘었는데도 답변이 없었다. 물론 중간에 몇 차례 문자 연락을 더 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하는 수 없이 와이엠시에이에서 일하는 다른 분과 인터뷰를 진행하고서, ‘18세 선거권, 그게 그렇게 겁납니까?’라는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글’에 이와 관련한 기사 후기를 몇 마디 남겼다. 그게 화근이었다.

기사가 나가고 나서, 도교육청 장학사란 분에게서 득달같이 아이한테 전화가 왔나 보다. 아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아이에게 따져 묻는 그분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대체 넌 학교에서 뭘 배웠니? 소통이란 게 뭔지 아니?”

그분은 길고 집요하게 아이를 다그쳤다.

그러는 와중에 수업 중인 아이는, 다시 교감에게 끌리어 교장실로 갔다. 그다음 이야기는 줄이는 게 낫겠다. 아니다 싶은 일들이 벌어져서, 지금 생각해도 낯뜨겁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이는 무너졌다. 그러다, 견디다, 견디다 못해, 지도교사인 내게 달려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신문사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허위사실 보도라며 기사를 내려달라는 도교육청의 요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학생 기자단을 지도하면서 몇 차례 겪었던 일이 또 터졌다. 언젠가 인터뷰 기사를 내보내고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한 인터뷰이의 항변에 된통 당하고 나서는, 나는 학생들에게 모든 활동을 녹음하고 녹취하도록 했다.

증거자료는 넘쳤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녹음되고 녹취되어 있었다. 전후 사정을 보고 듣고 알게 된 신문사는 이 사안을 매우 중대하게 보았다.

‘사건’이라는 표현을 쓰며, 전모를 밝히는 기사를 새로이 쓰자고 제안했다.

나는 섣불리 대답을 못 한 채, 아이들을 불렀다. 하지만 아이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특히 모 대학의 지역균형선발전형을 준비해 온 그 아이로서는 공포였다. 교장 허락이 없으면 응시 자체가 불가능한 전형이었다.

모든 게 멈추었다. 만남도 멈추고, 활동도 멈추고, 교육도 멈추고, 민주주의도 멈추었다. ‘학생은 교복 입은 시민’이라는 말은 그냥 해 본 소리였나 보다.

교문을 들어섰는데도 시민적 권리를 주장하다가는 무슨 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아이들은 동물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 뒤로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멀리서 내가 보이면 “선생님” 하고 반갑게 다가와 인사하던 아이는, 나를 피하고, 발길을 뚝 끊었다.

교육감이 그 정도이지는 않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괴로웠다. 문득, ‘손타쿠(忖度)’라는 말이 떠올랐다.

알아서 기는 문화. 높은 사람이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아랫사람들이 다들 알아서 일을 처리하는 일본 문화를 가리키는 얍삽한 말이다. 더 거친 말로 바꾸자면, 오야붕 민주주의. 위에서 원하는 것을 잽싸게 파악하여,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덧입혀 주는 것.

‘손타쿠의 덫’, ‘오야붕 민주주의의 올무’가 그해 가을 아이들의 시민성을 잡아챈 뒤 그렇게 포박하고 있었다.

…… 누가 그랬다. 지구인들은 지금 쌍코피가 터진 상황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랬다. 코로나 팬데믹이 내려친 펀치에 얼굴이 크게 상했는데, 지난여름 기후 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주먹이 날아들면서 사람들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이렇게 지구인들은 너무 비싼 수업료를 치르면서, 코로나 팬데믹도 기후 위기도 둘 다 환경재앙에 그 뿌리가 내려져 있다는 사실, 인간의 야만에 대한 자연의 복수가 이제 천천히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냈다.

기후 위기 또한 더 이상 단일국가의 개별적인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국지적인 문제가 아님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나 자신이 좋든 싫든 우리는 모두 한 국가에 속한 개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계를 포괄하는 더 큰 세계에 단단히 얽혀 그 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코로나19는 가까운 미래에 반복해 창궐할 수 있는 팬데믹 규모의 집단 감염병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의학계의 경고도 경고려니와, 기온이 0.5도 더 오르면 1억 명에 달하는 기후 난민이 발생할 수 있는데 거의 모든 자원을 외국에서 들여다 쓰고 있는 우리나라가 첫 번째 위기 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기후학자의 경고는 서늘하기까지 하다.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세계의 시민’이라는 세계 시민성을 되살려야 할 때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그래서 나온다. 지금이야말로 세계시민 교육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절박한 목소리가, 그래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세계 시민성’이라는 말을 하려니, 나조차 자괴감이 든다. 지금이 ‘세계시민 교육’을 시작할 때라는 말을 하려니, 나부터 헛웃음이 나온다.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멍들어 있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뻔히 보면서, 아니, 경쟁, 불신, 격차, 세습, 차별, 위험 등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시민성 결핍을 뻔히 목도하면서, 도대체 세계 시민성이라는 말이 나오느냐는 항변에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아이들에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가 하며 거칠게 반응하는 이의 질책도, 도무지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 시민성과 분리된 세계 시민성은 허구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상황인데, 듣도 보도 못한 알파벳으로 웬 법석을 피우려는 것이냐는 비아냥이 그냥 비아냥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형국. 온갖 욕을 먹는다 해도, 이 문제에 대해 지금 논의하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 같아서 어렵사리 말문을 연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 차례, 온갖 욕을 먹을 각오를 하면서, 되지도 않은 넋두리를 해나갈 생각이다. 누군가 하지 않으면, 무당이 죽은 사람의 넋을 대신해서 하는 그 넋두리를 들어야 할 날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이자 기후 위기 시대에, ‘세계 시민성’은 인류의 생존 물품이다. 우리보다 훨씬 더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생존 가방에 반드시 넣어 주어야 할 생존 물품이 바로 ‘세계 시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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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