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신축년 새해 여러분들이 바라는 올해 교육 소망은 무엇인가요. 각자의 위치에서, 전문 분야에 따라 원하는 것도 다르겠지요? <에듀인뉴스>는 새해 우리 교육에 대한 여러분의 소망을 함께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2021년 새해에는' 코너를 1월 한 달간 진행할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올 한해! 다 함께, 만들어 갑시다."

박성식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정책국장<br>
박성식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정책국장

막연한 희망, 점잖 빼는 새해 덕담은 그만두자. 새해라고 좋은 말로 현실을 표백하지만 결국은 또 뚜렷한 얼룩에 직면할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은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세상, 어른들과는 다른 멋진 인생이 되리라는 실증이 되지 못했다. 과도한 경쟁과 학습 부담으로 아이들은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워리어가 되어 간다. 

하다하다 이제는 출생부터가 경쟁이 됐다. 경쟁에서 이긴 쪽에서 더 많은 아이들을 낳고, 그나마 용감하도록 관습적인 부모들에게서 겨우 아이들이 출생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예외 없이 또 경주마가 되고 천부인권을 배우기보단 태생부터가 너와 나는 다르다는 구별 짓기와 서열부터 습득한다.   

푸코는 서열주의란 “다양한 인간을 국가가 요구하는 오직 하나의 기준에 따라 순서 매기고 배치하는 방식”이라고 우려했다. 입시가 그러하고 어른들이 만든 학교라는 세계 자체가 그러하다. 경쟁을 통해서만 학교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집단적 갈등과 서열 짓기가 협력과 평등을 압도해왔다. 그러니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라는 것이 차라리 적절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새해다. 찬란한 해가 떠올랐다는데 비판만 늘어놓자니 면구스럽다. 현실이 어떠하든, 그럼에도 학교는 낭만적이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휴머니즘은 현실감각 없는 낭만이라고 타박 받듯, 학교는 세태를 거스르는 인문주의와 공동체 휴머니티의 보루여야 한다. 학교이기에 가능하다. 교육이라는 공적 가치가 다툼을 만류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말자고 모두에게 권유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선한 가치와 비루한 현실 사이를 오가며 흔들린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재난 속에서도 학교 곳곳에선 지위와 격차를 넘어 협력해온 빛나는 구성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각되고 주목받은 현실은 연대가 아닌 반목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소망하건데 더 나빠지지는 말자. 그러면 앞으로는 좋아지고 치유되는 일만 남는 것이다. 

학교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상호 존재의 가치와 역할을 존중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의 새해 바람이 있다면, 학교 구성원으로서 그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 첫째다. 엄연히 존재하는 학교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자부심을 키우고 책임감을 높여나갈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길 바란다. 

교육기본법 9조는 “학교의 설립·경영 등 학교교육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고 했다. 그에 따라 초중등교육법이 마련됐다. 그렇듯 학교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하기로 했고, 그렇다면 엄연한 학교 구성원이자 경영의 대상인 교육공무직을 초중등교육법 안에 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초중등교육법은 교사와 공무원의 존재와 역할만 규정해야 하고, 교육공무직은 하위 규범인 조례면 충분하다는 발상은 분명히 차별적이다. 

우리 스스로를 포함해 상처주기와 왜곡이 더 나빠지지 않길 바란다. 법 한 두 줄로 공무원이 될 수도 없을뿐더러 공무원 신분을 원하지도 안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학교 운영을 뒷받침하는 교육공무직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교육당국이 보다 책임을 갖고 교육공무직을 대해주길 바란다.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위한 교육재정을 깎아 먹는 존재라는 힐난 따위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교사들에게 사명감만 요구거나, 소시민의 인격으론 교육할 자격이 없다고 쉽게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학교의 기능과 역할은 확장됐고 구성원도 다양해졌다. 더 나아가 학교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17개 시도교육감과 교육부장관의 신년사를 모두 읽어보았다. 여러 교육감이 융합과 창의성, 혁신을 말한다. 공동체성을 기반으로 교육격차를 해소하고 변화로 나아가자고 한다. 미래교육, 인성교육을 강조하고 민주시민교육을 다짐한다. 

과연 학교는 그러한가? 여러 기능과 다양한 구성원의 역할이 융합되며 변화로 나아가고 있는가? 학교 구성원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성의 양상은 무엇이고, 노동권과 정치기본권을 향유하는 민주시민으로서 서로 관계 맺고 있는가? 비정규직 차별을 외면한 채 외치는 교육격차 해소는 아이들의 미래를 바꿔줄 수 있는가? 미래교육을 하겠다는 학교는 미래지향적 관계의 모범을 보여주는가? 

독일 교육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 학교 구성원들의 자아야 말로 취약하다. 교사들은 왜 자신들의 지위와 교권이 위협받는다는 불만이 가득한가.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비정규직을 성숙한 학교 구성원으로 성장시키기보다는 왜 열패감 속으로 밀어 넣는가. 이 또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구성원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상호 존중의 관계로 이끌어가는 시스템과 리더십이 아쉽다. 미래교육, 전인교육이 실현되려면 학교라는 시스템이 다양한 역할을 수용하고, 잘 맞물려 운영돼야 한다.

그런데 만연한 갈등을 해결하자고 나서는 교육지도자가 없다. 다양한 구성원들 각자를 높이 평가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여 학교를 민주적 공간으로 변화시키려는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학교자치라는 기초 위에서 각 구성원들의 역할과 자질이 어우러지고 성숙된다면 교육은 당연히 미래로 뻗어나갈 것이다.  

급식도 교육이라며 무상급식을 시작했다. 교육의 가치와 확장을 멈추지 않길 바란다. 최교진 교육감은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곳, 보살피는 곳, 만나고 나누는 곳, 학교의 벽을 넘어 마을과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모든 곳에 교육공무직이 있다. 급식실, (돌봄)교실, 행정실, 교무실, 과학실, 보건실, 상담실, 도서관, 운동장과 강당, 학교의 정문 등 곳곳에 교육공무직이 있고, 취약 가정을 찾아가는 길 위에도 교육공무직이 있으며, 교문이 닫힌 밤에도 교육공무직은 학교에 머문다.  

그러나 교육감들에게 교육공무직의 문제는 한 번도 교육의 문제인 적이 없다. 여기서 배제와 소외가 시작된다. 교육감들에게 교육공무직은 단순노동에 대한 노무관리, 행정, 비용의 문제일 뿐이다. 관료들에게 협상과 교섭을 맡기고 뒷짐을 진 진보교육감들도 유독 교육공무직과의 관계에선 그렇게 자본가로 돼버린다.

이석문 교육감은 ‘한 개의 질문에 백 개의 생각을 존중하는 교육’을 실현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좋은 돌봄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교원단체와 교육청들은 지자체 이관만이 답이라는 하나의 생각만 허용한다.

열린 결론을 향해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각을 모아보자는 취지로 교육부는 ‘초등돌봄 운영개선 협의회’를 시작했다. 그것도 파업을 통해 만든 토론의 장이다. 그런데 4차 협의부터는 교원단체 일부가 불참하고 있다. 학교돌봄의 지자체 이관을 전제하지 않으면 협의도 할 수 없다는 이유가 씁쓸하다.  

2021년 새해에는 학교 구성원 서로가 가치와 역할을 존중하고, 갈등이 더 깊어지지 않길 바란다. 그런데 교육부 차관보는 거친 혐오가 난무하는 댓글을 통해 여론을 파악하고 정책을 고민한다는 사실을 듣고 놀랐다. 어쩔 수 없이 날카로운 말이 오가는 것이 현실이고, 그 날선 말들에 대한 책임에서 교육공무직도 자유로운 순 없다. 갈등이 커서 어쩔 수 없다고? 정부나 교육관료들에게 책임을 모면하는 핑계거리는 만들어주진 말자. 이대로는 공멸이라는 자각을 함께 할 수 있길 바란다. 

저출생에 따른 학생수 감소로 교육재정 감축과 구조조정 압박이 강화될 것이다. 줄어든 학생들에게 보다 질 좋은 교육, 확대된 교육복지를 제공하는 대전환의 기회로 삼지는 못할망정, 기재부의 경제논리에 따라 교육재정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좌시해선 안 된다. 함께 막아야 한다. 교육주체, 학교 구성원 모두가 연대해야 한다. 그러려면 관계의 개선이 절실하다. 

스스로에게 묻자. 더 나빠질 것인가? 연대할 것인가? 무엇이 과연 아이들과 한국 교육을 위한 길인가? 거창하다면 다시 묻자. 무엇이 나와 우리를 위한 길인가? 그래도 답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