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대단한 무엇'이 건네준 위로

[에듀인뉴스] 그림책에 녹아 든 인간의 삶을 어떤 모습일까. 교사 등 교육자의 교육활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 그림책은 어떤 통찰을 전해줄까. <에듀인뉴스>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들의 모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와 함께 그림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김지민 서울 미래초등학교 교사/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운영진
김지민 서울 미래초등학교 교사/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운영진

매주 목요일 6교시만 다가오면 긴장감에 침이 꼴깍 삼켜졌다.

동아리가 배정된 시간으로 나는 4, 5, 6학년에서 골고루 모인 스무 명의 아이들과 ‘어린이 그림책 창작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바로 전 해, 학급 내에서 ‘그림책 창작’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아이들과 마음과 마음이 온전히 닿는 짜릿한 경험을 했기에, 새롭게 만들어 갈 그림책에 대한 설렘을 가지고 시작한 수업이었다.

하지만 나의 부푼 기대와 달리 억지로 떠밀려 들어온 몇몇 아이들로 인해 교실 안 공기는 첫 시간부터 묵직했다.

특히, 4학년 영찬이는 ‘그냥요’라는 건조한 대답으로 일관하며 거리감을 드러냈다. 몇 번을 만나도 변함없는 그 시큰둥한 눈빛에 교사로서의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멀찍이 등 돌리고 있는 아이 일지라도 한 번에 끌어당길 수 있는, 마법 같은 수업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교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패배감마저 들었다. 수업이 거듭될수록 나의 자신감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책방 방문 행사에 참여하였다.

첫 번째로 방문한 책방 안은 인파로 번잡했다. 사람들이 빼곡히 둘러싼 매대는 포기하고, 일단 벽 선반 위의 그림책들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그때 영롱한 민트색 표지의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한 무엇』(다비드 칼리, 미겔 탕코)이라는 제목이 ‘대단하지 않아 슬펐던 나’를 툭 건드렸다.

그림책 '대단한 무엇' 표지.(다비드 칼리 저, 미겔 탕코 그림, 문학동네, 2019)
그림책 '대단한 무엇' 표지.(다비드 칼리 저, 미겔 탕코 그림, 문학동네, 2019)

눈과 귀도 쉴 수 없는 이 답답한 공간을 견디기 힘들어져,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은 채 계산을 마치고 서둘러 책방을 빠져나왔다.

비교적 한적한 두 번째 책방에 도착한 뒤에야 구매한 그림책을 차근차근 넘겨보기 시작했다.

아빠 개는 아들에게 벽에 걸린 가족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한 명씩 소개하고 있었다. 아빠의 이야기에 따르면 모두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대단한 개들이었다. 인물마다 따로 접힌 책장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실제 모습이 숨겨져 있었다. 스쿠터 삼촌은 양들의 선생님으로서 언제나 즐거웠다고 소개하지만, 실상은 제멋대로인 양들과 어지럽혀진 교실에서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하나같이 소위 말하는 대단한 삶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반전을 이용한 유머러스한 그림책인가?’라고 생각할 즈음, 아들은 아빠에게 자신의 진로에 관해 질문했다. 돌아오는 아빠 개의 대답은 매우 단호했다.

“뭐가 되든, 대단한 개가 될 거야.”

“정말요?”

“백 퍼센트 확실해. 넌 대단한 개가 될 거야. 엄청 대단하고 훌륭한 개가 될거야.”

아빠 개의 다정하면서도 확신에 찬 눈빛과 목소리에 나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접힌 책장을 펼치자 이 책의 가장 큰 반전이 드러났다. 아들은 ‘고양이’였던 것이다.

아빠 개는 아들 고양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다시 외쳤다.

“아 참, 대단한 고양이구나! 엄청 대단하고 훌륭한 고양이가 될 거다!”

어떻게 아빠 개는 자신과 전혀 다른 고양이인 아들에게도 대단한 미래를 확신해 줄 수 있었을까? 책의 뒤표지에 이런 질문이 적혀있었다.

엄청 엄청 대단하고 훌륭하다는 건 어떤 걸까요?

다시 되돌아가 살펴보니 아빠 개가 들려준 가족들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시선이 달랐을 뿐. 아빠 개의 따뜻한 철학은 웅크리고 있던 나에게도 위로를 건네주는 듯 했다.

‘비록 아이가 너에게 달려오게 하진 못하더라도, 너는 그를 향해 작은 걸음을 조금씩 옮기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선생님이야.’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웅크리고 있던 나의 자신감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 후에도 영찬이와 나와의 관계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그의 눈빛은 시큰둥했고 대답은 건조했다.

그래도 영찬이가 ’그냥‘ 보다 ’백상어‘와 ’감자 칩‘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게다가 감자 칩에 얽힌 아빠와의 추억까지도 들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동아리 마지막 시간에는 그 감자 칩을 먹으며 스무 가지의 마음이 담긴 한 권의 협동 창작 그림책을 함께 감상하고, 따로 완성한 개인 창작 그림책들을 각각의 아이들에게 선물하였다.

영찬이도 붓 펜으로 멋지게 그린 백상어 그림책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에서 멈춰선 아이는 멋쩍어하며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남은 감자칩을 우물거리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짧지만 굵었던 16차시의 동아리 수업은 끝났다.

이 겨울이 지나면 저 교실 문을 열고 또 새로운 만남이 찾아올 것이다. 어떤 마음을 품은 아이들과 또 어떤 이야기를 쓰고 그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백 퍼센트 확실하게 말해보고 싶다.

모두 엄청 엄청 대단하고 훌륭한 아이들일 것이고, 우리는 엄청나게 대단하고 훌륭한 일 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을 가지고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서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을 가지고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서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