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고는 적폐가 아니다"

 

'획일적' 중등학교는 교육평등의 장애물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이다. 자유의 소극적 의미는 구속이나 제약에서 해방된 상태를 말하고, 적극적 의미는 행위의 주체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상황을 말한다. 서양의 근대적 교육사에서 보면, 17세기의 로크 이후에서 루소, 헤르바르트, 페스타로찌 등을 포함한 19세기까지의 자연주의적 교육사상가들은 소극적 자유의 개념으로 교육적 성장을 이해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본래 인간이 타고난 능력, 즉 개체마다 지닌 잠재적 능력을 계발하는 데 장애가 되는 물리적-사회적 요소를 제거하면 인간은 자유롭게 성장한다. 그들이 이해한 잠재력은 아직 계발되지 않은 능력을 의미하고, 잠재된 능력은 성장을 위한 환경이 주어질 때 점차적으로 발현된다. 잠재력의 완전한 발현은 성장이 완성된 상태를 의미한다. 구속이나 제약에서 자유로운 상태만큼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유의 개념이 충족되고 성장이 완성되는 경지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적 상태로서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의 개념을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은 타고난 내재적 요소의 완전한 실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생활하는 문화, 사용하는 언어, 주어진 생활여건 등의 환경적 요소의 특징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성장해 가는 개방적인 삶을 영위하는 피조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자유로운 성장은 바로 민주적 사회를 설명하는 중심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존 듀이에 의하면, 성장의 바른 의미는, 미리 결정된 목표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기계발의 과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계속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성장 그 자체는 자신의 삶을 한층 선양하고 실천적 역량을 높이는 노력의 과정이다. 이러한 의미의 실질적 성장은, 자신을 제약하는 상태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의 충족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 혹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를 향유할 때 기대되는 것이다. 민주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삶 자체가 자유 혹은 자율을 생활화한 상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유는 제재나 통제가 없이 고립된 상태의 삶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속에서 적극적이고 생산적이고 자율적인 성취의 삶을 향유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모든 인간은 개체적 독특성, 즉 정체적(正體的) 개성을 각기 달리 신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특히 교육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민주적 사회의 가치인 평등의 개념은 각자가 개성의 신장을 통한 전인적 성장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이 "차별없이" 주어진 상태로 설명된다.

그러면 얼핏 보기에 이러한 평등의 개념에는 그 자체로서 모순을 내포한 것으로 읽혀진다. 개체적인 독특성, 즉 개체별 이질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동등성을 내포하는 평등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의 인식은 대개 서로 거의 비슷한 두 가지의 습관으로 인한 것이다. 첫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같음,” “동등,” 혹은 “평등”이라는 말들은 특성상 양적인 의미를 지니는 말로 인식하는 습관이다. 즉 같다거나 다르다, 혹은 동일하다거나 차이가 있다거나는 양적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질적으로 달라도 양적으로 같을 수가 있다. 둘째, 일종의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로 인한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어느 두 사람도 똑 같을 수는 없지만, 모두가 국가의 국민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대개 같다거나 동등하다거나 하는 말은 특정한 범주에 관련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다. 같은 국민 중에는 성별의 차이가 있지만 투표권은 동등하게 주어지고, 같은 남자 국민의 경우에만 원칙적으로 병역의 의무가 부여된다. 이렇듯 질적 차이 혹은 범주의 차이는 평등의 개념을 사용할 때 흔히 혼돈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보자. 가령 한 학급의 30명 학생들이 운동회를 하기 위하여 모두가 “동일한” 규격의 유니폼을 하나씩 받아 입는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도 그 유니폼의 표준 규격에 잘 맞지 않는 체구를 가진 학생들의 수가 다소, 어쩌면 대부분일 수도 있다. 모두가 체격이 같지 않은 이상, 운이 좋은 몇몇에게만 그 유니폼이 꼭 맞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그 유니폼을 입은 모습도 체구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동등한 가치를 분배한 것이 아니다. 유니폼은 같은 규격과 같은 모양의 옷이지만 각자에게 만족을 주는 정도, 즉 유의미한 가치는 동일하지 않다. 같은 가치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각자의 몸에 맞는 것이 주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경우에 오히려 모두는 같은, 혹은 비슷한 모양으로 보이게 될 것이고, 유니폼의 기능도 제대로 살리게 된다.

적어도 사회적 평등의 경우에 그 의미는 분배되는 내용물의 동일성이 아니라 “가치의 동등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같은 규격의 유니폼으로 배분받은 가치는 소수에게만 적절하고, 어떤 몇몇 혹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것이 될 수 있다.  같은 내용으로 분배된 유니폼이 지닌 가치의 개별적 적절성은 각자에게 동일하지가 않다. 어떤 기준에 의하여 똑같은 내용을 제공해야 한다는 “법리적 정의”는 충족된다고 할 수 있지만, 똑같은 가치를 나누어 가지게 한다는 “분배적 정의”를 충족시킨 것은 아니다. 나이가 같다는 동질성을 기준으로 하여 능력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 아이들로써 구성된 한 집단에 오직 같은 내용의 학습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제도적 규칙이 있다면, 그러한 규칙이 유의미한 분배적 정의의 실현을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리의 교육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이다.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경직된 평준화 교육의 정책이다.

가장 이상적으로 말하면, 같은 목적에 따라 제도적으로 제공되는 학습의 장은, 적어도 각자의 몸에 맞는 유니폼을 분배해야 하는 것과 같이, 각자의 성장에 유의미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유의미하다는 것은 각자의 정체적 독특성, 즉 개성과 경험, 필요와 능력, 잠재력과 습관 등에 비추어 요구되는 성장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같은 연령의 학습자라면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도 있으므로 전적인 개별성만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제공되는 교육의 기회 혹은 학습경험의 장은 그러한 요청에 완벽을 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동일한 형태의 여건과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교육적 평등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엄격히 본다면, 특히 교육의 평등은 각자의 개성적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교육의 맥락에서만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의 국가에서 추구하는 평등은 “전체적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유일성을 지닌 모든 구성적 개체들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평등의 개념은 개체들이 지닌 기술, 재능, 능력, 소망, 그리고 이에 따라서 공동체적 삶에서 발휘하는 기여와 공헌 등을 포함하여, 각자의 다양하고 독특한 존재론적 존엄과 공동체적 관계에 있어서 동등한 배려와 관심을 부여받는 제도적 기회의 규칙을 의미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교육의 현장은 엄밀한 논리적 분석에 의해서 요청되는 평등의 개념을 충족하기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의도적으로 개발한 정책이 그 의도에 역행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러한 정책은 시정되어야 하고 강행해서도 아니 된다. 정책에 대한 비판은 민주주의 사회의 보루이고, 잘못된 정책으로 평가되면 수정 혹은 폐기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준화 정책도 필요에 따라서 계속 보완되어야 하고, 교육기회의 다양성을 겨냥하여 구상하고 추진해 온 자립형 사립학교, 자율형 학교, 특성화 학교, 특수목적 학교의 제도와 정책도 시행과정에 불합리한 요소가 발견되면 보완하고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편향된 일방의 정치적 노선과 의도에 따라서 충분한 반성적 검토없이 경직된 평등지향적 이데올로기에 묶여 고식적인 물리적 힘으로 폐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국민교육에 대한 국가의 폭력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제도적 교육기회의 다양화를 위한 바탕의 폭을 축소하거나 경직된 획일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미래를 살아갈 지금의 성장세대를 위한 교육으로서는 그 정책적 타당성을 잃고 있다. 우리는 지금 급격한 변화의 시기, 현재의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기 전에 새로운 변화가 다가오는 “유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급격한 변화는 그 자체로서 순간적으로 종단적 다양성을 보이고, 그것이 파급되는 세계에 횡단적 다양성을 무섭도록 화려하게 전개한다. 지식의 질적-양적 변화도 엄청나거니와, 요구되는 기술과 능력도 상상을 초월한다. 얼마 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가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미래의 삶의 세계는 막연한 추측으로 전망하고 오늘의 세계에만 집착해야 할 정도로 우리의 삶의 상황은 급격히 바뀌어 가고 있다. 교육수요의 다양성을 평준화된 개별학교가 총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안이하고 불합리한 사고이다. 성장세대의 교육을 제도적으로 경직되게 획일화하고, 그러한 정책을 평등교육의 구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적 국민교육의 이념적 요구에도 어긋나거니와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대비한 제도적 학습의 장을 위축시키고, 결과적으로 평등주의에 의한 선택지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