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율과 책임을 주어도 학교는 놀랍게 변하였다◆

개인연구 시간의 설정 : 공부는 강제에 쫓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면서 하는 것 

무학년 교육과정 운영수준에 맞춰 진도를 선택하고, 진로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무감독 시험의 실시 : 자율시험 성공하지 못하면 민사고 존재할 이유 없다

 

◇이돈희 전 민사고 교장의 현장생활 보고서◇

작은 자율과 책임을 주어도 학교는 놀랍게 변하였다

민사고의 사명

개인연구(IR) 시간의 설정

-- 공부는 강제에 쫓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면서 하는 것 --

내가 민사고의 교장으로 처음 부임하면서 먼저 살펴본 것은 학생들이 하루에 공부하는 데 바치는 총 시간수가 도대체 몇 시간이나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30분부터 7시까지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을 하고, 8시까지 아침을 먹고, 8시 30분까지 아침 조회를 하고, 8시 30분에 수업이 시작되면 12시 20분에 오전 일과가 끝난다. 점심을 먹고 나면 1시 30분에 수업이 시작되어 5시 20분에 8교시까지의 오후 일과가 끝난다.

그러면 저녁을 먹고 7시에 제1자습을 시작하여 9시 30분에 끝나면 30분간 간식과 휴식을 하고 10시부터 제2자습이 시작되고 12시에 끝난다. 12반이면 취침에 들어가 이동을 금지하고, 새벽 2시면 완전소등(전원단절)을 한다. 어떤 학생들은 새벽 2시까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그래도 모자라면 복도에서 공부나 작업을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도 해야 할 공부가 있다면 방안에 미리 충전해 둔 손전등을 켜놓고 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손전등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낮 시간에 충전해 둔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가끔은 교과별 교사들 사이에 서로 불만을 내놓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아침에 체육교사들이 체력단련을 좀 심하게 해서 피곤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조는 경우가 많다든가, 수학교사가 퀴즈시험을 너무 자주 봐서 학생들이 그것에 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교과의 수업에 집중력이 떨어진다든가, 어떤 교사는 과제물을 너무 많이 부과하여 그것 때문에 지쳐서 학생들이 다른 과제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다든가 등등이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고자 하는 것, 교사가 온 정성을 쏟아 가르치고자 하는 것, 그래서 학생들이 힘들어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보다 더 좋은 분위기의 학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공부를 이렇게 기계 돌리듯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정신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면서 즐기면서 여유 있게 해야 제대로 하는 법이며, 그래야 창의력이 길러지고 독창성이 생기는 법이다. 노벨 수상자를 위한 동상의 좌대를 많이 만들어 놓았지만, 이렇게 기계처럼 공부해서는 절대로 큰 사람이 만들어질 수가 없다. 아닌게 아니라, 어느 영재교육의 전문가가 학교를 방문하고서는 학생들이 너무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적 소리를 하더라는 말도 있었다.

공자도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울 뿐이다”(<논어>)라고 하였다. 밖으로부터, 즉 교사로부터, 책으로부터, 온갖 매체로부터 받아들이는 정보와 지식은 내가 그것을 나의 반성적 사고로써 음미하고 소화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나의 것일 수가 없다. 내가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을 때는 나의 것으로 결코 소화할 수가 없다. 물론 공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배우지 않고 생각하기만 하면 위태롭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남들이 생각하는 것에 비추어 견주어보고 분석하고 검토하면서 객관화시켜가지 않으면 독선과 편견과 아집에 빠지고 그만큼 위태로울 수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개인연구시간(IR: Individual Research)

나는 민사고 학생들의 수준이면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관리하라고 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2004학년도부터 애국조회를 하는 월요일, 자치회의를 하는 금요일을 제외하고 화, 수, 목, 토요일의 2시간씩(7, 8 교시)을 정규 교과수업시간에서 빼내어 1주일 동안 8시간을 개인연구(IR : Individual Research) 시간으로 설정하자고 하였다. 교사들이 동의하여 그렇게 시행하였다.

처음에 나는 그 시간을 학생들이 어떻게 쓰든지 내버려 두자고 하였다. 잠을 자든가, 놀든가, 교사와 상담을 하든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든가 마음대로 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실제로 학생들 중에는 그 시간에 기숙사 방에 가서 잠을 자는 학생도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냥 두자고 하고 싶었는데, 교사들이 그렇게 하면 혼란스러워진다고 염려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잠자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학생들은 혼자 공부할 수도 있고, 교사와의 면담을 청할 수도 있고, 클럽활동을 할 수도 있고, 올림피아드 경시준비를 할 수도 있다. 교사들은 이 시간에 반드시 연구실에서 찾아오는 학생들과 면담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거나, 아니면 정규교과로서 개설되지 않았지만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경우에 정규교과의 운영기준에 맞으면 책임시간으로 계산하고 생활기록부에 그 교과를 정식으로 등록시키기도 하였다. 거꾸로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내용의 지식을 교과목으로 설정하여 어떤 교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하고 정규 교과목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연구의 시간대를 설정하였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환영하는 편이었으나 학부모들 사이에는 다소 불안해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특히 최상위권 학생과 부모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학교가 더 많이 가르쳐 주기를 기대하는데 이런 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최하위권 학생과 부모는 학생이 방치된 상태에 있다는 데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 같았다. 상위권 학생의 요구는 교사들이 새로운 교과목들을 개설함으로써 다소 충족되었다. 그리고 최하위권 학생들의 경우에 학교가 이 학생들을 위한 보충수업, 개별지도 등으로 대책을 세워왔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학습욕구는 더욱 자연스럽게 채워졌고, 민족반이나 국제반이나 개인연구의 시간을 두지 않았을 때보다 성과는 더 좋아졌음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이 시간대는 7, 8교시이고 오후 3시 30분부터 5시 20분 사이이다. 일반학교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대이다. 그 시간대를 기숙사 학교인 민사고는 개인연구의 시간대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무학년, 무계열 교육과정의 운영

-- 수준에 맞춰 진도를 선택하고, 진로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

무학년 교육과정 운영

민사고는 2006학년도 입학생부터 무학년 교육과정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무학년 교육과정이란 학년의 구분 없이 학생은 학교가 정한 기본적인 규칙에 따라서 교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0학년 학생이 종래의 11학년 교과목을 이수할 수 있고 11학년이 필요에 따라서 10학년의 과목을 이수할 수 있도록 했다. 2007학년도 입학생까지는 계열의 구분이 있으므로 자신이 속한 계열의 기본 규칙에 따라서 이수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무계열 교육과정이란 지금까지 민족반과 국제반으로 나누어 운영되던 교육과정을 2008학년도부터 계열의 구분 없이 학생을 선발하고, 학생은 계열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교육과정을 선택적으로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무계열 교육과정은 국내진학과 해외진학을 포함해서 진로의 선택을 좀 더 성숙한 시기까지 연기해 두자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사실상 중학교를 지금 막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진로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비록 부모의 의사를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무리한 것이라고 본 때문이다. 학생의 잠재성이 충분히 실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그 진로를 학교도 부모도 학생도 정확한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무학년 교육과정의 시행연도인 2006학년도에는 신입생이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의 10학년에 해당하므로 단지 영어를 비롯한 몇 개 교과목을 제외하고는 적용의 범위가 별로 넓지 않았다. 그리고 상급학년은 무학년 교육과정을 소급해서 적용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시행 연도에는 이렇다 할 큰 변화는 없었다. 2007학년도에도 신입생은 10학년이고 통산 11학년인 고2학년만으로는 그 자체로서 무학년 교육과정이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아마도 2008년에야 3개 학년이 전체적으로 무학년 교육과정을 적용하는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2008학년도 신입생이 12학년이 되는 2010년에는 무계열-무학년 교육과정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다. 이때에 학생은 자신이 국내의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아니면 외국의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그리고 국내이든지 국제이든지 간에 어느 대학을 혹은 어떤 전공을 택할 것인가에 따라서 자신의 교육과정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게 되어 있다.

무학년 교육과정은 내가 알기로는 한국영재고등학교에서 이미 시행해 온 것으로 알고 있으나, 과학부문의 영재교육만을 실시하는 그 학교에 비하여 민사고는 운영의 복잡성에서 매우 다르다. 민사고는 인문, 자연, 국내, 국제 등의 진로가 복잡하여 교과목의 개설이 복잡하고,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따라 교육과정의 이수 지침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런 복잡성을 예상하면서도 왜 무학년 교육과정을 운영하고자 했는가?

예를 들면, 영어교과의 경우를 보자. 민사고에 입학한 학생들의 토플 성적을 보면 국제반은 평균 280점대(CBT)이고 민족반은 평균 270점대에 속한다. 이런 학생들이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의 10학년(고1)의 영어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한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여 10학년 영어의 이수인정을 하고, 상위교과목으로 이를 대신하여 수강하도록 하면 수준에 맞는 영어를 공부하게 될 것이다. 학교는 예체능을 제외한 수학, 과학 등의 거의 모든 교과에 이런 방식을 적용하면 학생들은 자신의 수준에 맞춰서 진도를 조절해 갈 수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일반학교에는 능력에 있어서 천차만별인 학생들이 동시에 수업을 받는다. 공식적인 교육과정은 평균학생들을 기준으로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뛰어난 학생들은 보통학생이나 지진학생보다 특정 학년, 특정 교과의 교육과정을 훨씬 빨리 이수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능력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같은 선상을 출발점으로 하여 공부를 시작해야하고 또 같이 끝내야 한다. 예컨대 같은 학년 학생들 가운데 뛰어난 학생들은 진도를 빨리해서 1년이 못되어도 끝낼 수 있지만 보통학생이나 지진학생의 수준에 맞추어 천천히 기다리면서 나아가야 한다.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자기의 진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지진학생은 사실상 제대로 끝까지 공부를 다하지 못한 상태에 있지만, 그 다음 학년은 또 다시 같은 선상에 서서 출발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은 제대로 적절한 진도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진 학생들은 학습의 결손이 생긴 상태로 다음 학년, 그리고 또 다음 학년을 뛰어난 학생들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 뛰어난 학생들은 앞으로 갈 수가 없고 뒤진 학생들은 학습결손이 누적되어 간다. 이것이 우리의 학교 현실이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앞서갈 수 있는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속진할 수 있고, 뒤진 학생들은 학교가 별도의 관심과 노력으로 최선의 진도를 유지하도록 도우는 것이 바로 무학년 교육과정의 취지이다. 앞이 막히지 않은, 그래서 앞이 열려 있는 교육과정이다. 학교가 기술적 복잡성을 극복할 수 있는 시설과 교사진을 가지고 있다면 좀 더 세련되고 원활한 무학년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수인정시험과 같은 방법만이 아니라, 정상진도와 속성진도를 병행하여 특정 교과목을 어떤 학생들은 2학기에 걸쳐 이수할 수 있는 것을 어떤 학생들은 1학기에 끝내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학생이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서는 진도를 취한다면, 인근 대학의 협조를 받아 분야나 교과에 따라 별도의 교육과정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

무감독 시험의 실시

-- 자율시험 성공하지 못하면 민사고 존재할 이유 없다 --

시험의 성적은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교에서 자신의 실력과는 상관없이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험이 치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실력이야 있든 없든 좋은 성적만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한 점수라도 더 받기 위하여 애를 쓰는 모습은 거의 모든 학생들에게서 볼 수 있고, 심지어는 학부모들도 자녀의 실력에 관계없이 좋은 성적을 받도록 하려는 노력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성적은 정직한 성적이 아니다.

정직하지 못한 성적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받겠다고 한다면, 지도자 교육을 표방하고 있는 민사고의 격에 맞는 학생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나는 민사고의 시험은 무감독으로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교사가 감독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정직하게 시험을 치르게 하는 무감독 고사는 국내의 몇몇 학교들에서 성공적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무감독고사의 실시가능성에 관해서 교사들의 의견을 들어 본 즉, 대부분의 교사들이 그럴 필요가 있고 실천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주저하는 기미가 없지 않았다. 자신은 정직할 수 있으나 동료들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태도가 보였다. 민사고의 선발된 학생들 사이에는 다소 경쟁 분위기가 있고 서로 감시하는 태도도 있을 수 있지만, 기숙사 생활에서 서로 친숙해진 사이에 부정행위를 발견하더라도 고발하는 것이 실제로 어렵다는 반응인 것 같았다.

학교장인 나는 학생들 전부를 학년별로 만나 우리가 왜 무감독 고사를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였다. 학생들은 약간의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학교의 방침이라면 수용하겠다는 태도였다. 지도자의 수업을 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정직성을 지키고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상황이 바로 시험의 상황이며, 이것을 성공적으로 실천해내지 못하면 민사고가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강하게 뜻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전교생을 강당에 모아놓고 앞으로 감독교사가 없는 고사에서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전체 학생이 써서 제출하게 하였다. 다 같이 선서하고 한 사람씩 교단으로 올라와 차례로 그 서약서를 교장에게 제출하였다. 매우 엄숙한 선서식을 거행한 셈이다. 또한 시험 때마다 답안지에 자신의 정직성을 서약하도록 해 왔다. 그리고 신입생은 선발과정에서 응시원서를 제출할 때 무감독 고사의 장에서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미리 받았고 입학 후에도 선서식을 별도로 가졌다.

2005년 2학기부터 시행한 자율(무감독)시험은 2년 동안 별로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접수된 고발도 없었고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학생들은 그들의 정직성을 철저하게 믿어주기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시험은 점수를 따서 기록에 남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적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정직하게 본 시험에서 자신의 실력으로 성취한 것이어야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이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면 시험과 성적으로서의 의미는 없는 것이다. 이 정도의 정식성도 없이 지도자로 육성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감독 고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과 자존심에 호소하여 정직한 시험을 치도록 지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험장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부정행위를 할 수 있도록 유혹하는 요인을 남겨두어서는 아니 된다. 학생과 학생의 거리가 너무 가깝거나 조금만 눈을 돌려도 남의 답안지를 볼 수 있도록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면, 그런 유혹의 요인이 주어진 상태에서 학생들이 정직한 시험을 치를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선택형 고사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옳다. 유혹의 요인은 철저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 학교가 유혹의 환경을 방치한 채로 학생에게 정직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공정한 처사가 아니다.

그런데 어느 해의 1학기에 신입생들이 필독서(必讀書)의 공부 상태를 점검하는 시험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그 시험을 다시 치른 일이 있었다. 옥에 티가 생긴 것이다. 시험 교실이 모자라서 계단식의 소강당에서 본 시험이었다. 서로 가까이 붙어 앉은 데다 고개만 들면 남의 답안지가 보이는 상태였다. 실제로 부정행위가 발생했다는 제보가 있어 그 시험을 무효화하고 장소를 달리 하여 다시 시험을 보게 한 적이 있다. 시험을 보는 동안 학교는 유혹의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등한시했고 학생들도 눈앞에 보이는 남의 답안지에 시선을 보낸 경우가 다소 있었던 것이다. 학교 측의 준비 조치에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무감독 시험이 성공하려면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만큼의 도덕적 긴장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