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또 북한이 NLL을 침범했다. 우리 측 경고를 무시하다가 위협사격을 받고서야 돌아갔다. 그런데 이는 우리 측 주장이다. 북한은 NLL 자체를 부정한다. 게다가 NLL을 침범하지 않았는데 사격을 가했으니 명백한 남측의 도발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일까? 남한에서야 당연히 남측 발표를 믿고 북측이 잘못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북측의 주장을 믿을 것이다. 물론 남한에도 북측의 주장을 더 신뢰하는 일부 세력이 있을 것이고 북한에도 남측의 주장을 더 신뢰하는 일부 세력이 있을 것이다.

오늘 당장 일어난 사건도 극명하게 다른 두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감안하면 직접 내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지 않은 이상 또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목소리 큰 쪽의 주장이 득세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침묵하는 대다수의 의견은 묵살되거나 서로 암묵적 동조자라고 아전인수하기 마련이다. 대개의 역사적 사실은 심증에 의거한 것이지 물증은 없다. 물증이라고 해도 당시 사관들이 기록한 실록이나 일기나 문집 등을 참고한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얼마 전에 발생한 휴전선의 목함지뢰 사건도 그렇다. 남한에서는 명백한 북측의 소행이라고 하지만 북한은 오리발을 내민다. 사과를 했다지만 ‘유감’의 뜻이 사건 자체로 남한군이 다친데 대한 유감표시지 자신들의 소행을 사과한 것은 아니라고 극구부인하고 있다. 모르긴 해도 남한에 있는 일부 좌파세력들은 남측 정부가 국면전환용으로 조작극을 펼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더욱 가관인 것은 유언비어다. 이른바 ‘카더라’통신을 신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유언비어는 세월이 지나면 야사(野史)로 탈바꿈하게 된다. 정사(正史)도 누가 기술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듯이 야사도 마찬가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유언비어가 많다. 그마저도 영남 쪽에 전해지는 유언비어와 호남 쪽에 전해지는 유언비어는 확연히 다르다.

역사란 이런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치관과 직결된다. 비록 일시적으로 특정 사관을 주입시킨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주관적 가치판단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게 된다.

나는 6·25를 직접 체험했고, 두 달도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위 인민군들과 함께 살았다. 김일성 장군 노래도 배웠고 인민군의 떡도 얻어먹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 같았고 전혀 무섭지 않았다. 훗날 나의 이 기록을 빌미로 내가 친북파라고 몰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서 계속되는 교육을 통해서 북한 괴뢰군은 악랄하고 무자비하며 북한 주민들에겐 자유가 전혀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탈북자의 수기를 통해서 북한에도 여행이 가능하고 인정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60년대 이전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고 그래서 통치자들은 북한과의 교류를 기피했다는 유언비어도 사실로 받아들였다.

2000년대 초에 평양과 개성에 갈 기회가 있었다. 평양이 우리의 1970년대 모습이라면 개성은 1960년대 이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북한의 교육계 인사들도 눈과 귀와 생각은 열려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과 대화는 할 수 있어도 공감에 이르기에는 엄청난 간극과 괴리가 존재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것은 결국 두 체제간의 역사교육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역사교육은 중요한 것이다.

이제 왜곡된 진실이나 특정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거나 강요하는 식의 역사교육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학자들이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편향적 사고를 털어버리고 학생들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나름대로의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역사교과서 집필에 불참하겠다는 학자들의 자세가 과연 올바른 것일까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극적이고, 무사안일한 자세는 학자적 양심과 소신을 벗어던지고 편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아니면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교과서를 집필할 자신이 없다는 것일까?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어야겠다는 역사의식도 없이 밥벌이 수단으로 교단을 지키고 있는 역사교수들은 교단을 떠나야 할 것이다.

여기서 동호직필이란 말의 유래와 관련된 고사를 소개한다.

동호직필(董狐 直筆)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 영공은 군주로서 덕이 없었다. 백성들을 쥐어짜는 일을 많이 했다. 궁전의 벽을 조각했고 높다란 대에서 사람을 던져 밑에 있는 사람들이 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망나니에 가까운 짓을 가리지 않고 한 셈이다. 뜻있는 산하들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끔 재상 조순(趙盾)이 모든 힘을 다해 그 잘못을 고치라고 말했다.

맹공은 이를 귀찮고 괴롭게 여겨 부하 서예(鉏麑)를 시켜 조순을 죽이려 했다. 서예가 조순의 집으로 갔다. 조순은 조정에 출근하려고 예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출근할 시간이 조금 남아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점잖고 엄숙한 모습에 감동받은 서예는 조순의 집을 그냥 나왔다. 그리고 탄식했다.

“임금을 공손히 받들어 모심을 잊지 않는 사람은 백성의 어른이시다. 백성이 어른으로 모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충성스럽지 않은 것이다. 임금의 명령을 저버리고 돌아서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있다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

그런 다음 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9월에 진나라 영공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조순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무사를 배치하여 죽이려고 했다. 조순을 보좌하던 제미명(堤彌明)이 이를 알고 조순을 부축해 내려왔다. 영공이 사나운 개를 풀어 두 사람을 죽이려 했으나 제미명이 개들을 쳐 죽였다. 그러자 무사들이 나타나 제미명을 죽였다.

영공의 무사들 중에는 오래 전에 조순의 도움을 받은 영첩(영輒)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가 조순을 알아보고 자기편의 공세를 막았다.

조순은 도망했다. 조천(趙穿)이 진나라 영공을 죽였다. 그 소식을 듣고 다른 나라로 망명하려던 재상 조순이 국경을 넘으려다 되돌아왔다.

그때 역사를 기록하던 관리인 태사 동호(董狐)가 이렇게 기록해 조정에 제시해 널리 알렸다. "조순이 임금을 죽였다.”

재상 조순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

동호가 대답했다. “그대는 재상이다. 비록 임금에게 핍박받아 망명길에 올랐어도 국경을 넘기 전에는 이 나라 재상이다. 재상은 임금을 보필하는 사람이다. 그대가 임금의 위급한 상황을 막지 못했다면 임금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는 임금을 죽인 도적을 치지 않았다. 그러니 임금을 죽인 사람이 바로 그대 조순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재상 조순이 탄식했다. “아아, 슬프다. 시에 이르기를 나의 그리워했음이 스스로 커다란 근심을 남겼다고 했는데 이것이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는 조순이 조국인 진나라가 눈에 밟혀 빨리 국경을 넘지 못하고 나랏일이 걱정되어 돌아온 것이 도리어 커다란 걱정과 한을 남기게 되었다는 의미다.

재상 조순은 탄식하며 사관인 동호의 말을 따랐다.

한참 후 이것을 안 공자가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바르게 기록하여 꺼리어 감추거나 숨기지 않았다. 재상 조순은 옛날의 어진 대부였다. 법에 따라 자신이 나쁘다는 평판을 받아들였다. 가엾도다! (조금만 일찍)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망명하고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 이름이나 명예가 더럽혀지는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春秋左氏傳> (고영규 지음. 고전을 탐하다. 경향BP, 2012)에서 전재)

윤종건(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