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제31조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초국가적 가치중립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육과 정치는 물과 불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국가와 사회의 실제 작동 모습과 교육 현장에서는 교육과 정치, 정치와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에, 에듀인뉴스는 '교육을 생각하는 정치, 정치를 생각하는 교육'을 주제로 담론을 형성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아래 글은 윤형중 한신대 교수가 에듀인뉴스에 보내온 원고이다. 교육과 정치, 정치와 교육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편집자 주>  

1. 정치와 공공성

자고로 정치의 근본은 공공성을 실현하는 데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공후사(先公後私)가 훌륭한 정치인의 덕목으로 여겨졌던 것은 이 때문이다. 직접민주제를 꽃피웠던 고대 희랍인들은 사적인 것에만 골몰하는 사람을 사회적 금치산자(idiotes)로 간주했다. 오늘날 바보(idiot)와 어원을 같이하는 이 단어에서 공공성의 중요성, 그리고 공공성과 정치의 불가분리성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확신을 읽을 수 있다. 개인적 이해관계만 중시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가치를 결여한 자(privatus)로 치부되었다. ‘인간의 자격가운데 핵심을 박탈당한 자’라는 부정적 함의가 전이된 단어인 영어 단어 private가 긍정적 함축까지 포함하게 된 것은 서양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고대 희랍인들의 시각에서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시민이라고 할 수 없다. 시민이 아닌 사람이 제대로 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바,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 생산 활동에만 전념하는 ‘노예에게 폴리스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다원적 대의민주사회를 고대 아테네의 엘리트 직접민주제와 평면 비교할 수는 없다. 성숙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적 지평으로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민의 기본적 덕목을 공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으로 특징짓고 정치의 본질을 공공성에 대한 헌신으로 규정한 것은 시공을 초월한 희랍문명의 탁견이었다.

정치의 본질을 공공성의 구현으로 보는 태도는 결코 서양의 독점물만은 아니었다. 봉건시대의 사상가였던 공자조차도 정치란 ‘세상의 모든 일을 공익을 위해 처리하는 것’(天下爲公)으로 정의했을 정도다. 나라를 다스리는 행위의 요체가 공공성에 있으며 정치의 본질은 공공 마인드를 가지고 모든 일을 바로 잡는 데 있다(政者正也)고 갈파한 것이다. 맹자는 공자의 이런 생각을 더욱 심화시킨다. 열국 순행가운데 맹자가 만난 어느 왕이 “선생이 내 나라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맹자는 오히려 “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공적 정의에 대해 묻지 않고 사적 이익만을 앞세우느냐?”고 질타한 것도 같은 문맥이다. 정치의 본질이 공공성의 실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정치의 본질로서 공동선을 강조하고 정치인의 본분을 공익 추구에서 찾은 고대 중국의 통찰은 동아시아적 리더십의 원형인 군자론으로 집약된다. 공자가 강조한 바, 진짜 정치인인 ‘군자는 덕에 전념하고’, 사이비 정치인인 ‘소인은 땅의 확보 같은 눈앞의 이익에 골몰한다’는 것이다(君子懷德, 小人懷土). 군자의 덕은 사사로운 유덕함이 아니라 솔선수범과 정치적 참여를 통해 구현되는 공적 덕목이다. 심지어 공자는 지배계급 안에 수많은 소인배들이 넘쳐나는데 반해 하층계층에 진정한 군자가 있을 수 있다고까지 하면서 공공성과 정치적 리더십의 상관성을 강조하였다.

정치의 본질에 관한 고대 중국인과 희랍인들의 통찰은 단순한 의고(擬古) 취향을 넘어서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다. 특히 서양의 경우, 좋은 나라의 이념과 그것을 다스릴 정치적 리더십의 본질에 관한 통찰은 로마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다양한 실험을 거쳐 근대에 민주공화국의 이상으로 개화하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라는 표현도 정치와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관통하는 기본 원리에 대한 진술이다. 공동선의 강조, 공동체에의 헌신, 공익의 추구는 모두 공공성의 구현으로서의 정치를 규정하는 불변의 잣대다.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절도 공공성의 이념과 직결된다. 공화국(republic)이라는 용어 자체가 ‘공적인 것, 또는 공공의 지평’(res publica)의 소산인 것이다.

2. 한국정치의 현실과 무너진 공화정의 꿈

불행하게도 고대 그리스는 물론이거니와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정치현실과 정치적 이상과의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 멀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15년 상반기 한국사회를 강타했던 ‘성완종 사태’는 21세기 한국정치가 정치의 본질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소요되는 대중민주주의의 현실을 부인하는 공허한 당위론이 아니다. ‘성완종 사태’가 고발하는 한국정치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성완종이 로비 대상으로 삼은 여야 정치엘리트와 관료엘리트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공적 권력을 철저히 사유화(私有化)했다는 사실이다.

‘성완종 사태’의 핵심은 정치의 근본인 공공성의 원칙은 이름에 지나지 않을 뿐 정작 막후에서는 권력 카르텔 집단이 각종 이권을 뜯어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는데 있다. 이 권력 카르텔 안에서 서로 형님 동생하면서 ‘신뢰와 의리’를 말하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던 것이다. 그 카르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평생 몸부림쳤건만 막상 유일한 자산이었던 돈이 떨어지자마자 폐기처분되고만 자의 르상티망(원한)이 담긴 메모가 ‘성완종 사태’의 발화지점이었을 터이다. 결국 ‘성완종 사태’의 핵심은 공공성의 사유화로 압축된다.

조선 초기 지도층의 공공 마인드가 왕성할 때 왕조가 전성기를 누렸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육조, 의정부, 3사(司), 그리고 재야사림(在野士林) 등으로 구성된 조선의 공론영역은 왕권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정치엘리트들 사이의 통합 정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 실패 이후에는 정치권력이 일개 붕당과 척족(戚族)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국가 시스템 전체가 사사화하고 마는 것이다. 조선 말기 삼정(三政)의 문란이 야기한 민란과 소요의 연속 앞에서 철저히 반민중적이었던 정치권력의 행태는 나라와 정치의 존재 이유인 공공성의 완전한 부재를 입증하는 불행한 선례이다.

이는 단지 지나가버린 과거지사만은 아니다. ‘영혼이 없는’ 관료들에게 공복이란 말에 내재한 공공성은 한낱 사치일 뿐이다. 민주공화국에서 정치지도자들의 공공 마인드를 시민들이 의심할 때 공화국의 앞날은 불투명해진다. 그것이 ‘성완종 사태’가 웅변하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치명적 현실이다. 공공성을 존재의 요건으로 삼는 정치주체가 오히려 공공성의 토대를 침식하는 정책을 밀어 붙인다면 그것은 자기배반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제 길을 벗어난 국가가 공화정의 존재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때 우리는 ‘좋은 나라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현실정치의 타락은 시민정신의 왜곡을 낳거니와 그 역도 참이다. 부패한 정치가 시민윤리의 착근을 방해하고 미숙한 시민정신이 정치의 퇴행을 부추기는 악순환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다. 갈수록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것이 단적인 증거다. 압축성장과 응축적 민주화가 여러 부작용들을 동반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량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온 것도 한국적 복합 상황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는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하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인의 내면과 사회생활에서 공공의식과 공공선에 대한 존중심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이는 정치인을 위시한 역대 지배층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배계층의 공공의식 부재는 선사후공(先私後公)의 타락상을 낳는다. 공공선에 대한 존경심 결여는 서민들의 공중심 부족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나라 전체가 냉소와 위선의 도가니가 되고 국민 전부가 르상티망(패자와 약자의 원한과 질시)의 포로가 된다. 국가엘리트들의 병역면제 비율이 서민층에 비해 몇 배 높은 현상도 ‘상놈만 군역(軍役)을 졌던’ 봉건조선의 유산이 현대한국에서 재현되어 공화정의 정신을 파괴하는 경우일 것이다. 요사이 국가개혁의 화두로 등장한 ‘관피아’ 현상이나 전관예우의 적폐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한 공직의 사적 전용현상을 입증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공화주의의 습속은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가 되는’ 삶을 일반화시켰다. 그 결과 한국인의 삶은 각박하고 불만이 팽배하다. 이웃은 동반자이기는커녕 경쟁자나 적으로 여겨진다. 세계가 찬탄한다는 대한민국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OECD국가 중 자살률이 최고이며 국민적 불행지수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그 근인(根因)은 한국 시민들이 공동체의 존재근거인 공공성을 내면화하지 못한 결과 각개약진과 각자도생이 생활화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증명하듯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래봐야 자기만 손해라고 느낀다. 지도층이나 부자에 대해서 ‘모두가 도둑놈’이라는 식의 냉소가 일반화되어있는 사회에서 자유와 법치의 상관성에 대한 공감대는 희박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현대 한국은 원심력이 구심력을 압도하는 나라인 셈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일상의 자족감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 귀속감과 자부심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시민교육의 핵심적 주제이다. 시민 개개인이 갖는 자존감과 연대의식을 통해 생성되는 사회자본의 존재는 성숙한 사회생활을 가능케 할 궁극적 준거점이다. 이는 우리가 ‘좋은 나라’를 상상할 때 공화국의 이념과 실제가 절박한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선공후사의 공적 이성을 엘리트 계층이 솔선수범하고 시민들이 공유해 선순환하는 도정이 바로 시민교육이다. 이는 장구한 시간과 끈질긴 노력이 요구되는 집합적 과정이 아닐 수 없다.

3. 시민정신의 敵들~ 불공정사회와 르상티망(1)

불공정한 사회는 건강한 시민정신의 형성을 가로 막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불공정 사회에서 안개처럼 피어나는 르상티망이 시민정신의 토대를 근저에서부터 파괴한다는 점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공화사회는 한국사회를 도약케 할 무형의 가치이자 사회운영의 원리이며 공동체적 삶의 질서일 게 분명하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했다고 해도 오늘의 우리 사회처럼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수많은 시민들이 박탈감을 호소하는 사회가 좋은 나라일 수는 없다. 시민적 우정과 신뢰대신 적의와 불신이 넘치는 나라가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이기는 어렵다. 불공정한 사회에서 성숙한 시민정신이 싹트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불과 몇 년 전 순차적으로 일어난 두 가지 중첩되는 일화가 의미심장하다.

201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당시 이명박 정부가 표방한 공정사회론은 정권의 기존 이미지와의 괴리 때문에 냉소의 대상이 되었다. 공정사회의 화두가 2010년 후반기부터 2011년 초반까지 갑작스럽게 사회문화적 무게를 획득하는 과정은 우연의 연속처럼 보인다. 하지만 되풀이 되는 우연은 우연에 머물지 않으며 일정한 필연적 방향성을 내포한다. 대한민국 역사에 쌓여 온 편법과 반칙을 광정(匡正)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발전이 어렵다는 시민들의 공감대가 내연되어 오다가 이명박 정부의 인사파동과 정책실패로 발화되어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집합적 관심으로 폭발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도 이런 사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이 그토록 엄청난 사회적 파장으로 확대된 것도 정의와 공정성을 바라는 민심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독서계를 강타한 『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은 이러한 집합적 관심과 맞물린다. 샌델의 책은 2010년 최대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백 삼십만 권이 팔렸다. 2011년 벽두에는 교육방송(EBS)에서 이 책의 저본(底本)인 그의 「정의」 강의가 이례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두 번 연거푸 방송되기도 했다. 대학 1학년 교재이긴 하지만 철학 책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정의’ 열풍이 불었던 이유는 공정사회 캠페인의 이면과 직결된다. 바로 정의와 공정성이라는 화두가 우리 시대의 흐름을 짚으면서 공화사회에의 절박한 집합적 요구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거의 80%에 이르는 시민들이 한국사회가 불공정 사회라고 응답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의 대선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화한 것이 생생한 증거일 것이다.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불공정은 스스로 ‘미생’임을 뼈저리게 느끼는 보통사람들의 깊은 분노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분노보다 훨씬 악성의 르상티망을 양산한다. 르상티망(Ressentiment)은 원래 철학자 니체의 용어로서 사회적 강자에 대한 약자의 질투심과 승자에 대한 패자의 시기심을 가리킨다. 승자와 강자의 성취를 패자와 약자가 마음속으로는 인정치 않는 원망(怨望)의 뜻도 담고 있다. 물리적으로 패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약자의 자기정당화가 르상티망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기독교 문명에 대한 니체의 총체적 냉소를 인간성의 보편적 그늘에 대한 사회존재론적 통찰로 읽는 것이 가능함은 물론이다. ‘배가 고픈 것보다 배가 아픈 것을 더 참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마음속의 비밀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 본능적으로 이러한 마음의 악마성을 조금씩은 지니고 있다. 개인의 차원에 그칠 때 인격의 문제로 축소될 수도 있는 이 문제가 적절히 제어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집단무의식의 심층영역으로까지 번질 때 그것은 사회심리와 정치문화의 문제로 비화된다.

한국은 르상티망을 억제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조장하는 사회인가? 시기심이 한 인격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르상티망의 사회적 만연은 시민정신의 빈곤과 국격(國格)의 실체를 폭로한다. 잘 나가는 사람 발목잡고 ‘못 먹는 밥에 재 뿌리는 것’이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문제로 확대된다. 그 결과 갈등과 불신이 무한 재생산되는 것이다. 인사철이나 선거철에는 각종 무기명 투서와 흑색선전이 난무한다. 인사 때마다 국정의 중심인 청와대는 고위관직 후보자들에 대한 음해성 투서의 홍수로 골머리를 앓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행태는 민간기업과 지방 관공서에서도 전(全)방위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사정기관 관계자에 의하면 인사철에 쏟아지는 투서는 대부분 허위로 판명되지만 그럴듯한 내용을 담고 있기 일쑤여서 거명된 당사자와 조직 전체에 큰 상처를 남긴다고 한다.

어떤 조직에서나 좋은 자리는 희소하므로 위로 올라갈수록 경쟁이 치열한 것은 인지상정이며 인간사의 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문제는 경쟁자를 끌어내리려는 권력게임이 상대방에 대한 무차별적 해코지로 비화하는 데 있다. 그 결과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이 되는 풍토가 조성된다. 이를 입증하는 몇 가지 의미심장한 통계가 있다. 2007년 이후 무고 사건이 폭증하고 있는데, 무고죄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숫자가 2007년에 819명, 2008년에 1144명이었다. 참고로 몇 년 전 일본 전체에서 무고죄로 기소된 숫자가 그해 한 해에 총 2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전반적인 고소·고발 건수도 가파르게 늘고 있다.

한 지역경찰청 2003년 자료에 의하면 4만여 건의 고소사건 중 22%만 기소되고 나머지는 불기소나 기소유예 되었지만 고소인들은 그런 경우에도 항고나 재항고로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한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상대방을 집요하게 괴롭히기 위한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다. 검찰에 접수된 고소나 고발의 95%는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참고로 2004년도 국가별 총 고소 사건은 한국이 60만 건 이상, 일본은 1만여 건이었다. 양국의 총 인구 수를 감안하면 한국사회의 고소 숫자가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르상티망의 문화에 부정적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고소·고발·투서에 사회적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내부비리 고발은 부정부패를 막고 사회투명성을 높이기도 한다. 무기명 투서 자체가 사회적 약자에게 불가피한 저항수단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르상티망의 심리가 창조적으로 전환될 때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의식을 동반할 수 있다. 질투가 좋은 의미의 경쟁을 촉발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민족사의 재앙이었지만 봉건적 계급사회의 잔재를 일소함으로써 한국 시민들에게 동일한 출발점에서의 무한 경주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반도의 오랜 유산인 ‘헝그리 사회’를 한 세대 만에 넘어선 한국적 산업혁명의 동력이 확보되고 모두가 남들처럼 동등하게 대접받고 싶다는 한국적 민주혁명의 계기가 점화되었다.

하지만 질투와 원망의 사회적 만연은 전 국민이 항상적 불만족 상태에 놓인 ‘앵그리 사회’를 고착시킨다(2).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는’ 인간성의 보편적 약점에다 한국적 르상티망이 가세한 우리사회는 언제나 과열상태에 놓여있다. 그 단적인 증거가 위에 제시된 통계자료인 것이다. 르상티망의 심리가 이웃인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통제되는데 비해 한국사회에서는 적절히 제어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IT 강국, 한국’의 인터넷 상에 창궐하는 악성 댓글문화에도 르상티망의 그림자가 짙다.

한국인에게 널리 퍼져있는 르상티망은 부패한 정치, 극심한 양극화, 불공정한 사회적 관행, 미래에 대한 불안 등과 연계되어 21세기 한국사회를 분노·스트레스·피로·울분·혈기의 분출이 가득한 거대 ‘울혈사회(鬱血社會)’로 만든다(3).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과 학교폭력, 군대폭력도 울혈사회의 폭력성을 시사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유흥업의 全방위적 팽창이나 ‘갈 데 까지 가는’ 특유의 술 문화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한국적 울혈사회와 피로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다. 하지만 르상티망의 최대 문제는 그것이 건강한 시민정신을 파괴하고 성숙한 주체형성을 가로막는 암종(癌腫)이라는 사실에 있다. 르상티망은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남 탓하기’의 관행을 정당화하는 사회심리적 기제이다. 그것은 치유가 어려운 불신과 갈등을 전파하는 사회적 전염병의 숙주(宿主)에 다름 아니다. 결국 ‘성완종 사태’의 함의는 단지 정치인과 지배계층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한국인 모두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4. 시민정신과 공화사회

한국인의 습관적 남 탓하기는 우리 사회의 진화를 저해하는 치명적 장애물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감당하는 성숙한 존재로 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기는커녕 불특정 다수인 남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에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가 한국인에게 또 다른 마음의 습관이 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한 의미심장한 통계가 있다. 2014년 10월 미국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는 44개국 4만 864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기회와 불평등에 대한 태도’를 발표했다. 그 가운데 ‘성공은 외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항목이 특히 흥미롭다.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한국인이 74%, 선진국 그룹의 평균 응답률은 51%였다. 성공의 원인이 내 안에 있지 않고 나의 바깥에 있다고 보는 한국인의 일반적 성향을 웅변하는 조사 결과다.

‘인생에서 앞서가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가’ 항목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오로지 한국인만이, 성공하는 데 있어 ‘적절한 사람과 알고 지내는 것’(39%)이 근면(34%)과 교육(30%)보다 중요하다고 답했다. 반면 다른 43개국 시민 모두 교육과 근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요인을 더 중시한 것이다. ‘꽌시(關係)’로 유명한 중국인조차 성공의 관건을 근면(27%)>교육(18%)>‘적절한 사람과 알고 지내는 것’(12%) 순서로 답했다. 이는 한국인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는 여론조사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성공을 설명할 때조차 바깥 요인을 중시하는 터에 자신의 부정이나 실패의 책임을 바깥에 돌리는 것은 더 더욱 쉬운 일이 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그만큼 비주체적이다. 자기 일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타인과 나라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혹하다. ‘내 탓이오’의 목소리는 드물어도 ‘남 탓, 국가 탓’은 넘쳐나는 것이 21세기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다.

우리네 삶의 지평에서 사람들은 끈끈하게 이어져서 실존한다. 강력하고 효율적이었던 발전국가적 근대화가 심대한 변화를 가져오면서 과거의 농촌 공동체적인 관습이 거의 사라졌음에도 집단주의적인 한국인의 행태는 변용된 형태로 온존되어왔다. 자기정체성을 홀로 정초하고 확인하는 사회문화적 훈련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은 지연·학연·혈연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호명’ 받는다. 한국 정치의 병폐인 지역감정의 문제, 교육개혁을 가로막는 근본 원인인 학벌의 계급화 현상, 수많은 부정부패의 모태 역할을 하는 온정주의적 집단주의 등은 우리네 삶의 원형적 실체에 해당된다. 연줄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 실체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은 비교적 희유(稀有)한 일이었고 최근에 와서도 드물게만 관찰되는 현상이다. 가족주의나 변용된 형태의 가족주의적 집단주의는 우리 사회에서의 법치주의의 무력화 현상과 연관해서 더 논의할 가치가 있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역설하는 것처럼 공동체에 대한 주체의 귀속감은 의미 있는 삶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배경이며 공동선의 한 원형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근원적 귀속의 장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가족이거나, 변형되고 확대된 의사(擬似)가족(회사나 이익집단, 공동체, 조직, 종교기관, 향우회, 동창회 등)이다. 독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소속집단의 성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확인하고 자기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무엇보다 앞세우며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의사가족은 가족의 사회심리학적 확대판이다. 가족이나 의사가족은 급격한 압축성장이 초래한 총체적 아노미의 현실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최후의 안전판 역할을 맡아왔고 지연·학연 같은 다른 집단주의 기제의 매개 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가족주의·의사 가족주의는 자기집단의 이익이나 구성원들 사이의 결속감과 의리를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합리적 규범과 법질서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공익을 위해 필요한 내부비리 고발자가 변절자 취급을 받는 이유도 이런 사회문화적 습속에 기인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의사 가족주의의 횡포가 법의 지배를 압도하는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부과된 규범이나 집합적 규약에 의해 정해진 절차조차 제멋대로 무시하는 이익집단들의 제몫 찾기가 빈발하는 현상도, 사회경제적 원인을 일단 배제하고 문화적 차원으로 논의를 제한하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의 충실성이라는 ‘좋음’(善)의 목표가 보편적 절차합리성의 준수라는 ‘옳음’의 원칙을 무력화시키는 데 주된 원인이 있다.

개인이 실체로서 착근된 경험이 일천한 사회라는 특성과, 급격한 산업화로 전래의 공동체정신이 공동화(空洞化)된 사회 사이의 모순적 결합이 현대 한국사회의 실체에 가깝다. 그 결과가 시민정신의 척박함이자 왜곡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라는 공허한 순환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실천적 관점에서의 선택이 불가피한 지점에 우리 사회가 도달했다고 나는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현재 한국사회의 진화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정신을 실행할 주체의 형성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정신의 기초인 주체성을 갉아먹는 르상티망에 대항하는 내적 힘을 길러야 우리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이다. 시민정신의 창건은 곧 시민적 주체의 형성이자 시민교육을 의미한다.

교육을 포괄한 시민교육의 핵심적 통찰은 시민의 덕목이 놀면서 얻어지기는커녕 단련과 노력 끝에 비로소 획득되는 귀한 자질과 소양이라는 점이다. 교육의 본질이 노동을 통한 자기도야에 있다고 할 때 노동의 의미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끊임없는 훈련과 땀 흘림, 하고 싶고 놀고 싶지만 참는 금욕, 스스로를 가다듬는 절제는 결코 그냥 생기지 않는다. 예컨대 어린 아이들은 결코 천사가 아니다.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로 타락할 수도 있는 극단의 가능성 앞에 열려진 과정적 존재인 것이다. 아이들 하고 싶은 대로 놔둘 때 스스로 최대한의 발전을 이끌어 내리라는 기대는 피상적인 소망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놀기 좋아하고 땀 흘려 노력하는 것을 기피한다. 바꿔 말하면 노는 건 달콤하고 쉬운데 반해 노력은 쓰디 쓸 뿐 아니라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학령기 아동의 경우 노동은 곧 공부를 뜻한다. 물론 이 때 공부는 현대 한국어에서처럼 국영수 중심의 교과 공부만으로 왜소화되어서는 안 된다. 공부(功夫)라는 말 자체가 중국 무술을 총칭하는 쿵푸를 뜻하기도 하지만 원래 의미는 땀 흘려 닦는 기예(技藝)를 지칭한다. 교육의 본질이 노동을 통한 자기형성이라는 우리의 주장과 상통한다. 자연과 대비되는 문화의 라틴어 어원이 ‘경작하다’인 것과 비교해 음미할 가치가 있다. ‘그냥 있는 것’, 또는 ‘스스로 그러한 것’인 자연과는 달리 뜨거운 햇볕아래 땀 흘려 씨 뿌리고 잡초를 뽑는 힘겨운 노동 끝에 비로소 얻는 것이 바로 문화이자 교양으로서의 시민정신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부, 문화, 교양이 학교나 제도교육으로 제한되지 않고 삶과 사회의 전체 국면을 포함하는 시민교육으로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의미의 노동이 교육에서 차지하는 몫을 지나치게 저평가하거나 너무 안이하게 처리하는 데 서머힐을 비롯한 현대 진보주의 교육론의 맹점이 있다.

시민교육과 연관된 노동의 철학적 의미는 철학자인 헤겔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장에서 탁월하게 묘파된다(4). 절대정신이 스스로에 대한 투명한 자기이해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정신현상학은, 정신의 노동인 외화(外化)와 그것의 지양 없이는 아무 것도 생겨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체의 인간적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사유에서 형이상학의 꺼풀을 벗겨 합리적 핵심을 이끌어내면 여기서 노동은 일상적 어법보다 훨씬 넓은, 자신과 대상계를 형성해가는 시민적 창조활동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생사를 건 인정투쟁에서 살아남는 대가로 예속의 나락에 빠진 노예는 이윽고 그 상황을 반전시킨다. 노예의 예속성을 탈피하게 만든 결정적 동인은 바로 노예의 노동이다. 승리한 주인은 노동하지 않으면서 노예의 노동이 가져다 준 사물을 수동적으로 향유하기만 하지만 노예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면서 노동을 통해 자연을 가공(bearbeiten)하며 세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품성을 도야하고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노예는 노동함으로써 자연의 세계를 넘어서 역사와 문화의 세계를 형성하며 자연적 존재 이상의 것으로서 스스로를 밀어 올리게 되는 것이다.

후에 마르크스가 헤겔 철학 전체의 비밀이라고 찬탄해마지 않았던 「주인과 노예」의 노동에 대한 서술, 그리고 노동에서 비롯된 상호인정의 논리는 상호주관적 주체형성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완정(完整)한 정리로 읽혀질 수 있다. 독일어로 교육인 Bildung은 교육(Education) 뿐만 아니라 교화(Edification)로서의 자기형성(Self-Formation)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주체의 자기형성은 부단한 노고와 땀 흘림, 욕망의 유예, 스스로 부과하는 엄격한 절제 없이 획득불가능하다. 진정한 자유는 힘든 노동의 결정체이며 장구한 평화는 인간적 교양과 물질적 풍요 위에서 비로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철학적 함의는 정신과 육체, 그리고 문화와 경제적 생산의 모든 영역에서 확인 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시민정신과 주체형성의 상호관계성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철학적 통찰을 현실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만들어진다. 즉 보통사람의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실천되는 시민적 덕목의 집적(集積)과 구조화가 곧 시민윤리의 정수인 것이다. 현대인의 마음은 고독한 인격수양으로 닦아지지 않는다. 개인 차원의 도덕수련으로 고매한 인품을 획득하는 경우는 큰 사회적 함의를 갖지 못한다. 사회적 문법으로 확장 가능한 개인의 미덕만이 시민정신의 이름에 값하기 때문이다.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식의 감성적 한탄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민적 자유와 공동체의 통합이 유기적 조화를 이루는 곳이 공화사회이고 건전한 시민정신은 공화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의식, 자유와 자율성, 권리와 의무의 일체성 실천하기, 평등의식, 법치와 민주질서의 생활화,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장인정신, 약자 배려, ‘다른 것’을 관용하고 인정하기, 합리적 애국심, 정치공동체의 최고준거로서의 공정과 공평에 대한 일상에서의 헌신, 자연 앞에서의 겸허함, 사랑과 환대의 세계보편주의 등은 모두 현대 세계에서의 성숙한 시민정신의 구체적 사례들이다. 그것은 개인과 가족의 사밀성(私密性)을 보장하고, 국내 시민사회와 전지구적 시민사회의 확고한 정신적 기반을 이루며, 국가와 세계사회의 여러 제도들에까지 그 영향력이 침투되는 시민윤리의 구체적 덕목들이다.

나아가 직업윤리와 시민정신의 진화가 상호 선순환관계에 놓여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직업은 나 자신과 가족을 부양 가능케 하는 수입을 제공하며, 나의 노동으로써 공동체에 기여하고, 그렇게 사회적 인정을 받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의 직업을 바라보는 눈은 경제적 수입과 권력획득이라는 잣대로 너무 편향되어 있다. 수입과 권위는 직업 선택에서 물론 중요한 사안이지만 이 한 가지로 지나치게 무게중심이 쏠릴 때 직업윤리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경제행위가 이윤창출로 제한되지 않는 독자적 윤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는 명제도 공동체에 대한 기여와 시민윤리의 배양과 연계된 직업의 또 다른 의미에서 주로 창출된다.

물론 그 수준의 수입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건 사람과 사회에 따라 매우 다를 수 있지만 만약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본 수준의 수입이 확보된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일과 삶에 자족하는 것이다. 르상티망과 남에 대한 관심·비교의식이 유독 강한 한국사회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보다 희귀한 것도 드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이 현실로 닥쳐오는 사회에서 ‘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도 나름대로 소중하다. 나아가 자신의 일에 대한 자족감이 현실에 대한 안주(安住)로 퇴행하지 않게끔 자계(自戒)하는 습관이 필수적이다.

어떤 일에 자족하면서도 자계하게 되면 이윽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게 된다. 자족하면서 자계하여 잘 할 수 있게 된 일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행복감이다. 일 자체에 대한 몰입에서 나오는 행복감은 자기 충족적이어서 세상의 인정과 돈의 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족과 자계의 사이클이 만드는 고유의 뛰어남(arete)은 모든 직업윤리와 성숙한 시민정신의 핵심이다. 그 뛰어남과 자족감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중심이야말로 오늘의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준칙이자 시민정신의 구체적 기반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시민정신의 본령은 우리 스스로에서 시작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 수렴된다. 정치인과 사회 지도층이 공적 의무를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요구일 것이다. 공화사회를 지향하는 것도 공동체적 존재인 인간 본성의 발현이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우리 스스로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날의 삶의 현장에서 개인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모든 창대한 것들의 출발점이다. 자신과 관련된 공적인 일에서 사회에 먼저 책임을 돌리거나 남 탓만을 하는 것은 시민정신에 대한 배반이다. 시민정신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 공공성의 의젓한 주체라는 인식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정치 참여를 통한 공공성의 실천이야말로 살아있는 시민교육의 현장이다.

1)아래의 내용은 졸저, 『시장의 철학』 (나남, 2016) 제6장인 「대중, 공론장, 시민교육」의 3절과 4절을 압축해 재구성한 것이다. 같은 책, 292~311쪽 참조.

2)‘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멋진 레토릭으로 현대사를 조망한 사회학자는 서울대의 전상인 교수다.

3)연세대학교의 정치학자 박명림 교수가 필자와의 잡지 대담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4)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Felix Meiner, 1952), 141~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