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교육학회 2022년 공동학술대회:
주제: "모두를 위한 미술교육"
기조강연 : 교육적 성장의 미학적 고찰 (원고 전문)
발표자 :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교육철학)
일시 : 2022년 8월 12~13일
장소: 경희대학교 (온라인 줌)

[에듀인뉴스팀]

주제강연 : 교육적 성장의 미학적 고찰

(Towards an Aesthetic Discourse of Educative Growth)

-- John Dewey의 질성적 사고를 중심으로 --

기조강연 :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I. 머리말

교육은 인간의 성장에 관한 제도적 활동이다. 성장의 개념을 두고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체적 성장이다. 그러나 이지적, 정서적, 사회적, 도덕적 성장도 대개 신체적 성장을 비유적으로 적용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러한 비유적 적용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성장을 무리 없이 설명하거나 포괄적으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정보나 지식을 획득하고, 추리나 판단의 세련성을 기하며, 사물이나 개념이나 이론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이 확장되고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이지적(理知的) 성장은 신체적 성장의 비유로써는 설명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이지적 성장을 인간의 총체적 성장의 개념에서 분리시켜 별도의 원리로써 설명하거나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또한 경험을 이지적 부분과 비이지적 부분으로 구획짓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인격체의 총체적 성장을 겨냥하는 교육을 계획하거나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게 된다.

나는 듀이의 예술론에서 언급되고 사용되는 “질성”(quality)의 개념과 “질성적 사고”의 원리가 교육적 성장의 본질적 의미와 이에 상응하는 경험의 특징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설명력을 지닌다는 것을 논의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바는, 교육적 성장은 마땅히 경험의 총체성을 상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과 질성 혹은 질성적 사고의 개념은 교육적 경험의 일차적이고 완성적인 특징을 밝혀 주는 설명의 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교육적 성장에 관한 이해와 설명은 질성적 사고로 출발하여 질성적 사고로 완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나는 여기서 우선 이론적 사고도 질성적 사고와 무관하고 이와 단절된 경험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오히려 그것만으로 교육적 성장을 이해하고자 할 때 이론 자체가 지닌 “함정”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II. 이론의 힘과 그 함정

전통적으로 학교교육에서 지식, 규범, 사상 등을 포함하는 이론들은 주로 자연세계나 인간사회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한 지식과 규범과 사상은 우연히 자연적으로 남겨진 것들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지력이 작용한 결과적 산물이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이론과 실천의 괴리”라는 말을 쓰듯이, 이론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를 생산한 마음의 작용과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 자체와는 분리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론”이라는 말은 “사물”, “실천”, “현실” 등의 말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론”은 넓은 뜻으로 이해하면 사물이나 실천적 과정이나 현실적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나 기호 등의 상징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표현한 의미 혹은 그 체제를 총칭하는 말이다.

언어 혹은 기호는 본질적 특징상 그 자체가 아닌 어떤 것을 나타낸다(가리킨다). 그것이 기와집이나 한강다리와 같이 구체적인 사물일 수도 있고, 추월한다거나 가로막는다와 같이 행위의 과정일 수도 있고, 괴롭다거나 신난다와 같이 마음의 상태나 활동일 수도 있고, 청룡이나 유니콘과 같이 어떤 상상적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나타내는 실물 혹은 실제 그 자체를 직접 조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의 형태나 구조나 속성이나 상태의 표현(이론) 그 자체는 이미 상징적-도구적 수단에 의해서 실물 그 자체의 위치를 떠나있고, 우리는 그 상징적 수단만을 조작함으로써 실제적 사태 혹은 상황에 관해서 묘사하거나, 가상적으로 처리하거나,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장식할 수도 있다.

가령 우리가 개울가에 있는 돌을 두고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그 돌을 실제로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그것의 크기와 모양을 설명할 수도 있고, 상상적으로 집 마당에 두어 보기도 하고, 선반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깨어 보기도 하는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이와같이 이론은 그것의 상징적 수단이 지니는 특징으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유로운 가상적 조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가상적 조작의 가능성이 바로 이론으로 하여금 실제와 유리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론이 실제와 괴리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가상적 조작의 결과를 실제에 다시 되돌리고자 할 때 그 되돌림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자유로운 조작은 바로 “이론의 힘”을 생산한다. 이론은 실제의 복잡한 상태를 그대로 두고 실제를 조작하고, 그만큼 우리의 사고를 포함한 행위를 경제적이게 한다. 그리고 특히 과학적 이론은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상에 의한 가설들을 성립시키고, 어떤 가설들은 전제 혹은 공리로 하고, 어떤 가설들은 결론 혹은 정리로 설정하면서 사고의 형식적 체제를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이와같이 우리의 마음은 이론과 더불어 있을 때, 실제의 복잡하고 무질서한 상태를 정연한 논리적 체제로 바꾸어 놓을 수 있고, 상상적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같이 자유로운 상상적 조작에 의하여 실제를 가상적 차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실제 그 자체를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론의 힘 그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이론 혹은 그것을 구성하는 언어적-상징적 표현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이름짓기”(naming)이다. 이론은 구체적 물체이거나, 사물의 속성이거나, 위상적(位相的) 관계이거나,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거나, 행위 혹은 동작의 특징이거나, 의식의 과정에 떠오른 순수한 형식적 관념이거나, 그 어느 것이거나 간에 어떤 대상에 대한 이름이다. 그것은 구체적 사물이나 실제의 과정 그 자체의 전부가 아니라, 그 대상이 어떤 범주나 차원의 설정을 통하여 우리가 지각한 혹은 의식한 어떤 특성(질성)을 내용으로 추상화한 것의 표현(이름)이다.

“추상화”된 것은 대상의 한 범주 혹은 차원의 특징을 그 대상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이론의 힘은 바로 추상적 표현을 실제와 분리시킬 수 있다는 특징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힘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자유롭게 생산한 힘이다. 그러나 이론은 그것을 통하여 마음이 자유를 누린 정도에 비례하여 실제와의 관계가 멀어질 수 있다. 추상화의 정도가 높을수록, 그리고 조작의 자유를 누린 정도가 높을수록 이론은 실제와 거리가 멀다. 설명력의 범위는 클 수 있으나 적확성(的確性)은 떨어지며, 실행적 절차의 포괄성은 있으나 구체적 과정을 제시하기에는 모호성이 있고, 표의(表意)의 공감대는 넓으나 절실성은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교육과 문사(文士)는 문명의 중추적 힘을 생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방법의 힘은 전통적으로 귀족계급의 사람들이 행사하고 향유해 왔던 힘이다. 그리고 학교제도가 귀족계급의 사람들에 의해서 창안되고 운영되면서 그들의 생활과 무관한 기예적(技藝的)인 혹은 생산적인 활동은 교육의 내용에서 배제되거나 등한시되어 왔다. 반면에, 이론은 이론으로서 가르쳐지고 전달되고 탐구되었다.

그리고 지식의 성격과 그것의 교육적 가치는 지식의 원천과 근거를 밝히는 철학적 탐구, 즉 논리학, 인식론, 의미론 등을 비롯한 논의의 발달과정에서 체계적으로 규명되고 정당화되었으나, 경험의 비이론적(질성적) 차원은 학문적 관심의 일차적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그것의 교육적 가치는 이지적(理知的) 관심의 밖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지식을 다루는 교육활동에서 언급되는 경험도 인식론적 관심 영역 속에서만 이해되었기 때문에, 경험의 총체적 특성과 의미는 교육이론에서 체계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지식은 경험의 총체적 체제에서 분리되고 지식 중심의 교육은 경험의 성장을 이지적 차원에만 한정시켜버렸다.

이와 같이 경험의 총체성으로부터 분리시켜 인식된 이론의 힘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우연적으로 사회적 힘의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도그마를 생산하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 봉사하기도 하였다. 이론은 본래 사물이나 인간의 행위가 지니고 있는 특징을 추상화한 결과의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의 구체적 사물과 영원히 결별한 상태에서 현실적 삶의 과정을 초월해버린 상상의 세계를 “형이상학”이라는 이름 하에서 자유롭게 전개하기도 하였다.

추상적 원리의 논리적 완전성에 기초하여 그것을 순수한 질서의 세계 혹은 완전한 세계로 미화시키거나 신성시함으로써 현실세계의 지배를 위한 도그마를 생산한 것이다. 이론적 경지에서 우리는 실제적 경험의 내용을 고도로 추상화하면 순수하게 형식적인 관념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그 경지에서는 모순과 결함이 없는 완벽한 체제를 형성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다. 이와 같은 완벽성은 불안정하고 변화하는 조건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세계의 “이상적 모습”을 제공한다고 믿어졌으며, 그러한 세계에 대한 선망과 동경은 결국 도그마를 정당화하고 수용하는 의식의 바탕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도그마는 이론이 사물의 이해와 설명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하였고, 이론은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실재 그 자체를 대신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론의 “실체화(reification)”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실체화된 이론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라고 여기게 함으로써 이성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고, 이성은 오직 이러한 이론에만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실체화된 이론은 마음에서 이성이 작용하는 영역을 감성이나 의지나 행동이 작용하는 영역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여기게 된다. 이성의 작용을 의미하는 사고는 오직 이론의 경지에서만 전개되는 것이다. 그 결과, 이론과 무관하거나 그것과 거리가 먼 마음의 작용이나 삶의 과정은 그만큼 비천하며, 덜 자유로우며 수월성을 잃은 것으로 인식되게 하였다.

전통사회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계급적 분화와 유지도 이러한 이론적 내용을 중심으로 실시된 교육의 제도적 운영에 의존하였다. 또한 실체화된 이론은 인간의 경험을 인위적으로 구획하고 교육에 의한 성장의 척도를 이지적 차원으로 일원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사고는 결코 이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악사가 악기를 연주할 때, 공예가가 작품을 만들 때, 축구선수가 공을 찰 때, 농부가 밭을 갈 때, 요리사가 조리를 할 때, 광대가 줄을 탈 때, 정치가가 당파적 갈등을 해결할 때, 그들은 이론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차적으로 고도의 체계적인 사고를 한다.

그들이 언어나 기호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징적 수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물 그 자체의 특징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조직적인 사고, 때로는 매우 정교하고 엄격한 사고에 몰입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사고에 몰입한다는 것은 인간 지력의 활발한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한 지력은 성격상 본질적으로 이론적 사고에서 작용하는 지력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론적 사고에서 이론적 상징들의 의미로서 함의하고 있는 내용도 원천적으로 그러한 사물의 특성들로부터 출발하여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론화된 것일 뿐이다.

이론은 원천적으로 실제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분리된 이론은 경험의 단면만을 생각한 결과적 산물이거나 실제적 사물들의 추상화 과정에서 그 “귀로(歸路)”를 잃어버린 이론이다. 이론이 지니는 실제적인 힘은 그 귀로를 되찾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귀로가 악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작될 때 이론은 횡포의 수단이 되고, 그 귀로가 나태하거나 성급한 사람들에 의해서 환상적으로 제시될 때 이론은 미신이 되며, 그 귀로가 맹목적으로 규정될 때 이론은 우상이 된다.

III. 질성적 상황과 교육적 경험

여기서 오늘의 주제인 “질성적 사고”라는 말은 우선 사물의 질성(quality)과 인간의 질성적 조작과정을 내용으로 하는 사고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질적 특성”이라고 할 때의 “질”의 개념은 “양”에 대립되는 말로서 서술적으로 “종류”, “특징”에 상당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평가적으로 “등급”이나 “품질”의 차이를 암시하는 말로도 쓰인다.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질적 특성은 서술적 의미의 것으로서 사물의 성질, 특징, 속성 등과 같이 사물 자체가 지닌 특성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나 과정이나 구조에 대한 지각 혹은 조작을 통하여 성립시킨(혹은 규정한) 성격, 양식, 형태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질성은 일차적으로 언어나 상징적 수단에 의해서 범주의 내용이 된 대상이기 전에 우리의 지각 혹은 구체적 경험이 “직접적으로” 식별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둥글거나 모나거나 하듯이 모양일 수도 있고, 붉거나 파랗거나와 같이 색갈일 수도 있으며, 달다든가 짜다든가와 같이 맛일 수도 있으며, 딱딱하다든가 무르다든가와 같이 촉감일 수도 있고, 유쾌하다든가 우울하다든가와 같이 기분일 수도 있으며, 보수적이라든가 진보적이라든가와 같이 어떤 경향성일 수도 있다.

이러한 질성들의 종류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써 전부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질성은 우리의 직접적 지각과 상상적 조작에 의해서 무한히 성립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어로써 이름 붙이기 이전의 모든 대상은 질성만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명칭과 개념, 그리고 이론은 사실상 직접적으로 지각 혹은 조작되는 질성이거나 아니면 질성들의 체제가 지닌 특성(그 자체로서 하나의 질성)의 이름이거나 그 표현이다. 언어나 상징적 수단에 의해서 표현되면 질성은 추상화되고 추상화된 질성 혹은 질성들의 체제는 관념적 혹은 상상적 조작의 대상이 된다. 이론은 원천적으로 이러한 대상에 관한 것이다.

교육은 인간의 성장을 겨냥하는 활동이다. 교육적 성장은 이론적 내용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이지적 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지적 성장도 유독 그 자체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적 성장은 오히려 인간의 전면적 성장을 의미한다. 교육적 경험은 사물의 구체적 사태와 특징,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질성적 사고”의 경지에서 출발할 때, 성장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다.

듀이에 의하면, 모든 상황(situation)을 지각하거나 성립시키는 것은 질성에 대한 마음의 작용이다. 여기서의 “상황”이란 우리가 직면하거나 주의하거나 관심을 두는 “장”을 의미한다. (John Dewey, Logic: The Theory of Inquiry, 1938, 66-71) 이러한 의미의 상황은 어느 특정한 것이 분리해서 존재하는 고립된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 부분은 어떤 필요나 목적 혹은 특별한 요청에 의해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이나 주의의 대상이 된 부분이다.

지금 내가 책상 위에 놓인 연필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연필이 상황이며 책상에 주의를 두면 책상이 상황이고, 연구실이 위치한 건물에 주의를 두면 그 건물이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의 주변에는 그것의 환경이 있고 그 상황과 환경은 세계의 한 부분이다. 그 주의의 대상이 연필이든지 책상이든지 혹은 건물이든지 간에 그것이 상황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을 뜻하고, 그 주변의 외계, 환경 혹은 세계로부터 그 대상을 어떤 목적이나 요청에 의해서 잠정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분리시킨 결과이다. 그 분리된 대상, 즉 상황은 그것을 외계, 환경 혹은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하나의 대상 혹은 사태로 지각할 수 있게 하는 그 자체의 특징(질성)을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 특징을 성립시킨 결과이다.

그 특징은 그 상황을 특정한, 즉 고유하고 유일한 대상으로 성립시키며, 그것은 그 상황의 전체에 편재(遍在)해 있다. 바로 그 특징은 대상의 전체에 반드시 골고루 편재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의 관심의 대상을 설정하는 데 기여하고 외계와 분리시키는 데에 작용하므로 그 대상(상황)의 전체에 편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벽시계 하나가 벽에 걸려 있다면, 거기에는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과 같이 시계의 기능을 하는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시계가 되는 것은 아니며, 여러 가지의 보조적인 부분이 함께 하고 있다. 그 시계를 주변의 사물이나 모양으로 분리시켜 하나의 상황(대상)을 성립시키는 요소들은 시계 전체에 강하고 약한 차이는 있지만 거기에 편재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의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가 옮겨간다는 것은 상황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상황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혹은 상상적 세계에서 확장될 수가 있다. 큰 상황 속에는 많은 작은 상황들이 구성요소로서 포함될 수 있다. 큰 상황은 큰 상황대로 그 속의 작은 상황들은 작은 상황대로 각기 하나의 상황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에 “편재된” 질성을 지니게 된다. 그 구성요소가 되는 상황들을 어떤 원리에 의하든지 하나의 큰 상황 속에서 포괄하여 하나의 통일된 상황으로 성립시키는 또 하나의 편재적 질성을 산타야나(Santayana)와 듀이는 “제3의 질성”(tertiary quality)이라고 한다. (위의 책, p. 69)듀이는 하나의 총체적 경험의 단위를 생각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그 경험을 완결된 경험으로 성립시키는 “편재적 질성”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구체적 경험의 총체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편재적 질성”이란,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간에, 다원적인 요소들로써 구성된 것이면서 하나의 인식이나 지각의 내용이 되는 독특한 상황을 만든다면, 그러한 대상에 편재된 특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재적 질성은 구체적 경험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며 직접적인 경험의 내용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편재적 질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호나 언어 속에 담겨질 수도 있고 상상과 사유의 내용이 될 수도 있는 관념적 특징까지를 의미한다. 어느 것이나 경험의 전체, 혹은 지각이나 인식의 내용을 하나의 통일된 상황을 성립시키는 특징, 특질, 형상 등을 의미한다.

우리가 벽화를 벽 그 자체의 일부라고 하지 않고 벽화라고 분리시켜 감상하고 그것에 “벽화”라고 이름을 붙여 언급한다. 그것은 그 벽에 붙은 그림이지만 하나의 벽화로 성립시키는 특별한 질성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벽화의 어느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벽화를 주위의 다른 것들과 구별짓게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벽화의 전체에 편재되어 있는 질성이다. 그 벽화 속에 임금이 왕관을 쓰고 있다면 다시 왕관을 주위의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짓게 하는 질성이 있고, 그 질성은 그 왕관에만 편재되어 있다.

이와 같이 편재적 질성은 주여져 있기도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주어져 있는 온갖 특질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편재적 질성을 지각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편재적 질성을 의도적으로 성립시키거나 창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편재적 질성은 직접적으로 지각될 때 그 본래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기억 속에 둘 수도 있고 이름을 붙여 연상함으로써 그것을 기록하고 대화에서 언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편재적 질성들은 구체적 대상의 세계를 떠나서 상상의 세계에 있게 될 때, 다시 서로 통합되어 그 수준에서 상상과 사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질성은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구체적 특성일 수도 있고, 상상과 사유의 내용이 되는 관념적 자료일 수도 있다. 그것은 조각작품이나 건물과 같이 정태적 구조의 특징일 수도 있고,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나 흐르고 있는 시냇물과 같이 동태적 과정의 특징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것은 감각기관의 도움으로 지각되는 것이지만 추상적인 것은 사고과정에 의해서 의식되고 관념화되고 유지되고 조작된다.

우리는 일상적 생활의 과정에서 이미 수많은 상황들에 익숙해서 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상황들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회에 수많은 구체적 대상을 가리키는 명칭들이 있는 것은 관습적으로 그런 것들을 상황적 대상으로 지각해 온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체적 삶이 이루어지는 세계는 일상적 언어나 이론적 용어로써 표현될 수 없는 상황들이 훨씬 더 많은 세계이다. 비록 표현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표현은 상황 그 자체의 추상적 일면이거나 임의적 혹은 관습적 명명에 불과한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말레시아인을 “아시아인” 속에 포함시킨다. 분명히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말레이시아인이 서양의 백인이나 아프리카의 흑인 속에 함께 있으면 모두 아시아인으로 분류된다. 그것은 “아시아인”이라는 상황의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그 아시아인의 편재적 질성을 그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모임 속에 말레이시아인이 한 사람이라도 섞여 있으면, 얼핏 보기에 식별이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말을 한다든가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한국인의 범주에서 제외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인”이라는 사태에 편재된 질성을 소유하지 않은 부분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세계와의 관계에서 상황을 지각하거나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편재적 질성은 우리의 경험을 “구조화”한다. 주어진 대상의 구조화만이 아니라, 그 질성은 예술가의 창조적 활동에서와 같이 어떤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방법”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화가가 작품을 완성하고자 할 때, 기본적인 구도나 그것에 따라서 전개되는 붓질과 물감의 선택, 공간의 처리, 명암의 분포, 정교한 기법에 의한 부분적인 손질, 그리고 화선지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들을 지배하는 원리”는 바로 그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거기에 편재되어 있어야 할 질성이다. 물론 부분적인 손질들은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본래의 계획을 수정하고 화가는 수시로 발생하는 발상과 기법을 기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상적으로 완성된 작품을 특징짓는, 즉 하나의 유일한 심미적 사태로서 창조되게 하는 질성의 표현에 기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혹은 그것을 보다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편재적 질성은 그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모든 활동들을 규제하는 방법적 규칙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하나의 작품이 예술적 창조물인 것은 편재적 질성의 창조적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작품의 평가는 그 편재적인 질성적 탁월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심포니, 협주곡, 삼중주, 합창 등의 음악적 형식들은 각기 다른 형식과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들은 음악적 활동의 일반적 규칙의 체제로서 그것대로의 편재적 질성을 소유하지만 그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실제적 연주를 통해서이다. 어느 작품이든지 그 자체의 개성을 지니지만 예컨대 베토벤의 작품들은 고유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작품세계를 또한 특징짓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작품도 지금 듣고서 그의 작품인 것을 알아낸다. 그것은 감상자가 그 작품세계에 구현된 특유한 편재적 질성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체도 그 자체는 이론적 체제가 아니다. 인격체는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고 추상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혹은 수시로나 간헐적으로 행동을 통하여 표현되기도 하는 수많은 습관들의 체제가 어떤 특징을 보이고 있을 때, 즉 어떤 편재적 특징을 보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인격체를 특별히 칭찬도 하고 비난도 하며 칭송도 하고 경멸도 한다. 그 평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인격체를 지배하고 있는 편재적 특징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IV. 맺음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질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듀이의 표현을 빌면, “우리가 노력하고 성공하고 실패하면서 사는 세계, 그것은 분명히 질성의 세계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하고 당하고 즐기고 하는 것은 질성에 의해서 그 모습이 결정된 것들이다.” 우리의 사고가 삶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이론적 수단들, 즉 언어나 기호 등의 매체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고란 이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사고가 이론적일 때 체계적이고 자유롭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이란 결국 질성에 의해서 성립되고 원천적으로 질성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론적 매체에 의존하지 않는 사고, 즉 사물의 질성를 직접적으로 지각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이를 조작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사고가 있다. 그 전형적인 것을 예술가의 활동 속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총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교육적 경험을 제공한다거나 마련한다는 것은 방법적 원리를 획득하고 체질화하고 재창조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을 진리의 표현으로서, 규범을 가치의 원리로서, 기술을 생산활동의 규칙으로서, 사상을 신념의 결정체로서, 관습을 행위의 준거로서만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경험은 “방법적 긴장”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교육적 경험은 고립된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방만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동기와 목적을 지니면서 의식적으로 따르는 규칙에 의해서 진행되는 긴장, 즉 방법적 긴장은 본질적으로 질성적 긴장이다.

방법적 원리는 이론의 논리적 특징이나 기술의 행동적 절차와 같이 단일한 차원에서가 아니라, 유의미한 경험이 지니는 체제 속에 하나의 구조로서 내축되어 있는 것이다. 듀이는 이러한 경험의 특징은 “심미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즉, 우리의 활동들을 하나의 경험(혹은 사태)으로 성립시키는 편재적 질성이 지배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지각한다는 의미에서 심미적인 것이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심미적 경험이란 여러 가지 종류의 경험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경험 그 자체의 본질이라고 하였다.(Truth and Method, 1975. p.63)

듀이는 이러한 경험, 적어도 생생한 경험 안에서는 실제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그리고 이지적인 것들을 서로 분리시킬 수가 없고, 어느 한 차원의 특성들로 하여금 다른 차원의 특징들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압도해 버리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정서적 국면은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주며, “이지적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 경험이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이고, “실제적인”이라는 말은 유기체가 그를 둘러싼 사건과 대상과 더불어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 참고문헌 >

<듀이 저작물 시대적 분류 >

Art as Experience (1934) in LW 10.

A Common Faith (1934) in LW 9.

Democracy and Education (1916) in MW 9.

Experience and Education (1938) in LW 13.

Experience and Nature (1925, rev. ed. 1929) in LW 1.

How We Think (1910, rev. ed. 1933) in LW 8.

Human Nature and Conduct (1922) in MW 14.

Individualism Old and New (1930) in LW 5.

Logic: The Theory of Inquiry (1938) in LW 12.

Liberalism and Social Action (1935) in LW 11.

The Public and Its Problems (1927) in LW 2.

The Quest for Certainty (1929) in LW 4.

Reconstruction in Philosophy (1920, rev. ed. 1948) in MW 12.

< 개별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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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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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이돈희

<학력>

서울대학교 교육학 (문학사,  문학석사)

미국 Wayne State University (철학 MA, 교육철학 Ph. D)

< 주요경력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조교수, 부교수, 교수 (1973 ~ 2003)

한국교육학회장 (1998 ~ 2000)

한국교육개발원장 (1995 ~ 1998)

교육부장관 (2000 ~ 2001)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 (2003 ~ 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2006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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