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악재”라는 것은, 문제의 악성적 요소가 활성상태에 있는 한, 민주적 삶 자체가 제대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내용이다. 특히 절차적 민주주의의 개념에서 볼 때, 소극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문제의 세 가지 악재가 작용하는 정도만큼, 민주주의는 부분적으로 결함을 지니거나 그 순수성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궤멸(潰滅)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에듀인뉴스팀

민주주의와 세 가지 절대적 악재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어떤 국가나 조직에서든지 간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기로 말하면, 일인 혹은 소수가 지배하는 독재주의 혹은 비민주적 통치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세 가지의 결정적 악재(惡材)를 감당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운명적 고비”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절대적 악재”라는 것은, 문제의 악성적 요소가 활성상태에 있는 한, 민주적 삶 자체가 제대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내용이다. 특히 절차적 민주주의의 개념에서 볼 때, 소극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문제의 세 가지 악재가 작용하는 정도만큼, 민주주의는 부분적으로 결함을 지니거나 그 순수성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궤멸(潰滅)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미련을 두어 적극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말해 본다면, 민주적 방법 혹은 과정은 악재적 특성이 어느 정도로 순화 혹은 소멸되었느냐--혹은 악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느냐—의 정도에 따라서, 우리는 그만큼 민주주의가 성공한 셈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다. 그러한 악재가 적어도 세 가지 차원의 결정적 조건에서 부실하거나 실패할 경우에 나타날 수 있다. 첫째는 사회적 차원의 상황적 조건이고, 둘째는 인성적 차원의 도덕적 조건이며, 셋째는 이지적 차원의 계몽적 조건이다.

첫째, 사회적 차원의 악재는 “상황적 균열”의 양상을 의미한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유지하고 있는 사회적 상황의 특징이 통합성을 잃은 채로 분열이 지배하며 전체가 혼돈의 양상을 보이는 상태이다. 본래 그 사회가 구성적 특징에서 원천적으로 대외적 폐쇄성을 지니고 있거나, 대내적으로 특히 소통의 활성화가 부족하거나 어려운 상태에 있거나, 통치적 구조의 경직성이 작용하는 환경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적대적 분열, 배타적 독선이나 폐쇄, 강압적 지배, 선동적 회유, 규범적 혼란 등이 사회 혹은 조직을 특징짓고 있는 상황은 민주주의의 유지와 성장을 어렵게 하는 결정적 악재가 된다.

본래 파편처럼 분화된 작은 단위의 집단들 중에는 일종의 민주적 체제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정돈되고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한 경우가 없지 않다. 고대 신라의 화백(和伯)과 같은 제도가 그 사례이다. 많은 정치이론가들이 그랬듯이 민주주의는 소규모의 국가에서 실천이 용이하고 그만큼 성공의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과 같이 대형화된 조직 혹은 국가에서 사회적 통합을 위한 규범의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민주주의의 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루소(Jean J. Rousseau)는 인간이 자연상태에 있을 때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고 하였으나, 홉스(Thomas Hobbes)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가 된다고 하였다. 맹자(孟子)는 본래의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하였으나, 순자(荀子)는 악하다고 하였다. 자연적 본성에 대한 의견은 이와 같이 다를 수 있으나, 민주주의는 사회적 학습을 요구하는 제도적 삶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정체)는 자연적 상태의 인간사회에서 저절로 형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제도는 아니며, 오히려 절차적 세련성을 요구하는 제도이다.

사회적 통합을 위한 구성원의 관습 혹은 전통이 자리잡고 있거나, 통치적 원리에 의한 형식적 혹은 비형식적 학습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불시에 발생한 자연적 재해, 대외적 전쟁, 혹은 대내적 분쟁을 겪는 혼란의 상태에서는 민주적 질서가 자리잡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상황의 안정적 기반은 민주적 질서의 시도와 정착과 발전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에 해당한다. 물론 불안정한 사회 혹은 조직에서 구성원들이 집단적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 세련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불안정성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상황적 균열을 소극적으로 방치하거나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세력은 민주주의에 대한 악성적인 장애물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그러한 불순한 세력에 저항하고 경계하고 비판하는 체계적인 교육을 통하여 일구어 가는 제도의 원리이며 행동의 규범이고 생활의 양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도덕적 차원의 악재는 “인성적 부실”의 수준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원의 악재에서는 구성원의 일반적 자의식이 미성숙한 수준에 있고, 관용, 배려, 개방 등의 공동체적 덕성의 내면화가 부실한 상태에 있으며, 참여, 준법, 정직, 협동 등의 규범에 관련하여 실천적 동기가 해이해진 도덕적 풍토가 지배한다. 민주주의적 삶의 질은 제도적 체제나 절차적 규칙을 익힌 기계적 습관화의 정도를 넘어 도덕적 정조와 인성의 세련성을 향상시키는 만큼 개선된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갈등과 충돌도 없는 평화로운 상태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안정된 질서는 오히려 구성원의 개성이나 존엄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전체주의 혹은 독재체제에서 잘 길들어진 상태의 전형적 모습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구성원들 간의 갈등 혹은 대립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문제의 상황에서 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것은 민주적 조직의 구성원들은 다원주의적 풍토 속에서 개체적 정체감(正體感)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독재사회의 경우처럼 외재적 강제에 의해서 갈등 혹은 대립을 억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공유한 규칙 혹은 방법에 의해서 해결한다.

성숙한 민주주의자들은 타율적으로 관습이나 규칙에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공동체적 규칙의 입법(제정)에 참여하고 제정된 규칙의 준수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인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동료와 연합하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줄 안다. 이러한 협동적 심성은 폐쇄적 이기심에 기초한 이해관계의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방적 연대의식과 세련된 정조(情操)에서 요구되는 덕성의 체질화에 의해서 형성된 인격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공동체로서 요청하는 도덕적 정조와 인성의 세련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 학습의 장을 체계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학습경험의 장은 반드시 특정한 교과나 훈련의 형태로 구성된 특별한 제도적 프로그램을 통하여 제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학교제도와 같이 의도적으로 계획된 모든 학습의 장에서 상시로 유의하고 확인하는 교육적 가치기준으로 의식할 필요가 있다.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고 난폭한 무법자들을 방치한 상태에서, 흔히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반목과 대결의 물리적 제압을 통하여 다수결이라는 경직된 규칙을 강행한 결과는 민주주의적 생활과는 먼 거리에 있는 생활의 양태이다. 이러한 풍토는 바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즉 가장 사악한 민주주의의 적에 해당한다.

셋째, 이지적 차원의 악재는 “우민적 방치”의 상태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이든, 생활규범이든, 활동절차이든, 어느 것으로 이해되든지 간에, 사회나 조직의 구성원들을 자연상태 혹은 방임상태에 두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자체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규칙과 지식, 당면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과정과 판단의 기술 등을 학습하고, 그것을 생활화하는 가치와 안목과 이념에 관한 균형 있는 이해를 요구한다. 바로 그 수준만큼, 민주주의를 탁월하고 정의로운 사회적-정치적 체제로서, 그리고 생활의 양식으로서 지니는 본질적 가치와 도구적 효율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범주의 악재를 해소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실천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이지적 성숙성은 그 발전을 위한 충분조건에 해당한다. 민주주의의 성장적 동력은 기본적으로 구성원의 이지적 차원의 역량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결코 투쟁이나 폭력이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의식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전에는 일반화되지 않았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향유하기 위한 권리를 주장하고, 교육에 의한 계명의 노력이 진행되었지만, 제도적 조건의 쟁취와 사회적 여건의 구축을 위하여 역사적으로 세계의 여러 곳에서 수없이 많은 갈등과 충돌과 분쟁이 있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민주주의의 “복음”으로 인식되었으나, 많은 경우에 일종의 “재앙”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해방 이후의 초기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로 인하여 혼란과 부조리가 생산되는 사회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주적 삶의 경험이 일천하고, 충분한 이해와 학습을 통한 삶의 원리를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제도적 형태를 도입하는 과정은 실제로 반민주적인 행태가 난무하는 시기라고 할 정도의 불안정한 사회를 지속시켜 왔다.

민주적 규칙과 생활이 요구하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반성적 이해와 실천적 습관의 세련성이 도달한 계명의 경지만큼, 사회와 그 구성원들은 민주적 가치를 즐길 수 있고, 자아의 실현과 성장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을 평등하게 보장받는다. 독재사회에서는 폭력 혹은 회유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므로, 결국 구성원(혹은 민중)을 우민상태에 둔 채로 정치적 안정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발전과 성숙된 생활의 개화를 방해하는 의도적 혹은 방만적 우민화(愚民化)는 민주주의의 가장 심각한 악재에 속한다.

[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