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신자유주의는 지구촌에 널리 확산되어 그 위세를 유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 사례들이 지적되고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 비판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신자유주의 경향에 다소의 수정 노력이 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적 추세가 그 방향을 선회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각 분야에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교육계 역시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국가와 사회 체제의 운영방식을 포괄적으로 지배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존재하는 한, 사회의 중요한 구성체의 하나인 교육 분야가 그러한 신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은 당연하다.

교육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특이할 수 있고 교육 분야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신자유주의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가 애매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교육의 세계에 신자유주의적 현상이 상당히 폭넓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교육과 관련지어 신자유주의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겠지만, 교육과 신자유주의 각각이 갖는 기본 원리와 지향 면에서 양자가 상호 친화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교육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분별없이 도입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부정적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여러 개혁론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접근이 교육 분야를 변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편이라는 신념을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교육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접근방식이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을 가지고 있거나 이미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 공감하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어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교육의 세계에 어떤 일이 초래되었고 교육계의 참된 발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배적 힘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신자유주의가 교육 분야에 미치고 있는 부정적 영향이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고 교육세계의 성질과 질서에 부합하는 새로운 개선의 방법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교육

서구사회의 산업혁명 후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해졌으며, 그 경제의 작용 원리는 개인의 자유와 합리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생산의 방식, 생산요소의 구성과 확보, 거래와 이득 창출의 방법 등은 경제적 행위자의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에 맡겨졌으며, 그 행위는 목적과 수단 간의 인과적 상응성을 중시하는 합리성, 즉 웨버(Weber,1947)가 말한 바의 ‘형식적 합리성’에 의존하였다. 근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경제는 이렇게 하여 출현했다.

이러한 경제체제에서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은 최소화된다. 사회와 경제는 자연적 질서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합리적 행위 능력을 가진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가 제약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한 자연의 질서가 방해받지 않을 때 사람들은 최대한의 이익과 욕구의 충족을 이루게 되고, 국가 또한 균형과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 이념에 기초한 이러한 경제체제는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케인즈(John M. Keynes)의 경제이론에 기초하여 대폭 수정되었다. 공공투자와 정부 개입의 확대, 노동관계의 개선, 복지 강화와 조세 부담 증대 등을 통해 경제 회복과 경제의 안정화를 추구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 기조는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제체제도 1970년대에 다시 장기적 경기침체, 높은 실업률, 물가상승, 국가 재무구조 악화, 관료제적 경직성 등 복합적인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을 불러왔다. 이러한 난국에서 1979년 수상에 취임한 대처(Margaret Thatcher)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것은 경제 주체의 자유를 확대하고 시장적 질서를 되살리고자 하는 것으로서, 공공투자 축소, 민영화, 자율화, 개방적 경쟁, 복지 축소, 노동권 제한 등을 기조로 하는 변화의 경향을 뚜렷이 나타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에서도 동시에 나타났는데, 1980년에 대통령이 된 레이건(Ronald Reagan) 역시 미국과 세계경제가 당면한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겠다는 목표 아래 과거의 기조와는 뚜렷이 차이 나는 자유주의적 경제 운용 방식으로의 변화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두 강대국에서 촉발된 이러한 큰 사회적, 경제적 선회는 두 강대국의 영향력만큼이나 큰 힘으로 세계 속으로 확산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자유주의의 재등장이라 말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신자유주의’의 등장을 나타낸다. 소위 대처리즘(Thatcherism)과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에서 보여준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시장의 이념과 운영 원리를 고수한다.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의 전통과 자연의 법칙에 따른 시장의 질서를 내세우는 고전경제학의 전통을 존중하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일차적으로는 경제의 영역에서 뚜렷한 면모를 드러냈지만, 그것은 사실 국가관리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질서, 나아가 세계의 질서를 규정하는 하나의 거대원리로서 그 자리를 유지해가고 있다. 1970년대에 경제를 중심으로 한 실제적 영역에서 표면화된 후, 신자유주의는 오늘날 세계적 담론 형성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으며, 또한 다양한 분야의 정책적 기조를 이루고 있다(Harvey, 2005).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보다 자유주의적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을 갖는 사람들은 주로 옹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사회주의적인 성향이나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사람일수록 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은 각 개인과 지적 유파들에 의해 갈리지만, Hayek(1944)와 Polanyi(1944)가 서로 대척점이 되어 견해를 달리한 것은, 비록 그 시점이 신자유주의가 표면화되기 훨씬 전이었지만, 오늘날 명확하고 적나라한 것으로 다가온다.

Hayek 쪽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는 한때 국가에 의한 계획과 개입이 정당화되었던 오류를 인정하고 정상적인 길로 들어선 마땅한 선택이지만, Polanyi의 입장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낭만적이고 안이한 사조가 다시 발흥한 위험한 선택이다.

Hayek에 동조하는 위치에 서면 Polanyi식의 주장은 국가와 시민을 ‘노예의 상태’로 이끄는 일이 될 수 있고, Polanyi를 지지하는 위치에 서면 Hayek식의 이론은 종국에는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 ‘허구적 유토피아’를 좇는 일이 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교육의 세계에도 예외 없이 들어와 그곳의 질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육이 운영되는 방식과 그것이 성취한 결과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는 가운데 교육의 혁신은 국가적 과제가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지향과 실천 방법, 그리고 그것이 기약하는 성과는 교육의 운영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맴돌던 교육 혁신의 문제가 자율과 경쟁, 성과의 평가와 공개, 고객에 의한 선택 등과 같은 시장적 방식의 적용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신호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장관, 교육관료, 교육기관 운영자는 물론이고, 언론, 시민단체 등과 같은 다양한 교육정책 관여자들에게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것들은 그 긍정적 성과가 뚜렷이 내다보이는 효과적인 혁신의 장치였다. 사실, 그러한 시장적 정책 도구의 사용을 생각해낸 ‘지혜’는 전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사회적 서비스가 갖는 공공성이나 형평성의 문제, 그리고 교육 분야가 강조하는 교육운영의 전문성 문제 등의 ‘방어막’을 차마 허물지 못해 주저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그러한 ‘방어막’을 허무는 일을 정당화해주는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지지를 받으며 등장했고, 그러한 신자유주의는 앞서 말한 바의 혁신 수단들을 과감히 적용할 수 있는 입지를 만들어 줬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급진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교육 분야는 적나라한 시장의 세계는 아니다. 그래서 교육의 운영에 신자유주의적 색채가 가미된다 하더라도 그 정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교육 분야에 신자유주의 방식이 도입된 것은 거의 일반화된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도입의 계기 혹은 동기를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경쟁력을 위한 교육 개선의 수단으로 신자유주의 방식이 ‘강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그중 하나이고, 교육의 발전을 위한 방편으로 교육 분야가 ‘자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양식에 의존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이르자면, 전자는 외적 동인에 의해 교육의 세계에 신자유주의 방식이 적용되는 것이고, 후자는 내적 동인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적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환경 하에서 국가 경쟁력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신자유주의가 조성한 세계화의 핵심에 국경 없는 세계의 시장화가 있는데, 그러한 환경에서 국가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국가 경쟁력은 정부의 핵심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교육은 이러한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변수로 인식되고, 이에 따라 교육은 개혁의 주요 대상이 된다. 정부는 시장적 요소를 가미한 교육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고, 자율 경쟁에 의한 생존과 도태, 평가 강화와 정보 공개, 고객(학생, 학부모)의 선택기회 확대 등의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학교 교육의 성과를 높이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과 영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우리나라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도입이 교육운영체 내부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학교라는 교육조직은 그 성격상 변화의 역동성을 잃은 채 타성에 안주하는 경향을 쉽게 보이는데, 학교의 지체 현상에 대한 비난이 강해질 경우 이러한 조직의 변화를 가능하게 해줄 수단을 찾는 것은 학교 관리자에게 있어 시급한 과제가 된다.

그것은 학교 혹은 그곳의 구성원들이 변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할 촉발기제를 찾는 일이 된다.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사회적 지지를 받으며 두루 채용되는 자율, 경쟁, 고객의 선택, 성과 중시, 평가 강화 등의 방침은 효과적인 촉발장치가 될 수 있다. 그것들이 교육체제의 현상유지적 관성과 학교의 온상 조직적 성격을 흔들어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육 분야는 자체적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접근방식을 도입할 수 있다.

어떤 동기와 계기에 의해서든, 오늘날 교육의 세계에는 신자유주의적 방식이 상당히 널리 도입되어 자리 잡고 있다. 교육의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구체적 현상들을 들어 그것들 각각이 신자유주의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늘날 교육 분야 전개의 여러 양상이 신자유주의의 정신과 운영 방법을 반영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별 정책에 따라 혹은 학교급에 따라(대학을 포함하여) 차이는 있지만, 우리 교육계의 경우에도 신자유주의는 상당히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쟁체제의 도입, 학교 선택기회 확대, 교육수요자 요구 중시, 책무성 강조, 성과기반 평가와 이에 따른 차별적 보상, 무능력 교원 및 교육기관(대학) 퇴출 등의 방식들이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한 접근방식들은 기본적으로 ‘시장적인’ 것들로서 신자유주의의 정신과 실천방법을 반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여파

신자유주의의 원리와 교육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서로 친화적이지 않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교육의 세계에서 일부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무분별하게 적용될 경우 교육분야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그 가능성은 이미 교육 현장에서 증명되고 있고, 신자유주의로 인한 부작용들은 대부분 심각한 것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 신자유주의가 갖는 한계는 주로 신자유주의 방식 혹은 신자유주의적 환경이 학교와 교육의 ‘정상화’를 방해한다는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다.

학교는 두말할 나위 없이 교육활동이 본연의 규범에 맞게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하고, 교육은 마땅히 개별 인간의 정신과 행동양식을 다듬고 심화하는 기능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학교의 운영과 교육활동의 기본적 틀을 규정하는 정책적, 행정적 조치들은 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요구 조건에 잘 맞지 않는 발상과 실행 방법을 흔히 사용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정상적인 학교의 모습과 교육의 실천을 왜곡하거나 방해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신자유주의가 갖는 시장지향성이 교육 분야에 적용될 경우, 비록 그것이 다듬어져 적용된다고 해도, 교육의 세계에는 성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자율에 따른 책임도 ‘성과’로 따지게 되고, 수요자의 선택을 위한 정보도 ‘성과’의 형태로 제시되고, 일한 사람과 기관에 대한 보상과 제재도 ‘성과’에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적 풍조의 교육계에서는 기관과 사람에 대한 평가와 이를 통한 비교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모든 경향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객관성 중시와 평가 가능성 및 증거 편의성의 중시다.

이럴 경우, 교육 분야에 양적 측정이 빈번해지고, 양화된 지수들이 많은 것들의 좋고 나쁨과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과 증거가 된다.

신자유주의적 교육운영으로 인한 이런 사태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수의 지배’라고 말한 것(손준종, 2012)은 매우 적절해보인다. 가시성과 객관성을 보장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수’가 지배적 힘을 행사할 경우, 그것은 학교와 교육행위의 본 모습을 지키는 데 심각한 장애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교육 분야에 있어서 신자유주의 추세는 흔히 책무성 강조를 동반하게 되는데, 책무성의 강조는 위와 같은 부정적 현상들을 유발하고 심화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책무성의 유형은 여러 가지로 개념화되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 맥락에서 강조되는 책무성은 대개 학생, 학부모, 시민에 대해 갖는 학교와 교원의 교육이행 의무 차원의 책무성이다.

학교와 교육자는 학습자와 시민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하는 일이 주로 학교와 교육자에 대한 평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중시되는 것은 교육의 ‘결과’이고, 그 ‘결과’는 객관성과 해독(解讀)의 용이성이 확보되는 방식으로 평가된다. 그러한 방식의 평가가 양적 측정 방법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가 수치화되어 제시되는 경향을 보이게 될 것임은 당연하다.

교육 분야에 있어서 신자유주의 추세가 초래한 특징적 현상이 이렇게 결과 중시와 ‘수의 지배’로 나타날 경우, 그것이 가져오는 파급적 영향은 간단하지 않다.

교육에 있어서 결과는 물론 습의 기회를 가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진다. 학생들은 더 나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신과 삶의 방식을 다듬고 확장시킬 기회를 누릴 수 없게 되고, 교사들은 교
육자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행복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러할 때, 그런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학교라는 교육조직이 바람직한 모습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학교란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인간화된 조직이어야 하고,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조직이어야 한다. 교육이 지극히 인간지향적이면서 인간의존적이라는 점에 비추어보더라고 이 점은 분명하다.

상호간의 믿음과 배려가 그곳의 삶의 토대를 이뤄야 하고, 상호 의존과 협동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방식이 동반하는 과다한 경쟁과 평가, 책무성 강조, 차별적 보상 등은 학교조직이 지녀야 하는 이러한 속성과 미덕들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남겨진 과제

신자유주의로 말미암아 교육의 세계에 상당한 변화가 왔지만, 그중 많은 것들은 우리가 환영할 만한 바람직한 변화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방식이 현상유지 문화와 타성에 젖은 교육 분야에 변화의 계기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초래된 변화들 중 다수가 학교와 교육이 보존하거나 회복해야 할 것들과 충돌하고 있다.

교육의 세계는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바른 변화여야 한다. 교육의 세계의 변화를 추진함에 있어 ‘흔들림 없는 기본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변화가 학교와 교육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목적’을 향해 ‘정상적인 방법’으로 발전해갈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방식에 의한 교육세계의 변화는 이 원칙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육의 세계가 의존해야 할 규범과 원리가 신자유주의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한 결과는 필연적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방식에 의한 변화가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는 그러한 접근방법에 대한 반성과 함께 대안적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

대안을 모색함에 있어,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 하에 제기된 교육(혹은 학교) 발전의 지속가능성 문제(Hargreaves & Fink, 2006; Davies(ed.), 2007; 허병기, 2014)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분야에서 추진되는 변화나 개혁의 목표와 방법 그리고 그 결과가 깊고 의미 있는 학습, 인간애와 보살핌, 믿음과 협동, 생명력과 활기, 만족과 자존감 등과 배치된다면, 교육세계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방식의 변화 추구는 머지않아 동력을 잃기 쉬우며, 변화를 이어간다 해도 그 변화는 의미 있는 성과와는 거리가 먼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러한 교육세계의 변화는 지속가능한 교육발전이 아니다. 교육의 세계가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을 가도록하기 위해서는 다급하고 무분별한 변화를 꾀해서는 안 된다.

교육의 세계에 뜻있는 변화, 즉 참된 발전을 가져오는 변화는 무엇보다도 ‘좋은 학교 만들기’에 초점을 맞춰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학교 만들기’는 교육발전의 시작이자 끝이다. 오늘의 학교의 실상을 두고 볼 때, 좋은 학교를 만드는 데 있어서 바른 의미의 교육력과 인간화의 정신이 특별히 중요한 준거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학교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신념의 형성을 중시하는 문화적 접근(Deal & Peterson, 1999)이나 가치와 덕목에 기초한 도덕적인 학교 리더십(Sergiovanni, 1992) 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빠른 가시적 변화나 손에 잡히는 목표의 효율적 달성이 아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교육이라는 특수한 인간행위와 학교라는 특별한 조직이 지녀야 할 성질을 해치지 않고 지켜내면서 발전의 변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더 많은 시행착오가 일어나고 더 긴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교육의 세계는 이제 ‘정상적인 발전’의 길을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