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도 되고, 투자도 되고

교육은 투자인가, 소비인가? 내가 이번 칼럼의 주제를 이렇게 잡은 이유는 이에 대한 착각이 많기 때문이다. 교육이 투자여도 좋고, 소비여도 좋지만 최소한 착각은 하지 않아야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안타깝게도 교육을 소비하고 있음에도 투자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 느낌을 여러 곳으로부터 받아왔다. 그래서 언젠가 이 주제로 글을 한번 써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교육을 통해서 피교육자의 삶을 낫게 만들 수 있을 때 투자라고 볼 수 있다. 대학을 나와서 더 보수가 좋은 직장을 잡는다면 대학교육은 투자일 것이다. 소득이 늘지는 않더라도 대학 다닌 덕분에 교양이 풍부해져서 앞으로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면 대학교육은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이 항상 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 넣어놨더니 술이나 마시고 다니며 허송세월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학교육은 투자가 아니라 소비가 된다. 돈을 쓰는 일에 불과하다.

그럼 우리의 교육은 투자인가, 소비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자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투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투자일 수도 있고 소비일 수도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교육이 소비도 되고 투자도 될 수 있음이 드러난다.

나의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대학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돈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1975년부터의 4년 동안 등록금은 꼬박꼬박 냈지만 배운 게 없었다. 교수님들이 가르치긴 했지만 내가 배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연애나 하며 무위도식한 4년이었다. 그 시절에 했던 대부분의 일들은 도통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학교육은 나에게 투자가 아니고, 소비였다. 아니 어쩌면 제대로 된 소비조차도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고등학교와 유학 때의 시간들은 상당히 ‘투자적’이었다. 고등학교때까지 배운 한자와 고문(古文)은 지금도 옛날 책을 볼 때에 유용하게 쓰인다. 정통종합영어로 익힌 영어단어와 문법은 여전히 내 영어 실력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수학시간에 배운 방정식은 복잡한 일상의 문제를 푸는 데에 도움을 준다.

정말 생산적이고 ‘투자적’이었던 교육은 경제학 박사를 받기 위해 전세금을 털어서 나섰던 미국 유학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때 경험했던 몰입 상태가 그 후의 삶에 유용했다. 나는 그 4년 동안 혼신의 힘을 쏟아 공부했고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그 성취감이 큰 자산이 되었다.

당초 유학의 목적이었던 경제학 지식과 논리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학위를 받은 후에도 계속 새로운 지식들을 익혔고 그것이 내 삶의 더욱 큰 부분을 차지해왔다.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소득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난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삼성그룹에 입사했었는데 만약 대학원을 가지 않고 계속 삼성에 다녔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최소한 그때 같이 입사를 했던 동기들을 보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학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투자였다. 그것으로 인해서 나의 인생이 훨씬 더 자신 있고 재미있어졌기 때문이다.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이 인생의 가치는 아니지 않은가. 교육이 그 후의 인생을 더욱 가치있게 만든다면 그 교육은 투자라고 평가 받을만하다. 나의 유학생활은 훌륭한 투자였다.

나의 부모님은 나의 미래를 위해서 대학 때까지 투자를 해주셨다. 그 중에서 그 절정인 대학생활은 결과적으로 투자가 아니라 소비가 되어 버렸다. 반면 내가 내 돈을 지출해가며 모험을 한 유학 생활은 투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교육이 얼마든지 소비가 될 수 있음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교육에 ‘투자’할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실제로는 소비인데 투자인줄 알고 귀한 재원을 지출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져왔다.

아프리카 빈국들에 대한 교육 투자의 성과

1960년대 이후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교육의 확대였다. 교육을 통해서 읽고 쓰는 능력, 셈하는 능력, 규칙 준수 습관 등을 가르치면 피교육자의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고, 그 결과 소득도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교육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대이기도 하다.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앙골라, 모잠비크, 가나, 잠비아, 마다가스카르, 수단, 세네갈 등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했다. 그 결과 (최소한 외형적으로 평가한) 교육 자본(교육 연수 또는 교육 시간)은 급속하게 증가했다. 적령기 아동의 100%가 초등학교를 마치게 된 나라도 많이 생겼다. 그 정도 교육에 투자를 했으면 마땅히 아프리카 사람들의 생산성이 높아져 가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실제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경제성장은 시작되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투자라고 생각하고 교육에 원조자금을 지출했는데, 결과는 투자는커녕 소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냥 돈을 쓰고 끝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월드뱅크에서 이 분야에 천착해 온 월리엄 이스털 리가 『성장, 그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답은 이렇다. 그 나라들에는 지식을 익혀봤자 쓸 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재자에게 뇌물을 줘야 겨우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지식이란 어떻게 뇌물을 잘 줄 것인지, 어떻게 뇌물을 지능적으로 받을 것인가를 궁리하는 데에 쓰일 뿐 생산적인 용도로 쓰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아무리 교육을 시키더라도 돈만 들어갈 뿐 사회가 나아지지 않는다. 교육은 그저 사치스러운 소비행위가 될 뿐이다.

한국의 교육은 투자인가, 소비인가?

한국인은 교육에 많은 지출을 해왔고 지난 70년간 그 지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대학진학률은 교육에 대한 지출의 크기를 대변해준다. 대학 등록금의 액수가 크기도 하려니와 더욱 큰 부담은 대학 4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엄청난 비용이다. 그 시간 동안 취업을 해서 일을 했다
면 상당한 소득을 벌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을 포기하며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 액수를 계산하지는 않았지만 그 금액은 막대할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왔다. 1970년 28.6%이던 대학진학률은 2008년에는 83.8%로 높아졌다. 옛날에는 돈 있는 집 아이들만 가던 대학을 이제는 누구나 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것을 위해 부모들은 막대한 등록금을 지출하고 있으며 당사자인 청년들 역시 벌 수 있는 돈을 포기해가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렇게 대학에 많이 진학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투자이려면 교육 연수(年數)가 늘수록 소득도 늘어야 한다. 물론 그 기간 동안 한국의 소득수준은 높아져왔다. 하지만 그것이 대학에 보낸 때문인지 아니면 대학을 나오든 안 나오든 직장에 들어가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내 친구들 중에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취직해서 돈을 번 친구들이 여럿있다. 그 친구들도 대학을 다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점장까지 마치고 정년퇴임들을 했다. 직장 생활을 위해 대학교육이 굳이 필요한지 의심하게 만드는 경험이다. 물론 그 친구들도 대부분 직장을 다니며 야간대학을 다녀 대학졸업장을 취득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낮의 시간을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굳이 대학졸업장이 필요하다면 상고를 나온 내 친구들처럼 해도 안 될 것이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려는 아이들을 찾기 어려운 것은 부모들에게 자식 대학 보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 교육을 통해 인생을 바로 보는 눈이 성숙해지기는 하는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학을 나와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기대만 더욱 높아지고 불만만 더 늘어나는 것 아닌가. ‘헬지옥’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는 것도 어쩌면 늘어난 교육과 관계된 것은 아닐까?

교육에 대한 지출이 늘어나는 만큼 그 교육이 투자의 성격을 갖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투자일까.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면 이렇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듯한 사람, 남에게 손을 벌리기보다 내가 벌어서 남을 도와주려고 생각하는 사람, 끊임없이 노력해서 생산성을 높이려는 사람,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한다. 교육이 이런 사람을 길러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투자의 성격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위도식하거나 불평불만만 늘어놓은 사람들을 걸러낸다면 교육은 더 이상 투자가 아니라 소비이고 낭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