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라는 가벼운 세계

앞으로 다룰 주제는 ‘표현과 추상’입니다. 현대미술의 핵심키워드지요. 표현과 추상이라니... 좀 무섭게 생겼네요. 하지만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녀석들입니다. 그 전에 잠깐 워밍업을 하겠습니다. 가볍게 ‘팝아트’부터 시작하지요. 그림을 보겠습니다.

LP음반 겉면에 인쇄된 바나나 그림. 유명한 앤디 워홀의 작품입니다. ‘팝아트의 거장,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허문 지존’이라는 찬사를 받는 작가지요. 팝아트는 Popular Art(대중예술)의 줄임말입니다. 1960년대 미국 뉴욕에서 탄생했습니다. 왜 생겨났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일단 패스하겠습니다. 원래 그림은 이렇습니다.

‘벨벳언더그라운드’라는 록그룹의 데뷔음반. 지독한 유행성 독감처럼 히피가 휩쓸던 시대에 비트(Beat)의 정신을 지키려 애쓴 밴드입니다. 히피는 잘 아시다시피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반(反)문화’를 주장하던 청년들이지요. ‘현대판 집시’로 알려진 ‘껄렁’한 녀석들입니다. 히피이전에는 ‘비트(Beat)’라는 족속이 있었는데요. 1950년대 중반에 뉴욕일대를 어슬렁대던 불량서클로, 슬로건은 “우리는 미들클래스(중산층)의 병 맛 가치를 조롱하고 비웃는다!”였습니다. 뭔가 그럴 듯해 보입니다만, 한마디로 그냥 ‘반사회적 집단’입니다.

불온사상에 흠뻑 찌든 이들 철부지 가운데 한 무명밴드를 천하의 앤디 워홀이 딱, 점찍었습니다. 1964년에 결성된 이 밴드는 당대 강호를 평정한 천재 ‘전위예술가’ 앤디 워홀의 총지휘아래 1967년 첫 앨범을 냅니다. 아까 그 앨범입니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완전 명반으로 손꼽힙니다. 웹에서 찾아보니, “비트의 정신을 완벽히 포착했고, (얼치기)히피들의 순진무구한 이상향을 비아냥거리며, 어설픈 현실참여가 아닌 진정한 도피를 꿈꿨다”고 나옵니다. 뭔 소린지는 저도 모릅니다.

꼭 실제 바나나처럼 꼭지부분부터 껍질을 벗기게 만들었습니다. “여기를 살짝 벗겨서 보세요.”라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놓았지요(위에 자료사진에는 인쇄글씨가 작아서 잘 안보임). 시키는 대로 음반을 사서 벗겨보면 이런 그림이 나옵니다.

딱 봐도 아시겠지요? 상당히 음란합니다. 지금 봐도 그러한데 50년 전엔 반응이 어땠을지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표지그림 아래 핑크빛 바나나 그림이 따로 들어있는, 저 음반의 오리지널 버전을 혹시 가지고 계시다면 거의 로또입니다. 경매컬렉션 세계에서 매우 희귀한 물건으로 대접 받습니다. 보통 ‘바나나앨범’이라고 부르는데요. 얼마 안가 곧 이렇게 바뀝니다.

앨범타이틀은 <밸벳과 니코(Velvet underground & nico)>. 니코는, 독일태생의 여배우이자 가수입니다. 이미 한번 써먹은 이미지를 교묘히 이용해 흥행을 노렸습니다. 프로듀싱을 맡은 워홀의 아이디어였지요. 음반에 담긴 수록곡들은 솔직히 참기 어렵습니다. 온통 마약과 동성애, 변태 성애이야기들뿐입니다. 

1967년이라면... 이견 없이 ‘불세출의 명반’으로 통하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와 같은 해에 발매되었군요. 벨벳언더그라운드의 리더 ‘루 리드’는 비틀즈의 이 앨범을 가리켜, “들으면 들을수록 역겨움을 준다”고 혹평했습니다. 요즘 애들 말로 ‘간지 작살’입니다. ‘비트족의 정수’를 간직했다는 밴드의 리더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돼야겠지요.

<타임>지의 평가(1993)를 들어볼까요. “대중음악의 모든 대안적 장르가 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여기서 ‘대중음악’을 대중예술로 바꿔도 크게 하자는 없습니다. 앤디 워홀과 이들이 그 뒤로도 오랫동안 같이 작업을 한 건 아닙니다. 생각만큼 크게 재미를 못봐서 그렇습니다. 팝아트의 거장께서는, 자신이 손댄 음반기획이 신통치 않자, 얼른 다른 먹잇감을 찾아다니는데, 이 때 그의 눈에 띈 인물이 바로 ‘검은 피카소’ 바스키아입니다.

워홀이 뉴욕의 유명화랑 ‘싸장님’들과 식사를 즐기는 도중이었습니다. 가난한 흑인청년 한명이 식당 안에서 뭔가를 열심히 팔고 다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됩니다.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엽서였지요. 그린 이의 반짝이는 눈빛만큼이나 천재성이 번뜩이는 그림! ‘잘난 남자 사랑하기’ 분야의 대가인 워홀님께서 그냥 지나칠 리는 당연히 없었겠지요?

그길로 곧장 ‘길거리캐스팅’이 이루어졌습니다. 워홀의 유명세는 7, 80년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자리를 잡는데, 작품세계는 사실 1960년대 이후 별로라는 게 중론입니다. 명성과 작품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논리적으로도 그렇고요.

그가 즐겨 제작한 ‘캠벨수프 캔 3종 세트’입니다. 바스키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워홀은, “스타이긴 하나 여전히 얄팍하고 팔리는 그림만 그린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뻔한 광고이미지나 유명인의 초상화나 우려먹는, 한물 간 팝아티스트로 서서히 저물어가던 중이었지요. 

이런 워홀한테 바스키아는 ‘인생 2막’에 막판뒤집기를 이뤄줄 구세주였습니다. 새로운 영감과 에너지의 원천이었지요. 작가들은 대개 새로운 연인(戀人)을 만나면 확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솟아나는 맑은 샘물처럼, 힘차게 날아오르는 매처럼 싱싱한 바스키아를 만난 ‘늙다리’ 워홀은, 바스키아와 공동 작업을 하며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택시/브로드웨이45번가(Taxi 45th/Broadway’(1984-85)>로, 워홀과 바스키아의 합작품입니다. 이름 없는 홈리스 낙서화가였던 바스키아는 워홀을 만나 일약 스타덤으로 껑충 도약합니다. 그런 다음엔 물 만난 고기처럼 뉴욕화단을 마구 휘저으며 천재성을 한껏 터뜨립니다.

그의 등장 이전까지 흑인예술가 출신의 (대중)스타는 단한명도 없었습니다. 야구, 농구, 권투, 육상처럼 운동 쪽은 유명한 선수가 꽤 있었지요. ‘헝그리 복서’란 말도 있듯이 스포츠 종목은 배가 고파도 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배가 고프면 오히려 더 잘 되기도 하지만, 예술분야는 단순히 ‘고픈 배’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곳은 일단 ‘얼굴 허연 인간’들의 놀음판입니다. 문화예술계에 가로놓인 인종차별이란 절벽은, 흑인작가들한테는 죽어야만 건너는 ‘저승의 강’만큼이나 아득했습니다. 서구인(특히 미국인)들이 입만 열면 자랑하는 ‘자유로운 창작 풍토’의 실상은, 알고보면 이처럼 지나가던 개가 하품을 할 정도로 한심한 면이 많습니다. 아,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다음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