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고3 교과를 맡으며 단단히 다짐한 것이 있다. 대개 고3이 되면 멀쩡한 교과서를 제쳐놓고 수능 문제풀이부터 시작한다. 부교재도 이미 정해졌다. 수능시험에 EBS 연계율이 70%를 상회하며 EBS 교재를 쓰는 것은 정석이 됐다. 이런 상황을 이번만큼은 바꿔보기로 했다.

4월 중간고사까지는 교과서를 중심으로 재미있게 수업을 했다. 강의 내용을 재구성해 학습지를 만들고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서술해 발표하도록 유도하고 그 과정을 꼼꼼히 관찰하여 학생부 기록으로 연결했다. 사실 수능을 생각한다면 문제풀이식 수업이 맞지만 최근의 입시(학생부 종합전형)를 감안한다면 수능만 고집할 수는 없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답안지를 확인하던 중, 한 아이가 수업방식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요구했다. “선생님, 교과서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제는 EBS 교재로 진행하면 어떨까요?”라고 물어왔는데, 다른 아이들의 생각도 그럴까 하여 교과서를 활용한 수업 방식과 수능 중심의 문제풀이식 수업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서운하지만 다수가 문제풀이식 수업을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교과서를 내려놓기로 했다.

올해(2017학년도) 수시모집은 4년제 대학 정원의 69.9%에 이를 정도로 그 비중이 매우 높다. 게다가 학생부를 활용하는 전형(교과, 종합)은 대입 정원의 63.8%에 이를 정도로 대세로 자리잡았다. 한 학급의 학생이 35명이라면 20명 정도는 수시로 진학하고 정시는 15명 이내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면 수능이 필요하지 않은 학생이 확률적으로 학급에 절반 이상이지만 수시에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그 불안감으로 수능에 올인할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 교육은 서열화된 점수에 길들여져 있다. 점수를 얻기 위해서라면 주입식, 암기식 교육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렇게 박제된 지식을 달달 외워 시험을 치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얗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2018학년도는 수시 비중이 73.7%로 올해보다 4% 가까이 늘어났다. 학생부 종합전형의 비중도 덩달아 높아지며 평가의 신뢰성과 사교육 유발을 명분으로 수시의 핵심인 학생부종합전형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줄을 잇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학생부종합전형은 교과서에 바탕을 둔 학생중심수업을 지향한다. 학생부종합전형에 흠집을 내려는 분들께 묻는다. 비록 고3이지만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만에 멀쩡한 교과서를 내려놓고 오로지 점수따기 위해 주입식, 암기식 문제풀이 수업을 하는 고3 교실의 현실을 알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