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불운, 우연

“요절과 예술은 어느 정도 상관(相關)이 있을까요?”

‘천재 게이들’을 읽었다며 지인이 물어왔습니다. ‘요절’은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요절(夭折 : 일찍 죽을 요, 꺾다 절). 명사. 젊은 나이에 죽음.”

바스키아와 헤링은 둘 다 일찍 죽었습니다. 28살과 32살. 남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표현하긴 뭣하지만, 흥미로운 주제라 생각됩니다. 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볼까 합니다. 앞으로 다루려는 ‘표현과 추상’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무관하지 않은지’는 나중에 각자 가늠해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2가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젊다는 기준과 사망한 방식. 

아, 그 전에 신상발언을 좀 하겠습니다. 첫 시간에 자기소개를 통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석, 박사학위가 없습니다. (비교적 덜 명문대에 속하는)미술학교를 10년 만에 겨우 나왔습니다.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노상 술 마시고 노는 바람에 성적이 (워낙)나빠 졸업하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하해와 같은 은혜가 없었다면 대체 어찌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말인 즉은, 주제를 제대로 다루기가 솔직히 어렵다는 소리입니다. 학생 때부터 책이라곤 꼼꼼히 읽은 바가 없으니 정공법은 처음부터 되지가 않겠지요?(혹시 여러분 중에 적임자가 계시면 부디 꼭 좀 부탁드립니다) 하여 저는 일단 제 방식대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아쉬운 소리는 이쯤하고, 아까 제가 제시한 2가지 기준으로 다시 돌아가지요. 간략하게 나타내보겠습니다.

ㄱ. 젊다는 기준 : 40세 이전. ㄴ. 사망한 방식 : 자살, 타살, 자연사를 모두 포함.

‘40세 이전’이라는 기준은 제멋대로 정했습니다. 모든 죽음을 위 3가지(자살, 타살, 자연사)로 분류했고요. 자연사 안에 사고사, 병사를 포함시켰습니다. 사망의 모든 유형을 다 넣은 건 극적요소 제거차원입니다. 불필요한 감상에 사로잡히면 안 되니까요. 이제 그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용조(1916∼1944)가 그린 <해경(유화, 제작연도미상, 1930년대로 추정)>. 우리나라 서양화단(畫壇) 최초의 요절화가가 아닐까 여깁니다. 병사(病死)했습니다. 웹에서 찾은 관련 자료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홀어머니 밑서 가난하고 고독한 소년시절을 보냄. 17세에 선전(鮮展) 첫 입선, 천재적 기량을 입증함. 일본유학 중 얻은 결핵으로 28세 요절.”

아까처럼 제목은 <해경(유화)>, 바닷가풍경이란 뜻입니다. 제작연도는 여전히 미상이나 40년대로 추정합니다. 어딘가 원숙한 느낌이 풍기지요? 만약 20대 초반에 그린 거라면 상당한 필력입니다. 천재성이 슬쩍 엿보이는군요. 색감이나 붓 터치가 꼭 요즘 그림 같습니다. 70년 전이라니 믿기 어렵군요. 한 점 더 보실까요.

제목은 <낙동강>. 자료사진이 약간 흐리군요. 인상파와 야수파의 흔적이 보입니다. 그림공부를 하러 일본에 갔을 때 배웠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만 더 보시지요.

<어선(1938)>이란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수채화입니다. 관련 자료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전략)...‘어선’은 수평선 너머 훤히 트인 하늘과 바다 그리고 약간의 대각선을 이룬 부두로 3등분된 수평구도의 작품이다. 소재는 물론 밝은 채도의 적절한 배합, 간결한 붓질은 경쾌한 바다의 풍경을 특징 있게 표현하고 있다.

김용조가 바다 풍경을 즐겨 택한 것은 한 사람의 작가로 살아남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가난과 병든 몸이란 현실적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정신적인 해방감을 갖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인성의 예술적 성과를 바짝 뒤쫓던 김용조, 그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로 젊음을 안고 떠나가 버렸다. <아트코리아, ‘권원순의 미술의 눈으로’ 일곱 번째 이야기, 고독과 가난의 천재작가 김용조, 입력 : 2007-11-05 09:26:21”

이번엔 이인성(1912~1950). 서른여덟에 사망. 김용조와 비슷한 나이에 환경도 비슷합니다만, 후대의 평가는 훨씬 낫습니다. “한국근대미술의 대표화가로, 토속적인 색조미를 통해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미적으로 승화시켰다”는 게 중론입니다.

<가을 어느 날(1934)>. 과연 ‘한국의 고갱’으로 부를만합니다. 김용조의 고향4년 선배로, 화단에 먼저 진출해 자극을 많이 준 걸로 기록에 나옵니다. 이른바 ‘라이벌 의식’이란 거지요. 이 분은 원체 유명하니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갑니다. 한국동란 와중에 총기오발사고로 가셨군요(좀 이상합니다만 어쨌거나). 이런 어록을 남겼습니다.

“40세 이전에 화업(畫業)을 다 이루면 천재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6, 70이 되어 대체 뭘 할 건가?” 스스로한테 그처럼 물어놓고는 답을 내리기가 곤란해져서 먼저 가신 건 설마, 아니겠지요?

<자화상>. 최욱경(1940-1985). 여성입니다. 앞서 선배화가들이 세상 뜰 무렵에 서울서 태어났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두 양반과 달리 꽤 유복한 환경이었습니다. 10살 때부터 김기창, 김흥수, 정창섭 등 당대고수들한테 개인지도를 받았습니다. 서울예고와 서울대(미대)를 거쳐 1963년 미국유학. 1965년 석사과정을 마친 다음, 장학금을 받고 1년 동안 뉴욕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한마디로 잘 나갔습니다.

<무제(종이 위에 아크릴화, 92x240cm, 1969)>. ‘지성적 화가로, 탁월한 미술이론과 뚜렷한 자기세계를 가졌으며, 논리와 감성을 동시에 활용하는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짧게 이력을 볼까요. 1972년 제8회 파리비엔날레 출품, 1981년 제16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초대출품. 1978년에 영구 귀국해 영남대에서 재직하다 다시 덕성여대로 자리를 옮김(웹 자료). “재기 넘치는 교수로 학생들한테 인기가 높았다”네요.

다부진 표정입니다. 체구는 작고 여리지만 강단(剛斷)이 있어 보이는군요. 1985년에 어이없게도 음주상태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사망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니 “아뜨리에 무무당(無無堂)에는 주인이 죽은 줄도 모르고, 틀어놓은 음반이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고 나옵니다.

마흔다섯 살. 40이 넘은 나이라, 요절로 보기는 좀 그렇지만 소개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왕성한 활동을 펼쳤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아까운 여성화가’라면 자연스레 나혜석이 떠오릅니다만, 이분은 50이 넘어 돌아가셨고, 나중에 따로 다룰 분이라 뺐습니다. 최욱경 교수와 저는 개인적인 인연도 좀 있습니다. 이 또한 다음에 말씀 드리지요.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지네요. 뜻밖입니다. 그럼, 다음시간으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