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형 학교와 퀸틸리아누스의 질문
미래형 학교와 퀸틸리아누스의 질문
  • 서혜정 기자
  • 승인 2016.05.3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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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가정에 있는가, 학교에 있는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전 교육부장관

학교라는 공적인 교육기관이 생기게 된 것은 문자의 발명과 지식의 축적이 시작된 때부터이다. 애초에 문자의 사용과 지식의 학습은 나라를 통치하는 왕실의 운영이나 종교적 의식을 집행하는 사원의 활동 등에서 요구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특히 정치적 지배층이나 종교적 수도자들은 지식의 사용과 통치의 기술을 익히기 위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를 필요로 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교제도는 고대로부터 발달해 왔지만, 인간의 교육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전문적 제도라기보다는 일종의 보조적 장치로 인식된 편이었다. 교육은 지식의 학습만이 아니라 인성적-신체적 발달에 관한 관심을 포괄하는 영역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관에 따라, 자녀에 대한 교육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정과 학교의 어느 편에 있어야 하는가의 질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질문을 일컬어 교육학자들은 흔히 ‘퀸틸리아누스의 질문’이라고 한다.

고대의 제정 로마시대의 유명한 교육자였던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 A.D. 35~95)가 당시의 지도층에게 요구되던 변론술(辯論術)을 교육하기 위하여 쓴 책인 《변론원리(Institutio Oratoria)》에서 제기한 질문이다. 즉, 자식이 자라서 제대로 공부를 가르쳐야 할 나이가 되면, 이 아이를 가정이 맡아서 교육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공공의 교육기관인 학교에 보내어 거기서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 옳은가? (1권 2장) 학교에 아이를 맡기면, 교사들이 어떤 편견을 주입하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온당치 못한 것을 가르칠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서 교육하면 도덕적 부패가 없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지식의 학습과 인성의 발달에 대하여 가정과 학교가 각기 다른 독특한 기능과 역할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어느 하나로써 교육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 셈이다. 물론 이때의 가정이란 지배계층의 가정을 의미하고, 학교도 그 자녀들을 교육하는 학교를 의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다.

퀸틸리아누스의 질문과 관련하여, 영국의 존 로크(John Locke, 1632~1904)는 자녀의 교육은 가정이 맡아야 한다고 하고,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학교가 맡아야 한다고 하였다.

로크가 자녀의 교육을 학교에다 맡기지 않으려고 한 이유는 젊은이들의 도덕성 교육을 학교가 바르게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었다. 물론, 로크는 자식을 가정에서 교육하면 나약한 아이로 자라게 할 가능성이 높고, 학교에서 교육하면 다소 강인한 성격을 형성하기에 유리하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과의 지식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가정에서보다는 학교의 교사가 전문적으로 더욱 잘 지도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학교에 보내면 아버지가 자식의 도덕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철저히 감시할 수가 없으며, 한번 잃어버린 인성의 바탕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의 상황과는 많은 점에서는 다르지만, 인성의 교육을 위한 가정의 기능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로크와는 달리 ‘자식은 학교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가정에서 교육하게 되면 가족의 결점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식에게 그대로 심게 된다는 것이다. 학교는 동년배들과 생활하면서 모방도 하고 경쟁도 하는 곳이며,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생활의 규칙을 정하고 이를 준수하는 경험을 한다. 말하자면, 입법과 준법의 규칙을 학습하고 시민정신에 요구되는 기본적인 습관을 형성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아동은 어릴 때부터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자유에 대한 제약이 가해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쪽에도 완전히 맡길 수는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비교적 단순하게 말해서, 지식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좋고 인성은 가정에서 돌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성의 교육을 지식의 교육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면, 로크의 경우처럼 자식을 학교에만 전적으로 맡기기가 어렵다. 그러나 가정도 인성의 교육을 위한 온전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보면, 칸트의 경우처럼 오히려 학교도 인성의 교육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가끔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에서 전적으로 교육을 도맡으려는 수가 조금씩 증가하는 경향도 있다. 이러한 부모들은 인성교육만이 아니라 지식교육 그 자체를 위해서도 학교보다 가정이 더욱 유리하다고 여기는 셈이다. 지식은 학교에서, 그리고 인성은 가정에서 교육하는 것이라는 원칙으로 단순화하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제는 퀸틸리아누스의 질문도, 젊은이들의 교육을 가정과 학교의 어느 쪽이 맡을 것인가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가정과 학교는 그 역할을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하는가로 바꾸어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오늘의 가정이 전통사회의 가정만큼 교육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지 않다는데 있다. 교육적 관점에서 보면, 대가족제도가 붕괴되고 핵가족이 발달하면서 전통적 가족구조와 그 기능이 퇴조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식교육 뿐만 아니라 인성교육의 많은 부분을 학교에다 기대하는 형편에 있다. 따라서 학교의 기능은 주로 지식교육을 담당하는 제도적 특징에만 한정될 수가 없다. 이제는 학교의 전문성도 지식교육 중심의 교과적 전문성에 제한되지 않고 인성교육을 포괄하는 전인적 전문성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러한 전환은 반드시 모든 교사들이 전인교육을 담당하는 전문적 자질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오히려 새로운 학교상(學校像)을 정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학교의 제도적 전형을 말할 때 자격증을 소유한 교사들만이 언어, 수리, 사회, 과학, 예능, 체육 등을 가르치는 장소라고 여기는 사고의 틀을 한번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공교육제도 속에 존재하는 학교는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는 ‘학습의 장’으로서만 아니라, 성장기의 젊은이들을 총체적으로 보살피는 ‘생활의 장’으로 그 기능을 다시 규정해 볼 필요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곧 ‘미래형 학교’이다.

미래형 학교는 지금까지 교과만을 가르치는 인력구조와 시설규모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종래의 특별활동, 혹은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일컬어 온 부분을 포함하여 종합적 교육과정으로 편성하고, 가능하면 학교의 개방시간을 최대한으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각종의 학원학습(피아노 등의 음악, 태권도 등의 스포츠, 영어회화 등의 학습)의 수요를 학교가 직접 혹은 외부와 연계하여 학교 책임 하에서 충족시킨다. 현재의 방과후 학교의 기능을 거의 전일제 수준으로 확대한다. 이를 위해서 학교는 정규 교과목 담당교사 이외에 다양한 보조적 인력과 이에 따른 시설을 확보한다.

물론 이러한 미래형 학교는 매우 급진적인 구상이다. 그러나 이미 관련된 활동이 우리의 학교에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있기도 하다. 먼저 저소득층의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초등학교에서 시범적으로 시작하여 중학교, 그리고 상급학교에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또한 지역적으로 확산하는 점진적 도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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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정 기자  hjkara@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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