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교육부장관 3인 특별대담..."교육은 결국 사랑입니다"
전 교육부장관 3인 특별대담..."교육은 결국 사랑입니다"
  • 지성배 기자
  • 승인 2016.05.3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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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린(제40대 교육부 장관), 서남수(제43대 교육부 장관), 이돈희(제42대 교육부 장관) 특별 대담
<이돈희(왼쪽 상단, 오른쪽 하단)·문용린(중간)·서남수(오른쪽 상단, 왼쪽 하단) 전임 교육부 장관들이 에듀인뉴스가 마련한 전임 교육부장관 특별 대담에 참여해 '미래의 학교와 교사의 역할'을 주제로 평소 자신의 갖고 있던 교육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사진=에듀인뉴스>

Part1. 세상이 바뀌면 학교도, 교사도 달라져야 한다

이돈희) 우리 교육계가 진보나 보수, 좌파나 우파로 이름 붙일 정도로 분열돼 있는 분위기가 없지는 않습니다. 교육계 전체가 양분됐다기보다도 교육계 구성원 속에 그런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크고 작은 충돌을 일으키니까 그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 같습니다만 월간교육은 정치적으로는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서로가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싸우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도 내놓으면서 대화하고, 합일점을 찾아가는 교육계의 대화의 장, 소통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특별히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스승의 날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학교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달입니다. 미래에는 학교 모양이 어떻게 바뀌어갈지, 교육의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이 힘들지만 교육전문가이신 두 분을 모시고 지금 변화하는 양상에 대해서 감지하고 있는 것들에 기초해서 미래의 학교를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미래학교의 교사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본래 문자문화가 발달하면서 학교라는 것이 생겼죠. 그리고 왕실의 재정운영도 해야 되고, 국가의 통치 원리도 전달해야 되고 하니까 문자를 필요로 했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문사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종교 기관인 사원에서 경전을 기록하고 교리를 전파하는 데 문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왕실과 사원이 중심이 되어 학교가 생겨나고 발달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라고 하는 곳이 교육을 완전히 맡을 수 있는 기관은 못 된다는 생각이 아마 학교가 출발하는 시기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볼 때 학교라고 하는 것은 문자를 중심으로 한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고, 아이들의 도덕성, 인성 같은 것은 부모의 책임 하에서 가정에서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최근에 와서는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옛날 가정이 아니란 말이죠. 핵가족, 한부모 가정이 늘다보니 가정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상당한 부분을 학교로 넘기자는 말이 나옵니다.

최근에 와서 지식교육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성을 관리하고 성장 전체를 관리해 주는 방향으로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환경과 조건이 바뀌고 과
학기술과 세상이 바뀌면서 학교도 달라질 수밖에 없겠는데 이런 변화를 생각하면서 미래의 학교와 교사상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문용린) 가정과 학교, 학부모와 선생님들 사이에는 ‘콘텐츠’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학
교에 보내는 이유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그 ‘콘텐츠’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
즘에 와서 가정과 학교, 그리고 ‘콘텐츠’의 기능들이 다 바뀌지 않나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콘텐츠’입니다. 그동안 선생님의 역할은 지식을 먼저 배워서 아이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콘텐츠’를 먼저 배워서 강의안 만들고, 그것을 교과서에 담아가지고 아이들에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하고 가르쳤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난 400~500년 동안의 교육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게 기술이 됐든 지식이 됐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에서 그런 ‘콘텐츠’를 가르치는 것의 상당한 부분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 교육의 의미가 붕괴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웬만한 지식, 정보는 선생님들이 가르칠 필요가 없어지고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다 검색해서 찾습니다. 옛날에는 이순신에 대해 한 시간 동안 가르치고, 외워 익히도록 했는데, 지금은 이순신에 대해 컴퓨터 한번 싹 검색하면 언제 태어나서 뭘 했는지 다 나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먼저 미리 배워서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선생님의 기능과 역할이 무색해져 버리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의 주된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부각되는 것이 학교 역할의 방향성 논의입니다. 그것은 바로 학교에서 사람이 만들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못하고 그 어떤 학원에서도 못 하니까 학교가 인성교육을 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래로 갈수록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의 기능은 퇴화될 것입니다. 기술과 기능은 보다 전문적인 곳에 가서 배우고, 다만 학교에서는 사람 만드는 교육을 해야 할 것입니다.

창의성의 요구도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창의성교육이나 인성교육이야말로 학교와 선생님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시대의 흐름 자체가 교육을 새롭게 규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배워서 후세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의 기능은 이제 사회로 이전되고, 학교와 선생님들의 기능이 리디파인(redefine)되는 과도기적인 단계가 아닌가 합니다. IT시대는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학교의 기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범대학도 커리큘럼을 바꿔야 할 것이고, 여러 측면에서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돈희 제42대 교육부장관(에듀인뉴스 발행인)이 특별대담 '미래의 학교와 교사의 역할'에 사회자로 참여해 학교와 교사의 역할에 대해 평소 갖고 있던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사진=에듀인뉴스>

이돈희) 원래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는 선생님이 불러주면 아이들이 받아쓰고 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해서 책이 나온 후로는 그것을 읽고 토론도 하고 탐구활동도 했습니다만, 그나마 컴퓨터가 발달하고 IT시대가 되니까 “학교가 없어질 것이다. 교사가 없어질 것이다” 하는 것 같습니다. 학교와 교사가 새로운 모습을 찾아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서남수) 제 생각에는 학교가 없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제도로서 학교를 능가할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학교의 기능이나 역할,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가르치느냐 하는 부분은 변화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다고 봅니다. 저는 특히 인성교육과 창의성교육이 앞으로 학교교육이 수행해야 될 큰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성교육에 있어 가정의 역할이 점점 약화돼 가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품성이나 가치관, 태도 등을 모든 가정에서 잘 가르쳐주기를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학교에서 그 역할을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의성 교육 또한 학교가 새롭게 맡아야 할 부분입니다. 모든 미래 학자들은 미래사회가 크게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변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됐습니다. 과거의 학교는 선생님이 알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쳤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선생님도 그 이상의 것을 가르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미래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거기에 적절하게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줘야 하는데, 선생님들이 배우지도, 겪지도 못한 그 무엇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앞으로 미래의 학교는 뭘 가르치려고 하는 것보다도 학생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어떻게 학습시키고, 새로운 것을 학습할 수 있는 역량이나 태도를 어떻게 갖춰줄 것이냐 하는 측면으로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평생학습을 전제로 한 기초적인 능력이나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 역시 학교가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적인 변화를 잘 수용해서 학교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느냐가 숙제인 것 같습니다.

문용린)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학교란 초·중·고·대학을 말하는 것이지만 미래로 가면 이런 초·중·고·대학의 의미도 많이 퇴화될 것 같습니다. 초·중·고·대학에서 공부 잘 해서 좋은 배우자 얻고, 직장 얻어서 육십세까지 살다가 정년퇴임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삶의 과정이었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그런 데 있었습니다. 피터 드러커의 마지막 논문이었던 ‘21세기에 대한 준비’를 보면 미래에는 두 종류의 학교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퍼스트 커리어리즘 스쿨(first careerism school), 즉 이 지금의 6·3·3·4 교육시스템의 학교와, 백세까지 살기 위한 삶의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는 또 하나의 세컨드 커리어리즘 스쿨(second careerism school)입니다. 이 사회에는 벌써 세컨드 커리어리즘 스쿨을 찾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도 정년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 오후를 쪼개서 뭔가를 배우는 사람이 여럿 됩니다. 그 중 한 분은 목공 아카데미에 가서 목공을 배운답니다. 2년째 배우고 있는데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주말마다 모여서 만든 제품을 길가에 놓고 파니까 사람들이 사가곤 한대요. 그래서 앞으로는 협업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가구생산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가 곳곳에 있답니다. 바로 이런 것이 피터 드러커가 얘기하는 세컨드 커리어리즘 스쿨입니다.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 벌기 위한 교육이 아니고, 좋은 배우자를 얻거나 지식을 많이 얻기 위해 다니는 학교가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피터 드러커의 예측이 참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퍼스트 커리어리즘 스쿨에서 백세까지 사는데 필요한 능력을 다 가르쳐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퍼스트 커리어리즘 스쿨, 세컨드 커리어리즘 스쿨을 구별하고 단절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요즘 행복교육, 행복교육 하는데,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정도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전반기에 생긴 습관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를 합니다.

어릴 때부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도록 습관을 들인 사람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파산을 해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한답니다. 고난과 시련에 감사할줄 모르면 저주와 증오와 비관 뿐입니다. 어릴때부터 학교에서 감사하는 것, 용서하는 것, 협동하는 것, 화해하는 것을 가르쳐주면 백세까지 살면서도 늘 화해하고 감사하면서 살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인성을 교육할 교사양성이나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고, 퍼스트 커리어리즘 스
쿨의 교사 기능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서남수) 그 점에 대해 저도 공감합니다. 학교교육에 평생학습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학교모델이 평생학습시대에 맞게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가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성교육은 어릴 때 아주 기초적인 생활습관에서부터 시작이 돼야 한다는것
이 일치된 견해입니다.

과거에는 형제도 많고 지역사회가 인성교육의 장 역할을 했지만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습니다. 심지어 친구 사귀게 하려고 학원에 보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잘 어울려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화두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지식교육과 관련해서는 교육의 방법들이 많이 개발이 되고 축적이 되었지만, 인성교육에 대해서는 필요성은 공감을 하면서도 그것을 가르치기 위한 효과적인 교육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 아주 큽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혁신적인 연구와 변화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돈희) 아이들이 스스로 정보를 얻는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교사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활용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대해서는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학교는 지식교육에 관해서도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성과 도덕성을 가르쳐왔던 가정의 기능이 무너져 버린 이 시대에 그 부분을 학교가 맡아야 합니다. 전통적인 학교의 개념으로는 맡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교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90년도에 초등학교 교장 40명과 함께 유럽 연수를 갔다가 모스크바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를 일찍 학교에 맡기고는 일터로 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수업이 끝나도 부모가 올 때까지 학교가 그 아이를 맡아서 특별활동 비슷한 것을 통해 수업을 하든가 해서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어 부모가 안 오면 학교에서 저녁까지 먹여요. 저녁을 먹고도 부모가 오지 않으면 올 때까지 아이들을 돌봅니다. 잠 잘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학교에서 재우기까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이니까 가능한 학교제도지만 당시에 저는 이것은 필요하고도 좋은 제도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학교에도 방과후학교라는 시스템이 있죠. 부모가 하던 것들을 학교가 맡아서 해 준다면 아이들 낳아 양육하는 문제도 걱정 않을 테고, 부모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학교라는 것이 과거처럼 영어선생, 수학선생 자격증 받아서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만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의 생활을 관리해 주고, 학교의 책임 하에 바깥의 교육기관과 연계해서 보조적인 교육을 하는 체제로 바뀌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문용린) 학교는 궁극적으로 사람 키우는 일을 해야합니다. 최근 ‘알파고’와 관련해서 누가 그런 얘길 해요. “알파고를 금방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둑판에 줄을 하나 더 그어서 새로이 만들면 사람은 금방 적응하지만, 알파고는 완전히 리세팅되지 않으면 무력화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기계와 사람이 뭐가 다른가가 화두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대부분 기계가 사람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이 기계와 다른 것이 뭡니까? 그것은 역시 전인적인 것, 감정이 풍부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을 배양시키는 통합적인 사고, 통합적인 감성을 갖도록 하는것, 이것이 미래학교의 고유한 기능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서남수) 앞서 이 장관께서 소련의 학교체제 말씀하셨는데 상당히 인상적인 시스템이라고는 생각을 합니다만, 사실 앞으로 교육이 어떻게 바뀔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회, 어떤 인생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접 관련이 됩니다. 학교가 인성교육을 좀 더 많이 맡아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성교육을 학교가 다 할 수 있다거나 해야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학교가 담당하는 인성교육은 가정이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보완적인 역할입니다. 인성교육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가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성교육이라는 것은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서 같이 놀고, 대화하고, 고통을 나누는 과정 속에서 인성이 길러지는 것이지 내가 어떠어떠한 인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되겠다 해서 의도적으로 길러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인성교육은 지금 현재로서는 상상이 안 됩니다. 다만 가정의 인성교육 기능이 약화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한 부분에 있어서도 학교가 수행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창의성교육을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는데 인문학적인 상상력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나 대화를 필수적으로 요구합니다. 언젠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마이클 샌델의 강의를 재밌게 봤습니다.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이런것이다”라고 이야기하지 않더군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철길에서 내가 기관차를 몰고 가고 있는데, 한쪽 철길에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는 사람이 없으면 어디로 방향을 틀겠는가? 당연히 사람이 없는 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쪽에는 다섯 명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한 명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한쪽에는 흑인이 다섯 명이 있고 다른 쪽에는 백인이 한 명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쪽에는 천재적인 과학자가 한 명 있고, 다른 쪽에는 다 죽어가는 노숙자가 다섯 명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등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롭냐는 것이죠. 사실은 정답이 없는 질문들입니다. 정말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계속 던집니다. 정의란 이런 것이라고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정답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정답이 없는 문제가 훨씬 더 많잖아요. 미래로 갈수록 점점 더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윤리와 윤리가 충돌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속에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창의력이란 것이 단순히 과학적 창의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생각하고 판단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사고(思考) 연습을 해 보도록 하는 것도 창의력이나 인성 교육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학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각광을 받는 ‘거꾸로교실’ 같은 경우도 어떤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생각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토의하고 깊이 있게 논의하는 쪽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창의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능력을 길러주는 학교교육은 충분히 가능하고 또 필요합니다.

<문용린 제40대 교육부 장관이 특별대담 '미래의 학교와 교사의 역할'에 참여해 미래 교사의 역할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사진=에듀인뉴스>

Part2. 학교와 가정, 부모와 교사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

이돈희) 교사들이 가지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우리의 생활환경이나 사회제도가 너무 급격하게 바뀌어 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휴대폰도 손에 채 익숙하기도 전에 또 새로운 버전이 나오는데, 새것이 나올 때 아이들이 훨씬 더 빨리 배우고 훨씬 더 빨리 적응을 한단 말입니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변화, 새로운 유행, 새로운 정보들을 아이들이 교사보다도 더 빨리 배운단 말이죠. 오히려 선생들이 아이들한테 배워야할 지경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교사로서 어떻게 감당해야 하느냐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제 주제를 좀 바꿔서 미래의 자녀교육을 위해 학교와 가정, 부모와 교사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문용린) “미래에는 학교가 가정의 기능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 같다”는 말씀을 많이들 하시는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현상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같은 경우 학교 수업시간은 줄어들고 부모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는 경향도 나타나거든요. 가정의 중요성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누리과정이니 뭐니 해서 부모와 있는 시간이 자꾸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끌어안고키울 여력이 있음에도 나라가 지원해 준다니까 애를 한두 살부터 교육기관에 맡겨버립니다.

아까 소련의 학교 얘기를 하셨는데, 레닌이 정권 잡은 후 “가정에서 자라면 폐해가 크다. 엄마와 아버지, 가정으로부터 나쁜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아이를 일찍부터 가정으로부터 격리시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소련의 집단양육체제가 그러한 이론을 근거로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결국 소련은 실패했죠. 집체적인 것을 강조해서 서로서로 돕는 공동체 교육은 잘 했지만 부모로부터 키워지는 사랑의 세계 형성에 실패했고 창의성교육에 실패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알파고 사회가 되더라도 여전히 가정에서 길러지는 도덕성, 감성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변화된 사회의 학교 역할을 정의할 때도 가정의 고유한 기능은 언제나 유념해야 됩니다. 누리과정에서 때문에 두세 살부터 부모로부터 아이를 떼어내는 것은 소련의 집단양육과 비슷한 것은 아니지만 위험요소는 다소 있다고 봅니다.

이돈희) 엄마가 실제로 직장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아이를 내보내는 것은 문제이긴 하지만, 근래의 가정 구조가 아이들을 돌보기 힘들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감당을 해야 되느냐? 부모와 학교 사이에 아이들의 교육을 둘러싸고 어떤 협업을 하든지 분업을 하든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새롭게 형성돼야 할 것입니다.

문용린) 학교 여선생님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여선생님이 학교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선생님은 집에서 자녀 키울 시간이 줄어들게 되는 거잖아요. 누리과정에 충실하다보면 선생님은 자기 가정에 소홀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학교 수업시간, 운영 시간을 줄이고, 회사도 근무시간을 줄여서 부모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게 해 주고, 애들이 집에서 부모와 접촉하면서 자라게끔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소셜 시스템을 바꿔야 된다고 생각해요.

서남수) 저도 공감합니다. 학교가 가정이 수행했던 모든 교육적인 기능을 다 감당할 수는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과거에는 가정에 너무 지나친 부담을 줬고, 지금은 거기서 너무 지나치게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가정의 교육적 기능은 여전히 소중히 여겨져야 되는데 경제적, 사회적인 여러 문제로 인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가정이 너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학교나 다른 사회적인 시스템을 통해서 돌봐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아이는 미성년이라는 생물학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는 기본적으로 익혀야 될 지식도 있고, 태도도 있고, 가치관도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학교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감당하느냐, 선생님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 이것이 과제”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IT나 이런 분야는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물어봐서 배우는 경우도 많긴 합니다. 지식기반 사회로 나아갈수록 학생들이 더 빨리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을 하고, 선생님이 그에 관한 정답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연습을 잘 이끌어주는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점점 더 커져야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이끌어주는 교육 방식이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을 도와주는 조력자로서의 교사의 역할이 앞으로 미래의 학교에서는 좀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용린) 마이크로 소프트 같은 곳에서 미래학교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뉴욕에서, 인도에서 미래학교, 퓨처스쿨의 형태를 고안하고 있거든요.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IT테크놀로지도 상당히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서 푸시킨을 가르치는 것을 봤는데요. 365도로 돌아가는 회전전자칠판으로 푸시킨의 시를 보여주는데, 그 화면에 봄날 보리 피는 언덕을 걸어가는 풍경이 쫙 펼쳐집니다. 러시아어를 몰라도 감동을 줍니다. 우리가 김소월의 시를 그런 식으로 하면 정말 감동적일 거예요.

교실에서 감동적이고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IT기술이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죠. 소니의 테이프 레코드가 처음 나왔을 때 그것으로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이들 감탄하고 놀라웠잖아요. 50년대에 소니의 테이프 레코드 기술을 시청각 교육에서 사용했던 것 이상으로 지금 IT기술은 매우 발달이 돼 있는데 이것을 교육에 활용할 기술을 가진 선생님이 너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아이들은 열망하고 있는데 그것을 배워서 아이들에게잘 가르쳐 보겠다는 열망을 가진 선생님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아요.

제가 한때 미래학교라는 것을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IT테크놀로지를 이용해서 교과를 가르치는 실험학교 비슷한 학교를 제안해 본 것입니다. 참석할 교사를 모집했더니 무려 300여명이나 지원하셨어요. 그때 선생님들 한 분 한 분한테 “지금 어떻게 가르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가르치고 싶으신가요?” 라고 물었더니, 상당히 획기적인 아이템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의 IT테크놀로지는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는데 그것을 활용해서 학생들을 잘 가르쳐줄 선생님들의 테크놀로지 활용 수준은 좀 뒤떨어져요. 이 격차를 메워주는 것도 시급합니다.

이돈희) 하이테크놀로지가 발달하게 되면 대형생산체제, 대형학교, 대형회사… 이런 것들이 대체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홈스쿨링, 홈뱅킹, 홈쇼핑… 이렇게 되면 개인적으로 자기 시간이 많아지고, 자연히 집단체제보다 개별화하는 체제가 증가하게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테크놀로지가 굉장히 발달해 가는데도 부모들이 애를 갖다 맡기는 일만 하지 스스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이한 현상입니다.

오래 전에 나온 것입니다만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라는 사람이 쓴 《메가트렌드》라는 책을 보면, 미래의 사회는 하이테크 개념과 하이터치라는 개념이 있는데 테크가 발달하게 되면 분해된다는 겁니다. 집단으로 갈 필요가 없고 컴퓨터에 앉아서 자기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굳이 은행 안 가고 인터넷 뱅킹하잖아요. 그러듯이 “개체들이 분해될 것이다, 원자적 개체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접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터치가 중요합니다. 영화를 보는데 집에서 TV로 볼 수도 있지만, 극장에 가서 옆 사람 숨소리도 듣고, 어떤 장면에 대한 반응도 같이 느껴가면서 봐야 더 재미가 있습니다. 운동경기도 마찬가집니다. 집에서 TV로 보면 리플레이도 해 줘서 더 잘 볼 수 있지만 경기장에서 ‘와와’ 하면서 같이 응원하고 해야 재미가 더 있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학교가 할 수 있는 기능 중에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 바로 하이터치입니다. 집에서 부모들이 교육을 맡아버리면 개별화되고, 집단생활,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잖아요. 하이터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집단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인 것입니다. 물론 하이터치라는 것이 반드시 집단적 접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정의적 접촉을 의미하기 때문에 대중 속에서만 아니라 가정 속에서도 있는 것으로 알지만, 가정에서의 가족적 관계만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사회적 관계도 잘 경험해야 할 내용이 될 것입니다.

서양의 교육사에서 ‘퀸틸리아누스의 질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고대 로마 재정 시대에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라고 하는 교육자가 “아이가 공부할 시기가 되면 학교에 보내야 하느냐? 집에서 부모가 맡아서 가르쳐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퀸틸리아누스 자신은 왕실로부터 교사자격증을 받은 교사니까 학교를 중시하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학교에 보내면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학교나 교사가 편견을 가르칠 수 있어서 도덕적으로 불완전하게 본 것이죠. 그렇다면 가정은 온전하냐? 가정도 부패된 가정도 있으니 퀸틸리아누스가 고민을 한 것입니다.

존 로크(John Locke)는 집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쳐야 된다”며 도덕성을 중요시한 겁니다. 그 당시에 영국에서는 신사의 도덕성을 가르치는 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똑같은 질문에 대해서 칸트(I. Kant)는 “학교에 보내서 가르쳐야 된다”라고 했습니다. 집에는 부패된 모습과 나쁜 습관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것을 배운다는 거죠. 학교에 가면 동급생들이 있으니까 거기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준법도 배우고, 경쟁도 배우고, 협동도 배울 수 있으니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적 시민사회의 기본적인 자질을 익힌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도 이 퀸틸리아누스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정답은 없습니다. 인성의 기본적인 바탕은 가정이 맡아야 하는 것이 맞고, 사회생활의 규칙은 학교가 맡아야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부모가 해야 할 일과 학교가 해야 할 것을 함께 검토해 봐야 할 시기입니다.

문용린) 작년에 제가 중국교육학회 초청으로 존 나이스비트와 함께 중국에 갔었습니다. 나이스비트는 “메가트렌드의 변화 속에서도 중국은 가정을 잃지 말고 꼭 붙잡아야 된다. 중국은 어쨌든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패밀리 트레디션이 강한 나라 아니냐. 다른 나라들은 패밀리 트레디션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메가트렌드에 휩쓸려 들어갔지만 중국은 가정을 꼭 지켜야 한다.그런데 소공자라는 시스템 자체가 참 문제다. 빨리 중국의 전통적인 가족전통 회복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크게 환호하며 박수를 쳤어요.

서남수) 가정과 학교가 어떤 비중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의 정답은 아마도 양 극단의 중간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학교와 가정이 적절하게 그 역할을 분담해야 하겠지요. 뇌과학자들이나 발달심리학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어렸을 때, 특히 만 2세 미만의 영아 시절에는 지적인 발달보다 정서적으로 발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어태치먼트, 정서적으로 충분히 사랑을 받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아까 우려하신 것처럼 무조건 누리과정이나 탁아시설에 너무 일찍부터 아이들을 맡기려고 하는 추세는 분명히반성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능히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부모는 반드시 가정이 아이들을 양육하도록 촉진하는 사회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문용린) 하루 일정 시간 이상, 예컨대 5시간 이상 어린 자녀를 시설에 맡기도록 하는 것은 참 문제라고 봅니다.

서남수) 다른 한편 인성교육이 가정에서만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구에는 음악, 미술, 체육과 같은 지덕체를 길러주기 위한 교육프로그램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체육 교과 같은 경우도 이것이 체력을 길러주기 위한 교과가 아니라 인성을 길러주기 위한 교과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스포츠를 통해서 도전하고 분발하고 같이 팀웍을 통해 협동심을 기르고 룰을 지키는 습성을 갖게 하기 때문에 인성 교육적 측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역할은 학교가 맡아서 해야 제대로 될 부분입니다. 아무쪼록 가정과 학교가 역할 분담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이돈희) 부모의 폭력과 학대가 요즘 자주 보도됩니다. 가정이 온전하면 괜찮은데 부모가 자식에 대해 애정도 없다든가 부모가 자기 자신의 삶을 감당 못해서 자식을 짐으로 여기는 가정이라면 부모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부모를 대신해서 아이에게 사랑도 가르쳐주고 건강도 관리해 주고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도 제대로 가르쳐주는 전문적인 요원이 학교에 있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모가 자식을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것은 다 부모가 안정되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온전할 때 가능한 이야기이지 가정이 무너진 경우, 그 속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잘 자라겠어요.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를 케어하듯 아이들의 성장을 제대로 케어해 줄 전문 인력을 양성해서 이들에게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맡기는 것을 제도화되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서남수) 그런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도입을 하려고 했던 것이 사회주의 국가인데 그 실험이 실패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정이 그 본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때 사회제도로써 그 역할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피한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전적으로 가정의 역할을 대신하는 데까지 그 범위를 넓히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돈희)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키워야 된다는 것, 부모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국가는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지 않는데,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규칙을 강화할 필요는 있습니다.

문용린)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자녀의 양육권을 빼앗지 않지만, 최근 법원 판결에 의해서 부모로부터 자녀의 양육권을 회수하는 경우가 더러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것들이 앞으로점점 더 강화되지 않을까요.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가 있죠. 미국은 부모로부터 양육권을 빼앗아오면 부모보다 더 나은 곳에 맡길 시설과 문화의 여력이 있는데, 과거나 현재나 우리나라는 그런 여건이 안 되어있어요. 오히려 아이를 더 어렵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사회 여건도 많이 나아졌으니 그런 제도적 뒷받침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돈희) 학교가 가정을 대신할 수 없고 가정이 학교를 대신하기도 어렵겠지만, 학교는 과거의 가정 기능 중 상당한 부분을 맡아줘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가정대로 학교에서 맡아서 하던 것들을 맡아야 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이제 관계를 재정립해야 되는 것이죠.

문용린) 미래에도 어차피 학교가 필요해서 존재할 것이 분명하니, 우리 선생님들도 자기 전문성의 영역을 학문적인 기술과 지식뿐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으로서의 전문성을 재정립해야 될 것 같아요. 국어, 영어, 수학 등 기능적인 요소보다는 어릴 때부터 백년을 살 수 있는 지혜와 통찰들을 가르치고, 사람을 키우는 열망을 지닌 전문성 말입니다. 교과는 어쩔 수 없이 한 두 개씩 전공으로 맡지만, 영어 선생님은 영어만 잘 할 것이 아니고 사람을 키우는, 한 사람이 백 살 동안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채워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선생님… 휴먼 그로잉(human growing), 휴먼 디벨롭먼트(humandevelopment)에 대한 전문성이 70, 80%되고, 나머지 지식과 기술은 30% 정도만 되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서남수 제43대 교육부 장관이 특별대담 '미래의 학교와 교사의 역할'에 참여해 교사의 전문성 확대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에듀인뉴스>

Part3. 교사는 어떻게 전문성을 넓혀나갈 것인가?

이돈희) 이 90년대 후반에 열린 교육 바람이 세게 불었었잖아요. 제가 열린교육협의회 회장도맡았었는데 그때 당시 열린교육 시범수업을 한다니까 4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강당에 교사들이 무려 1200명이나 몰려왔습니다. 정부가 동원한 것도 아닌데 선생님들이 그냥 온 거예요.‘교실을 바꿔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모였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저는 또 다른 관점으로그 현상을 보았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경우 자기 직업이 갖고 있는 전문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강한 반성이 있었다고 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라고하면 그걸 누가 못 가르칩니까? 중학교생도 가르칠 수 있지 않습니까? 교사의 전문성은 글, 지식을 전달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면 그 전문성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교육에 종사하는 우리 모두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더욱이 컴퓨터까지 등장해서 지식과 정보 수집 능력까지도 빼앗기고 있으니까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가 있을 것으로고 여겨집니다. 전문직으로서의 교사, 그 전문성의 영역이 무엇이며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반성적 검토를 할 필요가 있고, 어떻게 교사의 전문성을 넓혀나갈 것인가 하는 것도 과제입니다.

문용린) 일본의 경우 선생님들의 양성과정에서 교직과목의 비중을 높여왔습니다. 선생님들이 상담이라든지 교육심리학이라든지 교육학적인 지식을 증대해야 전문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교직과목의 비중을 점점 높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직과목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듯하여 걱정도 됩니다.

서남수) 제 생각에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교사가 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교직이라는 직업의 전문성은 어떤 테크닉적인 문제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관찰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고, 인성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이끌어야 하는지를 꿰뚫고 있는 능력이 곧 교직의 전문성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그런 전문성을 지닌 선생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은 결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직의 전문성을 지식 중심으로 접근하다 보니까 거기서 오히려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사범학교 시절에는 “교육이란 것은 남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사범교육의 핵심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춰서 전문적인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을 지향하는 가치가 빠져버리면 교육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 교사 교육에 있어서도 ‘좋은 교사’가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경험을 축적하고, 책도 많이 읽고 경험도 많이 쌓고 삶에 대해 고민도 많이 한 사람들이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돈희) 교직을 전문직이라고 하지만 지식이나 기술의 수준을 가지고 얘기할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보며 ‘군인정신’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했습니다. 훌륭한 군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정신적인 자세와 사명감, 투철한 애국심… 군인으로서의 특별한 자세가 있단 말입니다. 그것을 교사라는 직업에 적용해보면 어떤가요? 교사가 가져야 하는 특별한 정신자세, 교사만이 가지는 사명감… 그것 때문에 교사가 되고, 그런 정신을 갖고 싶어서 교사를 하는 그러한 무엇이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문용린) 사람에 대한 열정과 사람에 대한 헌신성, 예컨대 어머니 중에서도 훌륭한 어머니가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 어머니가 반드시 훌륭한 인격자는 아닙니다. 내 자식만을 위해서 열심이고 훌륭할 뿐인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님 중에서도 맡은 학생을 열심히 위하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확실히 좀 더 선생님의 전문성, 좋은 선생님을 좀 더 스페시픽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치원에도 가보면 사람에 대한 열정과 애정, 자기 학생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뛰어난 교사들이 있거든요. 그런 쪽에서 전문성을 봐야 되지 않을까요. 교사의 전문성은 기술과 지식이 전부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돈희) 교사는 ‘티처(teacher)’죠. 티칭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케어링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까 인문학 이야기를 하셨는데 인문학적인 학식은 내가 교양으로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그 소양까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전달하고, 심어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의 경우 모든 지식은 역사 속에 있다고 봅니다. 역사를 가르친다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저런 과학이론이 있지만 그것이 어떤 사고(思考)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냐? 왜 그런 사고를 했는지를 탐구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뉴턴은 왜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했느냐? 다른 사람들은 사과 떨어지는 것 안 봤는가? 뉴턴 전엔 사과가 안 떨어졌는가? 아마도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때 당시의 과학자들이 그런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고 고민했을거란 말입니다.

모든 지식이 다 그렇잖습니까. 모든 지식은 생산되는 역사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과 함께 지식을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단순히 히스토릭한 이벤트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역사적인 맥락, 거기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경제도 있고 사회제도도 있을테고… 그 속에서 나온 지식을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남수)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제대로 가르치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인류가 결코 궁극에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그저 내가 아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선에서 역할을 그치면 안 됩니다.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일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뇌하면서 그 길을 찾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육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떻게 내가 이 아이들을 가르쳐야만 이 시점에 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이 될까’ 하는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품을 가지려면 결국 역사나 철학, 문학이나 과학 등 다양한 리버럴 아트(Liberal Arts) 분야의 학문에 대해서 굉장히 폭넓은 소양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이돈희) 역사 속에서 가르치면 그런 것들이 함께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역사와 더불어 사고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없으면 내용이 없잖아요. 생각이라는 것도 배경이 없는 상태에서는 있을 수는 없는 거잖습니까.

서남수) 왜 사람들이 그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를 알려면 역사를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은 인문학의 핵심적인 일부이니까요. 그러나 누구를 가르친다는 문제는 내가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인데 우리는 지금 너무 교육을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데서 많은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어떤 미래사회가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없지만, 그런 인문학적인 고민을 충분히 해 본 사람은 어느 정도 그런 예측이 가능하고, 미래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용린) 학생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우리 머릿속에 남아있는 선생님들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오직 나를 참 사랑해준 선생님만 기억에 남고, 또 그런 분을 존경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도 여전히 선생님들의 최고 덕목은 ‘제자 사랑’이라고 봅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선생님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역사로 배운 훌륭한 선생님이 누구입니까? “페스탈로치다, 돈 보스코다, 야누쉬 코르착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르치는 사람을 온 힘을 다해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이 잘 되도록 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봉사했다는 점입니다. 세상이 바뀌면 교사의 역할도 바뀐다고 하지만 바뀌지 않는 진리, 교육자의 가장 커다란 덕목은 사랑입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헌신하고 봉사하고 배려하는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며,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입니다.

이돈희) 선생님들 모두가 성인군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서 대단한 부담을 주는 것 같습니다만, 달리 이렇게 생각을 해보도록 합시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나를 가르쳐온 선생님들 가운데 어떤 선생님이, 어떤 점에서 좋았느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들도 다 자기를 가르친 은사들이 계실 테니까… 그러니 그 기억들을 잘 살려서 좋은 것을 수용해서 좋은 선생님이 되어 보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도 하나의 요령 아니겠습니까.

문용린) 이제 곧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이 하필 공휴일이라서 저희 교원공제회에서는 5월 13일에 스승의 날 행사를 합니다. 임직원들이 자기가 잊지 못하는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조그만 선물을 드리는 행사입니다. 두 사람 밥값이랑 선물비용 등 7만원을 부담해야 하는데도 참가하겠다는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나이든 직원도 젊은 직원도 골고루 많았고요. 초청하는 선생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물어보았더니 잘 가르친 선생님도 아니고, 결국 ‘나를 좋아했던 선생님’들이라는 답변이 많았습니다.

이돈희) 참 좋은 친구가 있었는데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상 중에 그 미망인과 제가 서로 편하게 대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엉뚱한 농담을 했습니다. “그 친구 사기꾼이다” 그랬어요. 왜 사기꾼이냐고 묻기에 “주변 친구들이 다 그 친구를 좋아하기에 사기꾼이다.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사랑을 다 나누어 줘서 모두들 다 그 친구랑 자기가 제일 친하다고 착각하게 했으니까 그래서 사기꾼이다”라고 농담 삼아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선생님은 이 친구처럼 모든 제자들에게 편애도 없어야할 것 같습니다. 더 좋은 아이, 더 착한 아이가 왜 없겠습니까마는, 아이들 앞에서는, 아이들이 보기에는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선생님의 사람을 똑같이 받고 있다는 느낌과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사랑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의식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서남수)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 가장 좋은 선생님이라는 말씀에 백배 동감합니다.

이돈희) 결론은 결국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네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두 분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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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배 기자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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