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불운, 우연

가벼운 기분으로 출발했는데, 벌써 세 번째 순서가 되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길게 늘여서 하는 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번시간에는 꼭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좀 일찍 죽은 천재라면, 아무래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를 꼭 넣어야겠지요? 저번에 잠시 말씀드렸지만, 고흐는 과대평가된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그를 띄운 점도 있고(일본판화가 인상파에 끼친 영향 때문에), 작품자체보다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 때문에 그렇게 된 면도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흐의 작품가치가 뚝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예술적 가치란, 그 평가기준이 여러 가지라서 그렇습니다. 기본(평가기준)은 순수조형적인 측면이겠지만, 작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작품을 만들어갔는가 하는 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치열한 작가정신’이라면 그를 빼긴 어렵습니다.

의미를 조금 더 넓혀, ‘신념을 향한 정진(精進)’이라 불러도 됩니다. 예술분야뿐 아니라 모든 인간 활동에 두루 해당하는 말입니다. “뜻을 세우고 오로지 한 길로만 나아간다”는 건데, 이런 경우엔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답습니다. 굳이 비교대상이나 상황을 따로 나열할 필요 없이 말이지요. 사설이 좀 길었습니다. 맺음말을 미리 당겨서 하는 걸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고흐는 워낙 유명하니 바로 그림으로 들어갑니다.

1880년 전후에, 그가 그림공부를 막 시작했을 무렵의 작품입니다. <잡초를 태우는 농부>란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흔히 “고흐답다”고 하는, 그만의 고유한 화풍이 아직은 안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고흐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정식’이란, ‘체계적인 그림공부’를 뜻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요,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운다는 의미지요. 모든 공부엔 다 때가 있어서 그 시기를 놓치면 애를 먹습니다. 고흐도 늦공부 덕분에 애를 많이 먹은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원래는 가업(家業)인 목사(牧使)과정을 밟다가 미끄러졌습니다. 목사를 했으면 꽤 잘 했으리라는 생각을, 저는 늘 합니다. 아마 훌륭한 목사님이 되지 않았을까싶네요.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따뜻한 목사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안정된 직업이라 배도 덜 고팠을 테고, 괜히 골치 아프게 그림 따윈 안 그려도 되니 속도 편했겠지요. 그랬다면 그렇게 일찍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고흐는, 서른일곱 살에 죽기 전까지 10년 동안 약2천점의 그림을 그립니다. 습작 1천1백점을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1년에 2백점 꼴이니 평균 잡아 이틀에 한 점은 꼭 그린 셈입니다.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 2년은 몰라도 무려 10년을 계속 그렇게 한 건 정말 대단합니다. 보통, 1880년부터 1890년 사이의 기간(10년)을 다음과 같이 세부분으로 나눕니다. 1880년-85년까지 네덜란드 시대(습작시기). 1886년-88년까지 파리 시대(기법실험). 1888년-90년까지 아를 시대(화풍정착).

<흰옷 입은 숲속의 소녀(1880)>. 거의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던 습작시기의 그림입니다. 독학교본의 스승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 그들한테서 배운 기법이 이 그림에 잘 나타납니다. 4가지쯤 되는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ㄱ. 다양한 갈색, 회색, 흑색조(調)의 색채/ ㄴ. 음영(그늘져 어두운 부분)을 또렷하게 칠하는 기법/ ㄷ. 지나간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친 붓 자국/ ㄹ. 전체적으로 강렬한 효과를 얻기 위해 세부묘사를 일부러 생략/

옛 거장들한테서 그림을 대충대충 그리는 기법을 배운 뒤, 평생 동안 이 원칙을 고수합니다. ‘대충그리기 기법’은 설명이 좀 필요하겠군요. 그림을 보시지요.

고흐다운 특성이 아직은 전혀 안 보입니다만, 위에 정리한 4가지 기법은 잘 드러납니다. 앞쪽 큰 나무뿌리 부분을 보시지요. 시원시원하게 슥슥, 그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충 그리기’에 충실하지요?

<배경에 수레 2대가 있는 길을 가는 소녀(1882)>. 어언 독학 2년차군요. 싹이 보일락 말락 합니다. 다음그림을 보시면, 이전과 다른 변화를 살짝 느끼게 됩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들판의 풀들을 그릴 때 이전과는 약간 다릅니다. 전체색조도 많이 밝아졌고요. 확연한 차이는 다음그림에 잘 나타납니다.

<석양에 씨 뿌리는 농부(1888)>. 불과 6년 만에 실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찌된 걸까요? (따분한)교과서식 설명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853년 일본은 국경을 개방했으며,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점점 더 많이, 판화를 찍은 종이가 유럽으로 전해졌다. 많은 미술가들이 새로운 미술에 열광했고, 반 고흐도 매혹되었다. 그는 일본채색판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몇 개의 소재를 유화작품으로 옮겨 제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미술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들의 조형원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그 이후부터 제작된 그의 그림에는 이런저런 ‘일본적 조형원칙’이 나타났다. 그림자의 부재, 가는 선으로 테두리가 둘러쳐진 ‘얕게’ 채색된 화면, 이례적인 원근법, 풍경 속에서 아주 작게 묘사된 인물들이 그런 원칙들이었다.” <위키피디아>

유명한 <침실-예술가의 방(1889)>. 일본사람들이 고흐를 (의도적으로)띄운 이유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후원자이자 평생 동지였던 동생 테오한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림자가 제거되었고, 색채는 일본 목판화처럼 얕고 단순하게 칠해졌어.”

‘얕게 칠한다’는 건 단순히 물감을 얇게 바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려지는 실제대상의 사실적인 느낌은 무시한다는 거지요. 그릴 때 물체의 윤곽만을 강조할 뿐, 명암이나 양감(부피감) 등은 납작하게 나타냅니다. 미키마우스 같은 컬러인쇄만화의 처리방식을 생각하면 쉽습니다(꼭 만화처럼 그린다고 이해하면 무난합니다).

그 대신 물감은 오히려 아주 두텁게 칠합니다. 사물의 겉모양을 그릴 땐 ‘(일본 목판화)우끼요에 스타일’을 따르고, 색을 칠할 땐 기존의 서양방식을 더욱 강조하고..... 고흐의 그림이 뿜어내는 독특한 느낌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림을 그리러가는 화가’(1889)>. 이제 ‘색을 얕고 단순하게 칠하는’ 고흐만의 기법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아무도 그러라고 시킨 사람도 없는데)스스로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고통과 외로움에 떨던 화가는,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자신이 돌아갈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온 김에 고흐의 육성을 하나 더 들어보시지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내용입니다.

“색을 칠하기 전, 나는 먼저 자연을 아주 자세하게 관찰하지. 내가 사용한 색이 훌륭한 효과만 발휘한다면, 실제 사물의 색과 동일한가하는 문제는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이 말이 고흐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저는 봅니다. 혹시 다른 생각을 가지셨더라도 (당연히)아무 상관은 없습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는 게 미술이 지닌 최대장점이니까요. 또 그게 바로, 미술이 보는 이(우리)한테 주는 유일한 선물이지요. (늘 말씀 드리듯이ㅎㅎ)

자, 여기까지. 요절작가와 그들의 예술세계를 훑어봤습니다. ‘서로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하는 질문에 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결론은 각자 내보면 좋겠습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간은 가고, 누군가는 죽습니다. 사람이 죽든 살든 그림은 또 계속 그려집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 테니까요. 언제나 그렇듯이, 긴 이야기를 끝냈으나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는 하나도 못했다는 느낌이 듭니다(이상합니다).

끝으로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고흐가 죽기직전 그렸다는 <까마귀 나는 보리밭(1890)>. 다른 하나는 조각가 권진규가 목을 매면서 남긴 메모. 권진규의 메모는 볼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이유는 정말이지 모릅니다. 처음 본 열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이상합니다. 긴 시간, 함께 이야기 나눠 행복했습니다. 가신 분들껜 다시금 명복을 빕니다. “죽음이란 없다, 다른 곳에서 계속 산다”는 말(북미 인디언 속담)을 저는 믿습니다. 그럼, 다들 오래 두루 행복하시길.

“범인(凡人)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겐 감사를..... (권진규, 메모,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