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언제나,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삶을 바우만(Zigmunt Bauman)은 ‘유동적 근대’가 지닌 특징이라고 하였다.1)

근대의 초기에는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어떤 일정한 가치를 지향하였고 변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렸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변화는 비교적 여유로움을 보이는 ‘견고한 근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최근에 이를수록 변화는 가속화되고 극심한 유동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겪는 불안과 공포가 있다. 모든 것이 변화하면서 온갖 잡다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종래에 유지해 오던 삶의 수단이나 도구가 더 이상 유용하지도 않게 된다.

지금까지 추구해 온 가치들이 일시에 의미를 잃게 되고,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온 관습과 전통도 무너지는 허탈감을 경험할 수도 있다. 개방성 자체의 특징인 불확실성, 그리고 이와 더불어 발생할 역기능을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타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많은 취약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개방성으로 인해 감당할 수도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세력과 마주치거나, 어쩌면 그 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2)

물론 이러한 변화도 삶의 특징과 환경을 총체적으로 일시에 변화시키는 불연속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양식이나 제도적 형태가 어느 시점을 두고 전후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삶의 특징과 환경은 전근대적 상태에서 근대적 경지로 바뀌어 왔고, 또한 이어서 초근대적(현대적) 요소를 수용해 왔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우리는 전근대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 그리고 초근대적 요소가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세계에서 살게 된다.

도덕적 삶의 경우에, 오늘과 같이 극심한 변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옛날 같으면 한 가정이나 고장의 연장자가 행사하던 도덕적 판단의 권위를 어느 누구도 행사하기가 어렵게 된다. 옛 마을에서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에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마을의 연장자가 판단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것은 반드시 권위주의적 관습이 지배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연장자가 공동체의 전통, 관행, 규범 등에 관해서 가장 균형 있는 지혜와 경험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옛 마을은 지금과는 달리 몇 세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삶의 조건과 형태가 거의 변하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었다. 오늘처럼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성장세대가 기성세대보다 삶의 환경과 조건에 훨씬 더 잘 적응한다.

성장세대는 변화의 흐름을 빨리 지각하고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형성하며 나아가 변화를 주도하는 대열에 쉽게참여하게 된다. 성장세대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반면에 기성세대는 사실상 삶의 에토스(ethos)를 결정하는 세력의 변방에 위치하고 주변인(周邊人)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정체된 농경사회의 경우처럼 전근대적 구조 속에서 지녔던 ‘윤리의 담당자’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깨우치고, 필요한 습관을 지도하면서 인격의 성장을 보살피는 역할을 담당할 권위적 담당자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젊은이들의 인성교육과 관련하여, 오늘의 가정이나 학교는 현실적으로 도덕성의 두 가지 측면, 즉 인지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 모두에 걸쳐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젊은이들의 인지적 환경의 가변성이고, 다른 하나는 습관적 적응의 곤란성이다.

인지적 환경으로 보면, 오늘의 젊은이들은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하여 교사가 전달하고 해석하고 논의하는 정선된 정보의 체제, 근대적 기준에 의해서 천재들이 개발해 놓은 지식의 체제, 그리고 전통적으로 관습과 생활을 통제해 온 규범의 체제 등에만 의존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누구나 자신의 관심과 지력으로 참여하는 소위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컴퓨터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생산한다. 특정한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며, 양적 규모는 엄청나고, 빠른 속도로 증가하며, 이론이나 의미나 목적과는 연관성도 없이 생산되고 있다.3) 정보과잉 상태에 이르면 문화적 담론의 질서는 파괴되고 만다. 왜냐하면 유의미한 맥락이 없이 떠도는 정보는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엄격히 선별된 객관적 기준이 퇴조해버린 채로 잡다하게 생산된 정보의 물결에 분별없이 편승해야 한다. 그리고 관습과 전통의 가치와 의미보다는 현실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율성을 쫓아야 한다. 이러한 세계는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우며 혼란스럽다. 그러한 인지적 환경에서 형성된 신념체제는 언제 바뀌어버릴지 모르며, 이미 형성된 습관은 변화에 적응하는 데 장애가 될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격의 구성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덧없는 요소들’은 젊은이들을 혼란 속에 살게 한다.

위기의식의 복잡성

변화의 소용돌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통적 윤리체제의 안정 그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체제로의 끊임없는 재정립이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도덕적 일탈이나 부패, 혹은 사회적 부조리, 고질적 갈등이나 분열 등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거나 최소화하는 일을 제도적 교육이 감당하기에는 거의 무력하다고 할 정도로 한계가 있다.

‘건강한 규범문화’의 정착 상태를 유지하는 과업을 감당하는 일이 전통사회의 경우와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의 도덕적 질서는 총체적으로 위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기를 의식하는 관점들도 매우 다양하다. 몇 가지의 대표적인 위기의식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전통적인 관습의 붕괴를 우려하는 경향이다. 성장하는 젊은이들이 예의가 없고 불손하다거나, 전통적인 예법이나 관습을 지키지 않고 편의주의에 따라서 산다거나, 사회적 조직에서 기강이 무너지고 순종하는 심성을 소유하지 못하였다거나 하는 것 등, 즉 전통적 인간관계의 질서가 경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의적 차원’의 문제의식이다. 특히 근대적 산업사회에서 관찰되는 도시화, 개방화, 익명화 등의 현상과 더불어 가족구조, 직업구조 등의 사회조직의 형태에 변화가 진행되고, 주거환경, 교통수단, 통신수단 등의 생활환경이 달라지면 인간관계의 특징인 예의적 행동의 전통적 방식이 유지되기가 어렵다.

둘째로, 일탈적 행동이나 파렴치한 사건이 날로 증가하여 우리의 일상적 생활의 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다. 정서, 감정, 인성 등의 순화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심성적 차원의 도덕성’에 일차적 관심을 둔 것이다.

폭행, 절도, 강도, 살인, 성범죄, 사기, 위조, 횡령, 뇌물, 범법 등의 범죄 사건들이 적지 않게 발생하여 우리를 긴장시켜 왔다. 인간의 생명을 하찮은 대상으로 여기는 생명경시의 풍조, 시민생활을 불안하게 만드는 폭력성 행동들이 빈번이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어느 시기에나 있어 왔지만, 무기, 약물, 기기, 정보 등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의한 새로운 수단, 도구, 수법이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셋째로, 이기주의적 사고와 태도에 의해서 초래되는 사회적 분열현상을 우려하는 경향이다. 애국심, 애향심, 애교심, 우정, 가정의 화목, 조직체의 단결 등을 강조하면서 공동체 의식이 이기주의적 사고에 의해서 잠식되어 가는 현상을 보고 불안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즉 ‘공동체적 차원의 도덕성’에 대한 의식의 퇴조를 우려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개방성, 이동성, 익명성, 개별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사회와 정보사회의 구조적 속성으로 인하여 전통사회적 연대의식과 귀속의식이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 집단적 소속감은 생활상황에 따라서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경향을 보이게 된다.

넷째로, 공동생활의 질서와 안전을 위협하는 행동을 개탄하는 태도가 있다. 기본적인 사회적 규칙과 법을 준수하는 생활에 도덕적 해이 현상이 빈번히 관찰된다는 것이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자연의 훼손, 환경의 오염, 공해물질의 방출, 유해식품의 유통 등 시민 생활의 기본적인 규칙을 어기는 풍조에 대한 불안, 즉 ‘시민생활적 차원의 도덕성’에 관련된 문제의식이 있다.

현대사회의 구조적 복잡성으로 인하여 시민생활에서 공유되는 기본적 규칙의 준수에 대한 학습과 습관화를 위한 훈련에 효율성을 기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핵가족 제도의 발달로 인하여 가정의 전통적 교육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양적으로 팽창된 지식교육의 비중으로 인하여 학교는 인성교육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이 위축되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다섯째로, 황금이나 권력 등의 사회적 위세나 힘을 추구하는 풍토가 만연해 가는 현상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는 문제의식이 있다. 고도의 산업화 과정에 부수하는 현상인 재산, 권력, 명예, 향락, 소비 등을 분별없이 추구하는 추세가 야기하는 각종의 사회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있다.

즉 이러한 경향은 ‘가치관적 차원의 도덕성’에 혼란이 발생한 결과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농경사회의 정태적 생활에서 벗어나서, 산업사회의 역동적 구조를 경험하고, 정보사회의 유동적 환경에 매몰되면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거의 전면적이라고 할 정도로 바뀔 수가 있다. 행복한 생활의 조건이 달라진다. 예견되는 미래가 새롭게 조망되면 자연스럽게 적응의 형태와 추구하는 가치의 체계가 달라진다.

여섯째로, 과학과 기술의 발달 그 자체가 인간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우려가 있다. 과학과 기술은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인간의 삶의 조건을 바꾸어 놓는 문화적 위세를 보여 왔다.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하게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 그 자체가 특히 생명공학, 환경생태학의 영역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문제, 그리고 정보사회적 개방화와 기계화로 인한 생활조건과 행동양태의 변화로 인한 문제 등은 과거에 예측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윤리적 쟁점들을 생산하고 있다.

포스트만(Neil Postman)은 《테크노폴리(Technopoly)》라는 책의 서문에서 “걷잡을 수 없는 기술공학의 발전은 우리의 인간성에 내재하는 활력의 원천적 요소들을 파괴하고 도덕적 기반이 없는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하였다.4)

과학주의 혹은 기술주의는 ‘계량화’, ‘객관화’와 같은 자체의 논리로써 정당화하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적용하며, 그것이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자체의 관료주의적 힘을 발휘하여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면, 종교, 예술, 가족, 정치, 역사, 진리, 지성 등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규정된다.

기술공학은 친구이기도 하고 적이기도 하다. 문명의 이기로서의 일면과 도덕적 무법자로서의 일면을 함께 소유하고 있다는 양면성에 대한 우려가 있다. 이밖에도 특정한 종교의 관점에서 심령적-정신적 빈곤을 의식하거나, 분배정의의 관점에서 계층 간의 경제적-문화적 격차를 우려하거나, 정치 이념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경계하거나, 사회 통합의 관점에서 배타적 지역감정이나 계층적 갈등을 문제로 삼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도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 문제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원인이나 치유가 일차적으로 도덕적 진단이나 처방만을 요하는 것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문제의식의 범주들은 배타적으로 엄격히 구분되지 않으며 개념적으로나 인과적으로나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관심의 강도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계층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세계적 환경의 영향에 따라서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종래의 전통적 규범이나 가치기준으로써는 사고와 행동의 옳고 그름 그 자체의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새로운 생활영역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급격하면 ‘무규범’이 지배하는 생활세계가 확장되어 간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존재한다.

인성교육의 과제 : 도덕적 자율성과 인격의 성장

젊은이들의 도덕성은 전통적 규범의 학습과 더불어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에 고착되어 버리는 것은 유동적 세계를 등지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의 소용돌이 그 자체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통적 규범은 언제나 반드시 고정된 형태의 실천적 행동으로 준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고정된 행동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현실적 삶에서 적합성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이미 잊어버렸거나 폐기된 낡은 가치를 담고 있거나 혹은 유효성을 잃은 규칙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해석에 있어서 사람마다의 자율성과 상황적 다양성을 허용하면, 전통적 규범의 체제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장식할 도덕적 가치의 원형을 제공한다. 함의된 가치와 의미는 이해와 해석에 따라서 여전히 우리의 생활에 유관하고, 적어도 새로운 규칙을 생산하는 데 반성적 노력의 자료가 될 수 있다. 성장과 함께 발달되어야 할 도덕적 자율성도 여기서 발아한다.

교육, 특히 학교가 담당해야 할 인성교육의 과제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각자의 자율적 도덕성에 의한 성장을 돕는 일이다. 우선 잠정적으로 밝히면, ‘자율적 도덕성’은 도덕적 규칙, 기준, 가치, 원리와 그 체제를 스스로 형성하고 다듬어 가면서 자신의 습관체제를 일관되게 구축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율적 도덕성은 전통적 가치체제를 탈피하거나 폐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념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성찰하고 재해적하고 선택하는 일로 시작된다. 변화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온갖 새로운 요소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다룬다. 필요한 경우에 자신의 행위와 삶의 규칙을 제정하기도 한다. 자율적 도덕성은 자신이 스스로 성장하는 데 요구되는 가치와 방향을 항상 반성적으로 검토하면서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다듬어 가는 삶의 특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도덕적 자율성(혹은 자율적 도덕성)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논의된 습관의 개념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흔히 습관은 다소 덜 반성적이고 특징상 기계적 반복성을 지닌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듀이가 언급하였듯이 습관의 개념은 구체적 행동의 반복만이 아니라 다소 항구적으로 지니고 있는 일정한 반응의 양상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5)

문제사태에 임하면 그 해결을 위하여 생각하는 습관, 주어진 사태에 이지적으로 대응하는 습관 등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지만 일종의 습관이다. 이러한 습관은 가시적 행동의 기계적 반복을 의미하는 구체적 습관과는 구별된다. 이름을 붙인다면 ‘반성적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 습관보다 인성에 관한 논의에서는 더욱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준다.

뿐만 아니라, 추상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습관의 의미는 더욱 포괄적인 도덕성의 개념을 성립시킬 수 있게 하는 문을 열어준다. 인지적 도덕성과 실천적 도덕성, 이 두 가지 범주를 넘어서 우리가 더욱 의미 있게 검토해야 할 제3의 도덕성의 개념이 있다. 즉 ‘인격’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인격은 그 자체로서 읽힌다기보다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개별적인 행동이나 습관을 통하여 읽힐 수 있다.

인격은 개체가 지닌 모든 도덕적 습관들의 통합된 양식이기도 하다. 하나의 인격은 수많은 습관들로 형성된 것이지만,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습관’이기도 하면서 다른 개체와 구별 짓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전인교육의 표적이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습관은 낱낱으로 언급되지만, 그것들은 각기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능적 단위가 아니다. 나의 습관이란, 그것이 참으로 습관이라면, 나의 인격의 체제와 무관한 우연적 행동이나 태도나 사고의 방식이 아니다.

습관은 낱개로도 읽히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은 통합된 체제의 일면적 특징이지 결코 낱개 그 자체이거나 기계적으로 연결된 구조적 부분이 아니다. 습관은 인격의 한 부분적인, 일면적인, 혹은 한 차원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습관은 단순한 행동적 경향성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은 지식을 담으며 어떤 것은 사상을 담으며 어떤 것은 감정을 담는다. 가치관이나 사상체제나 신념체제와 같은 의식구조도 한 차원의 습관이며, 지식이나 기술이나 정서도 한 차원의 습관으로서 인격 속에 내축된 것이다. 습관의 형태로 소유되지 않는 한, 지식은 망각되며, 기술은 재생이 불가능하고, 기능은 상실되며, 감각은 덧없는 것이 되고, 가치관은 붕괴되며, 안목은 찰나적인 것일 뿐이다.

인격의 성장은 습관체제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의 개념은 도덕적으로 통합된 신념을 소유하고 일관된 실천적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낼 때 사용된다. 어떤 사람의 성품을 평가하여 ‘고매하다’든가 ‘어질다’든가 할 때 우리는 인격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찬사는 본성이나 충동 등을 다스리면서 자신을 성장시켜 놓은 성취와 업적의 평가로서 주어지는 것이다.6)

그러므로 ‘인격’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함의하고 있다. ‘인격자’라고 하면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말하고, 그 인품의 고결함, 즉 이지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일관성을 지닌 통합된 도덕성을 암시한다.

인격의 사회성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게 순수이 자연적 환경과 더불어 성취한 것을 우리는 인격의 요소라고 하지 않는다. 인격은 오히려 사회적 관계, 사회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삶의 과정에서 성취한 것이다. 그가 성취한 것은 지식, 사상, 관습, 제도, 기술, 감정 등의 문화적 요소들과의 융합을 통한 성취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그가 자신에 대하여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인격의 특징에 영향을 준다. 인격에 통합되지 않은 기술이나 감정, 그리고 지식이나 사상은 적어도 교육적 성장의 내용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독선적 사상이나 기계적으로 암기된 지식이나 맹목적인 관습의 추종이나 고도로 숙련된 도벽의 기술 등도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은 고립된 성장일 뿐이고 다른 부문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통합된 인격체 밖의 성장이다. 통합되지 못한 요소들과는 교육적으로 유의미한 성장을 말할 수가 없다.

개체와 인격의 관계는 사회와 문화의 관계와 같다. 사회적 차원의 문화의 개념과 개체적 차원의 인격의 개념은 서로 병행하는 관계에 있다. 문화가 물리적 자연에 대하여 사회가 성취한 업적인 것과 같이 인격도 본성에 대하여 개체가 성취한 업적이다. 문화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규칙의 체제를 담고 있는 것과 같이 인격도 개체가 자신의 삶을 사는 규칙의 체제를 내축하고 있다.

문화가 사회적 구성원들이 전체로서 추구하는 사상과 가치와 관습의 체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인격도 자신의 신념과 욕구와 행동을 포함하고 있다. 문화가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인격도 개성을 지니고 있다. 문화가 발달하기도 하고 퇴화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하는 것과 같이 인격도 성장하기도 하고 퇴행하기도 하고 균열되기도 한다.

사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문화가 성장한다는 것이며 개체가 성장한다는 것은 인격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문화는 제도로서 표현되며 인격은 습관으로 표현된다. 교육적 성장은 개체와 사회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상호작용하는 개체 측의 주체는 인격이며 사회 측의 주체는 문화이다.

한 개체의 인격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와 거래하면서 성장한다. 문화가 고착되어 있으면 인격도 고착되며, 문화가 혼란스러우면 인격도 혼란스럽고, 문화가 지나치게 가변적이면 인격도 가변적이다.

인격은 사회의 문화적 조건과 함께 형성되고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러므로 요약컨대, 인성교육은 문화로서 존재하는 관습적 규범을 내면화한 최소한의 구체적 습관으로 시작하여 인지적 능력의 발달과 함께 사회의 문화적 환경에 적응하는 반성적 습관을 구축하며, 그런 과정에서 도덕적 자율성을 성숙시키고 통합된 인격의 계속적인 성장을 돕는 일이다.

적어도 학교의 윤리교육 혹은 인성교육이 지향하는 목적은 이러한 인격체, 즉 관습과 전통을 수용하고 계속적인 변화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습관체제와 그 성장 동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있다.

1) Zigmunt Bauman, Culture in a Liquid Modern World, tarns. from Polish by L. Bauman (Malden, MA, USA : Polity Press, 2011), p. 11.
2) Z. Bauman,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Malden, MA : Polity Press, 2007), p. 7.
3) Neil Postman, Technology (New York: Vintage Books, 1993), p. 70.
4) 위의 책, xii.
5) ohn Dewey, Human Nature and Conduct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1957), p. 41.
6) R.S. Peters, “Moral Education and Psychology of Character,” Israel Scheffler. ed. Philosophy and Education (Boston: Allyn and
Bacon, 1958), p. 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