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만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과거(科擧)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교육을 수반하지 않는 관리등용시험이라는 점에 있다. 역대의 왕조는 돈이 드는 교육을 완전히 민간에 위임하고 민간에서 자연히 육성되었던 유능한 인물을 단지 시험을 통해 선발하여 정부의 필요에 유용하게 사용하려고했다. … 그러나 한편 중국의 교육제도는 구미(歐美)에 비하여 매우 늦게 성립하였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중국의 교육제도는 지금으로부터 1천년 훨씬 이전인 송대(宋代)를 기점으로 하여 이후 점차 내리막길을 거쳐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 인용문은 일본의 과거연구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중국의 시험지옥-과거》(1989)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한 마디로 동아시아의 전통교육은 과거라는 시험제도 때문에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방식은 이 연구자 개인에게 그치지 않고, 일본의 동아시아 교육사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의 교육사 연구자들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현대의 각 나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험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야자키 자신도 이 책을 쓸 당시의 일본교육을 입시경쟁으로 피폐화된 ‘시험지옥’으로 묘사하였다.

이처럼 시험이 전통시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교육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은 일반적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경쟁이 심한 나라에서는 입시위주의 교육, 사교육의 병폐, 공교육의 몰락과 같은 문제가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다. 단편적인 암기위주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요인도 시험 때문이고, 사설학원이 번창하는 이유도 시험 때문이며, 공교육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까닭도 시험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한국에서 교육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하여 정책을 시행했음에도 시험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증가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한국교육 문제의 원인을 시험으로 지목하고 그 대책을 마련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까지는 주로 처방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이 때문에 교육부 장관이 바뀔때마다 새로운 버전의 대책이 시행된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조치를 취했음에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처방이 문제가 아니라 진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보면, 입시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그 자체가 독립적인 원인이 아니라, 어떤 다른 요인 때문에 발생한 또 다른 증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추론의 가능성은 조선후기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통시대의 교육에서 주로 주목하는 것은 과거시험이지만, 조선후기에는 이러한 관리임용시험 이외에도 각종 학교시험이 시행되고 있었다.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강·절제, 사학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승보·합제, 경향 유생(京鄕儒生)을 대상으로 하는 통독 그리고 각 도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공도회 등이 그것이고, 이들 시험을 통칭해서 과시(課試)라고 했다.

과거를 조선시대 교육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다면, 이러한 과시는 또 하나의 병폐가 가중된 현상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당시인의 진술을 보면, 이 과시를 그저 교육에 악영향을 미치는 원흉으로만 간주하기 어렵게 된다.

성균관(成均館)이 이미 주자(冑子)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고, 사학(四學)이 또한 과시(課試)를 주관하고 있으니, 선비를 교육하는 방도가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서울과 지방에는 모두 《청금록(靑衿錄)》이 있어 사족의 자제를 선택하고 있고, 또 서재(西齋)를 설립하여 서민의 자제를 거처하게 하고 있으며, 유사(有司)·장의(掌議)·색장(色掌) 등을 두어 사류(士類)의 영수(領袖)가 되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학제(學制)가 이처럼 두루 세밀한데도 반드시 번잡하게 고치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기록은 유수원이 《우서》에서 소개한 내용으로, 18세기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진 견해를 요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과시는 조선 후기 학교제도 운영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유수원 자신은 이러한 과시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과시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고, 심지어 조선후기 상당수의 인재들은 이 과시를 통해 입신하고 있었다. 17세기의 송준길, 18세기의 정약용, 19세기의 김정희·최익현 그리고 이완용까지도 과시출신자이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에 왜 과시가 학교제도 운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을까? 조선전기에 우등생에게 표창함으로써 유생의 학업을 장려하던 시험에 불과하던 과시가 조선후기에 이처럼 모든 유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을까? 현재로서는 추론의 단계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두 가지 요인이 상호 연계하여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된다.

하나는 양인(良人) 이상이라면 유생의 자격을 얻을 수 있고, 또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기본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후기에 교육재정이 열악해졌다는 현실이다. 조선전기에는 교육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첫 번째 원칙을 유지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학교에서 수용해야 할 교육인구가 많지 않고, 그에 따른 재정적 부담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교육인구는 급증하는데, 교육재정은 오히려 감소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이 취할 수 있는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전의 학교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교육에 대한 수요를 억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태에 대응하는 새로운 제도운영방식을 마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조정의 선택은 후자였고, 이때 과시는 효과적인 정책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과시는 다양한 경로로 모든 유생에게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생들의 교육적 요구, 즉 교육을 통해 계층 상승을 하려는 욕구에 부응할 수 있었고, 이에 비하여 비용은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조선의 유생층 인구가 110만 명, 서당수가 1만 6000개로 조사된 배경에는 이러한 시험제도가 작동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일견 앞에서 인용한 미야자키의 견해, 즉 ‘돈이 드는 교육을 민간에게 위임하고, 시험을 통해 관리를 임용하는 제도’처럼 보인다. 실제로 조선후기에는 관학의 규모는 줄어들고, 학교에서의 일상적인 교육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논의하였듯이, 당시 교육 문제를 과시와 같은 시험제도가 그 원흉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는 없다. 그 자체가 새로운 유형의 교육제도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과시는 조선후기 교육제도의 문제를 설명하는 원인이기 보다는, 그 자체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야 하는 대상이 되는 셈이다. 아마도 그 요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 교육문제의 근본 원인과 함께 그 성과까지도 심층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교육에서 각종 시험도 조선후기의 과시와 같은 연구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한국교육에서 각종 시험이 강화된 요인은 무엇일까?’, ‘그 시험들이 교육제도 운영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새삼스럽게 요구된다는 말이다. 한국교육 문제의 상당부분이 시험과 관련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한국 교육의 독특한 현상이라면 이 문제를 규명하는 작업은 한국교육학의 이론적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