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덕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공교육 제도와 역할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교육 제도는 선례가 없는 위기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오랫동안 고질적인 문제로 여겨졌던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파생된 과잉 사교육 문제 및 공교육의 부실은 보다복잡하고 거대한 경제적·사회적·세계사적 흐름과 만나면서 문제의 성격과 그 규모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 시대를 지나며 전통적 권위 체계가 사회 전반에 걸쳐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권에 대한 목소리는 높아지고 교육에서 교사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왔다.

1990년대 이래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흐름은 성과와 효율 중심의 학교 운영과 더불어 교육에서의 경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정보 산업을 위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서비스 업 종을 중심으로 하는 탈산업화 경제 구조로의 편입은 ‘지식사회의 등장’을 알리며 민간경제에서 성공할 수 있는 ‘지식생산자’를 육성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학교 교육에 요구하고있다.

그리고 세계화에 의한 문화적·도덕적 다원주의, 개인주의, 사회적 이질성의 증가 및 집단 간 단절성의 확대는 수평적이고 유동적이며 단기적 사회관계들을 학교 문화에까지 일상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는 점차 시장이 요구하는 성공적인 지식 인재를 길러내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도록 압박받고, 개인은 학교를 지식을 사거나 자격증을 취득하는 곳으로 바라보는 등 학교 교육에 대한 도구적 사고가 일상 속으로 깊이 침투하고 있는 중이다.

학교는 더 이상 전통적으로 여겨지던 교육활동, 즉 ‘지식 전달’과 ‘인격의 형성’이라는 핵심적 활동에 전념하지 못한 채 이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학자들이 말하듯이(Sloterdijk, 1987), 이러한 현상은 과히 ‘교육의 종말’(The Endof Education)이라고 불릴만하다.

공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요구

공교육을 둘러싼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여건과 교육환경의 변화는 19세기 서구에서 탄생하여 지금까지 발전해 온 근대 공교육 제도에 깔려 있는 보편적 교육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기술된 ‘교육의 종말’ 현상은 많은 서구 자유주의 국가의 공교육 제도가 근간으로 해온 핵심 이념 중의 하나인 ‘합리적 자유주의 교육이념’의 쇠퇴를 두드러지게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자유주의 교육이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근대 공교육 제도의 근간이 되어 왔다. 한편으로 이것은 교육의 본질적 이상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국가가 지원하는 보편적 학교 교육을통하여 국민 개개인을 합리적 근대의식으로 계몽시키고 이를 통해 사회적 진보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근대 평등주의적 정치 이념을 정당화하는 도구적 기능으로서, 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기초한 사회적 보상의 메커니즘으로 타고난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사회적 계층이 동의 합법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1980년대 이래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교육철학자들은 교육의 본질적 목적과 도구적, 정치적 기능을 양 날개로 하는 이러한 합리적 자유주의 교육이념은 그 자체가 모순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실제로 근대 공교육은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인 합리적 근대 의식의 형성이라는 계몽적 이상을 뒤로 한 채 계산적이고 도구적인 이성 중심의 원자적 개인을 양산해 왔고, 공교육이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불평등 문제의 해결에 공헌하리라는 근대적 기획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환상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Kohli, 1996; Hargreaves,2003).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모더니즘의 비판

합리적 자유주의 교육이념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오늘날 학교 교육 담론뿐 아니라 실제 교육과정 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모더니즘의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는 ‘인식론적 비판’이다. 근대 학교교육의 이념 및 교육과정에 전제된 ‘합리성’의 개념과 이에 붙박혀 있는 객관적 지식관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합리성은 진리 탐구의 근본적 방법으로서 ‘데카르트적 합리성’으로 불리는 것이다.

‘순수한 앎의 대상으로서 세계가 지닌 한계와 본질을 합리적으로 설정하려는 개인 중심적인 시도(Burbules, p.184)’에 대한 비판이다.

철학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끈 이들로 평가받는 Alasdair MacIntyre나 Richard Rorty와 같은 반정초주의 현대 철학자들은 ‘어떤 종류의 문제에 봉착하더라도 올바른 해답에 도달하는유일한 절차(Burbules, p. 184)가 있다’고 가정하며 논리적 추론, 엄격한 규칙에 따른 증거 제시, 감정의 회피를 탐구방법의 핵심으로 삼는 데카르트적인 객관적 지식관을, 그것에 내재한 인식론적 모순과 한계를 보이는 방식으로 해체시킨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비판’이다. 이것은 주로 후기구조주의, 여성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데, ‘이성에 대한 분노(Burbules, p. 186)’로 표현되는 비판이다. 이들은 근대 ‘합리성’의 개념이 지닌 인식론적 모순보다는 이 개념을 통하여 ‘서구·백인·남성’ 집단이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해 왔는지에 주목한다.

다시 말하면, 근대 학교 교육의 조직과 운영, 교육과정 전체를 지배해 온 합리성의 이념이 공식적으로는 자율성이나 자유, 정의, 평등 등과 같은 정치적 가치를 표방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지배와 억압, 억제, 폭력, 전체성,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실제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 작동 방식을 폭로한다. 이것은 정치적·윤리적 동기에서 나오는 근대성 비판으로 볼 수 있다.

근대성 비판 담론이 가져온 전통적인 학교 교육과정 변화

이러한 두 가지 방향에서의 근대성 비판 담론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전통적인 학교 교육과정에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공식적 교육과정을 지배하던 주지주의적 자유교육론에 전제된 객관적 지식관을 대체할 새로운 지식관의 등장이다. 지식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를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구성주의적 지식관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지식교육의 목적은 더 이상 지식을 전달하여 참인 것으로 알려진 더 많은 지식을 알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재구성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는 고차적 사고능력을 육성해 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업에서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은 체계적인 명제적 지식(Knowingthat)의 습득이 아니라 방법적 지식(Knowing-how)의 습득으로서, 다양한 문화나 사고의 양태(A mode ofknowing)로의 입문을 통한 우리 존재 방식의 변화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학교문화에 대한 정치적ㆍ문화적 비판도 등장한다. 이것은 주지주의적인 ‘공식적’ 교육과정 자체가 특정 계층의 이익과 가치를 대변하는 문화를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또 이를 암묵적으로 정당화하여 사회 전체의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는 비판이다. 그리하여 비판자들은 학교의 교육과정을 잠재적 혹은 숨은 교육과정에까지 확대하여, 학교문화의 변화를 교육과정의 핵심적 과제로 삼으려고 한다.

이들은 학교의 문화와 교육과정에 대해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식해온 방식들에 도전함으로써 비형식적 교육과정으로서 학교 문화나 학교 구성원들 간의 상호 작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지식교육과 관련한 쟁점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오늘날 학교 교육은 근대 공교육의 두 가지 이념, 즉,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평등주의적 근대 정치 이념의 실현에 기여하는 사회적 역할을 지속할 것
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지식경제사회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해 보이는 시장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교육적 본분을 다할 수 있는 대안적 자유교육론은 가능할까?’

아래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연루된 주요한 교육적 쟁점, 특히 지식교육과 관련한 쟁점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객관적 지식관에서 구성주의적 지식관으로의 변화는 공식적 교육과정의 구성 원리의 전환을 요청한다. 전통적 교육과정에서는 어떤 지식이 전달될 가치가 있으며 어떤 형태로 전달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져 왔다.

전통적인 주지주의 교육과정은 분과 학문에 기초한 교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분과 학문적 교과내용을 계열에 따라 그리고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교육 운영의 핵심 원리로 삼았다.

대표적인 주지주의 자유교육론자인 영국의 교육철학자 Paul Hirst(1965)에 따르면, 교육내용으로서 학문적 지식은독특한 개념적, 논리적, 방법론적 특성들의 분석에 토대를 두고 우리의 경험을 범주화하는 질서의 양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방대한 상징적 표현들의 체계를 넘어서서 인간 마음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지식의 획득은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의 경험을 특수한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조직화하여 우리의 합리적 마음을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 지식의 습득을 통해 합리적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개념 체계를 수단으로 해서 우리 자신의 경험을 명료화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주지주의적 자유교육론에 따르면, 학문적 교과 형태의 논리적, 직선적, 이론적 지식은 모든 아이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교육의 내용이 되고, 그 ‘지식의 전달’ 혹은 ‘지식내용에 대한 숙달’이 주요 교육방법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통적 교과 중심의 교육내용은 누구나 배워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학교는 이를 ‘공통과목’으로 삼아 모두에게 가르치는 것을 일차적 교육목표로 해야 한다. 그리고 공교육은 개인차나 개인의 성장보다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사회통합을 위한 그 사회 규범으로의 ‘사회화’와 더불어 개인의 합리적 마음의 발달을 위한 ‘지적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국민 공통과목 중심의 교육과정을 지배적으로 운영하도록 요청받는다.

Hirst의 주지주의적 지식관과 미국의 교육철학자 Maxine Green

Hirst의 주지주의적 지식관은 경험 이해의 방식인 ‘지식의 형식’을 인간 마음의 성취물로 보고, 우리가 학습을 통해 이를 획득할 수 있으며 또 소통 가능한 ‘공적인 언어’로 전환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능동적인’ 근대적 마음관을 전제한다.

그러나 지식의 형식의 내면화 자체가 곧 합리적 마음을 발달시킬 것이라고 보며, 합리적 마음의 발달을 지식 교육의 일차적 목적으로 본 것은 교육 내용에서 이론적 지식을 특권화하게 하는데, 이것은 합리성을 이론적 지식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근대적 마음관의 편협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주지주의적 지식관에 반대하는 미국의 교육철학자 Maxine Green(2010, pp. 42-45)에 따르면, 지식은 공유된 세계에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 발생한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지식의 획득은 개별적 마음에 의한 획득이 아니라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과 그것의 축적에서 유래하며 그와 동시에 공적 지식체계라고 여기는 것들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즉, 사회적 실재로서의 세계는 구성된 것이며, 세계에 대한 지식은 해석된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Green, “우리는 종종 비교불가능한 다양한 언어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다”

Green에 따르면(2010, p. 43), 지식의 토대가 되는 해석은 주관적이고 상식적 이해의 양식에서 출발하지만 우리의 선조나 동시대인들이 활용해 온 도식들에 의해 점차 구조화되고 유형화된다.

그리고 이 도식들은 보편적인 의미 체계가 아니라 특수한 의미 체계 혹은 담론이다. 즉, 사회적 세계 속에서 이것이 차지하는 위치나 다른 우연적 요소들과의 관련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참이라고 믿고 있는 신념이나 선 혹은 정의는 우리 자신이 우연히 속하게 되고 헌신하게 된 특정 세계관과 도덕관의 언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하더라도 참과 선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나 사실이 하루아침에 무용한 것이 되거나 더이상 객관적으로 타당하지 않게 되는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관과 도덕관은 개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의미체계의 역사적 우연성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체계를 내던져 버리거나 여기에 깔려 있는 세계관이나 도덕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살아 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Green의 묘사에 따르면(2010, p. 43), 우리는 종종 비교 불가능한 다양한 언어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적 구성주의 지식관에 따른 학교교육과정의 목적은?

이러한 사회적 구성주의 지식관을 따른다면 학교 교육과정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만약 ‘지식이나 문화가 부분적으로 토론의 그물망, 상호 교차하는 텍스트나 담론, 혹은 코드의 총체’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교육을 ‘쓰거나 말하는 대화속으로 젊은이들을 입문(Green, 2010, p.44)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의미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고, 진정한 교육은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세계를 보는 방법들을 학습자가 자신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재학습하게 하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된 경험으로 이해하는 한 보는 방법을 학습하는 것은 간주관성 자체, 즉 나와 다르게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고 바라보는 타인과 더불어 세계를 성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교육적으로 중요한 것이 ‘다원성과 다원화의 가치’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각각 다원성과 독특성의 원칙, 어떤 한 사람도 다른 사람의 복제물이 될 수 없다는 관점에 비추어 고려하고, 우리 각자의 정체성의 원천이 되는 상이한 문화와 문명의 가치와 힘에 대해 상호 인정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 속 과거와 이 과거에 대한 연구 유산물에 대한 기존의 우리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명명하며 관심을 갖는 다양한 방식들, 우리 자신의 그것과 다른 그 방식들에 주목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교교육과정에서 다양한 교수 방법을 강조한다

이러한 Green의 주장은 학교교육과정의 운영원리, 특히 교육내용과 방법에 관하여 어떤 구체적 함의를 주는가? 교육내용은 표준적 텍스트를 활용하되 그 표준적 텍스트의 범위를 점차 확장시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교육방법은 그 방법의 단일한 정당성의 원천을 찾거나 단일한 표준이나 규범의 내면화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을 피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영향 아래의 학교 교육과정은 다양한 양식의 논리성을 허용하고, 국지적 담론, 작은 서사, 자서전적 접근 등을 교수 방법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교육과정에서는 유의미한 합의는 가능하지도 않고 또 의미도 없다고 간주할 것이다. 대화라는 것은 꼭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즉 합의가 없더라도 서로가 상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 배움의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러한 교육과정은 세계를 지각하고 이해하며 수용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이해를 강조할 것이다. 이것은 특정 지식이나 텍스트를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단순히 자신에게 유의미한 방식으로 재구성해나가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재구성해 나가는 자신의 방식이나 타인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지식교육이 단순한 지시적 진술의 집합이나 단선적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다양한 서사와 실천적 판단을 포함하여 살아가는 방법, 말하는 방법, 듣는 법 등을 가르치는 것도 결국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지식은 모종의 기준을 결정하고 적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양한 인간들이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복잡한 상호교섭의 맥락에서 규정된다는 사실의 인식을 통해, 지식교육 또한 상황적 지식과 맥락적 사고를 발달시키는 다양한 발화의 방식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 가져온 교육 과정상의 공통된 변화

전통적 주지주의 교육과정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 가져온 교육과 정상의 변화 중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주어진 지식내용에 대한 숙달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의미 있게 해석하고 능동적으로 재구성하거나, 또 해체해 내는 학습자의 주체적 능력에 대한 강조이다.

이러한 ‘관심의 이동’은 학습 주체의 흥미와 능력뿐 아니라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 및 관점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나아가고, 결과적으로 학습 주체가 교육 내용과 자신의 경험을 유의미하게 연결 짓는 다양한 개인적 방식들로서 내러티브나 실천적·개인적 지식, 그리고 실천적 수행 능력에 대한 교육연구를 왕성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학습자중심교육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으로의 선회이지만, 20세기 초 서구사회에서 전통적 교육에 대항하여 등장한 진보적 교육운동의 단순한 역사적 반복으로 볼 수는 없다.오히려 상호 경쟁해온 전통적 교육과 진보적 교육이라는 두 가지 서구 근대교육 모형에 대한 새로운 대응으로서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학습자의 개별적 관심과 경험을 중시하지만, 그 학습자가 처해 있는 보다 큰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대한 이해 또한 그 학습자의 교육적 경험에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역량중심 교육과정, 전통적 주지주의 교육과정의 대안으로 떠오르다

이러한 큰 교육적 흐름과 배경 속에서 전통적 주지주의 교육과정에 대한 대안으로 최근 등장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역량중심 교육과정’이다.

소경희(2007)에 따르면, ‘역량’(Competency)은 본래 직업 훈련과 같은 경제 분야에 국한되어 사용되어 온 용어로서 숙달하고자 하는 직무나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는 것과 관련된 개념이다. 그러나 최근 OECD에서 ‘역량’을 우리의 전체적인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재개념화하면서 학교 교육과 관련된 논의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사실 역량에 대한 담론은 폭넓은 지식과 이해의 획득에 주로 초점을 두는 ‘주지주의적 자유교육이 직업인으로 구성된 21세기 미래사회에서도 여전히 개인의 삶의 질을 의미 있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주지주의적 자유교육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실제적 요구나 직업을 위한 전문적 필요에 대처할 수있는 실천적 지식이나 기술을 무시해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역량 담론은 전통적 교육과정이 급변하는 사회적·경제적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역량’이란 지식과 인지적 ․ 실천적 기술뿐만 아니라 태도, 감정, 가치, 동기 등과 같은 사회적·행동적 요소를 가동시킴으로써 특정 맥락의 복잡한 요구를 성공적으로 충족시키는 통합적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21세기를 위한 교육은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역량을 미리 추출하여 학교는 이 역량을 키울수 있는 방식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성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량중심 교육과정은 호주나 뉴질랜드의 경우 국가 교육과정의 핵심적 원리로 도입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학교 교육의 직업화를 조장하고 전통적 자유교육을 훼손한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소경희(2007, p. 12)에 따르면, 역량 중심적 접근은 학교교육의 내용이 학생들에게 ‘향후 사회적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로 하는 능력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교육과정의 개인적·사회적 적합성 제고에 공헌한다고 주장한다.

즉 역량중심교육과정은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을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 더 ‘의미 있게’ 구성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역량을 강화하는 교육내용에는 사회적 실제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태도만이 아니라 종래에 다루어 온 교과 지식도 의미 있게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서 교과가 역량의 형성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때 교과지식은 전통적 자유교육에서의 지식의 역할과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그리 분명치 않다.

즉 교과지식의 습득이 역량 개념이 강조하는 개인의 성장이나 삶의 질 향상과 같은 교육적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 역량 개념이 이것을 어떻게 매개하는지 좀 더 명료하게 밝혀질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역량’의 개념이 경제적 영역의 용어에서 교육영역의 개념으로 의미 있게 전환되기 위해서는 그 개념에 대한 보다 정교한 분석과 재구성이 동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지주의적 자유교육관은 수정되고 변형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공교육 제도는 그리고 이 제도를 지배해 온 전통적 교육과정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위기는 그 성격상 복합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적 경향은 지식사회라 불리는 새로운 지식경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경제인력 양산을 위해 학교 교육과정의 재편을 압박하고 있다. 다른 한편, 근대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공교육 제도의 기본이념이 되어 온 합리적 자유주의를 인식론적 편협성과 정치적 억압성을 들어 그 타당성을 의심하고 있다.

이러한 내외의 환경과 도전에 직면하여 전통적으로 학교 교육과정의 주요 이념이 되어온 주지주의적 자유교육관은 수정되고 변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수정과 변형의 과정에서, 경제적 환경의 요구보다는 사회 · 정치적 환경의 요구에 좀더 민감한 ‘교육적 고려’가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존 듀이의 말처럼 교육은 궁극적으로 한 인간 개체의 전체적 성장을 그 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일이고, 사회정치적 환경은 보다 주체적이고 보다 자유로운 개인적 삶과 사회적 공동체의 가능성과 확장 여부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자유주의 이념은 근대 공교육 체제의 정치적 기능을 정당화 해왔다. 이 기능에 의문을 제기하는 온건한 포스트모더니스트, 그리고 비판적 모더니스트 교육철학자들은 대체로 탈근대 사회 공교육 제도를 정당화할 새로운 이념 중의 하나로 ‘다원적 자유민주주의’를 들고 있다.

이들은 이 이념을 통해 새롭게 정당화될 수 있는 공교육의 구체적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탐색 중이다. 예를 들어 그 중의 하나인 공동체주의적 관점은, ‘교육받은 사람(The Educated Person)’이 아니라 ‘교육받은 공중(The Educated Public)(MacIntyre, 1987)’을 길러내야 한다는의미에서 ‘공공성’이라는 최소한의 가치를 충족시키는 다양한 유형의 공교육 기관을 국가가 허용하도록 요청한다. 이 경우, 얼마나 타당하고 설득적인 ‘교육받은 공중’의 개념을 표방하느냐가 그 공교육 모형의 성격과 가치를 판단하는 핵심적 기준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