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자연 상태로 있는 것도 있고 인간의 어떤 힘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도 있다. 전자는 그냥 ‘자연’이라고 하고 후자는 ‘문화’라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세계에서 인간의 힘이 어떤 변화도 성취도 흔적도 남길 수가 없다. 결국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거기에 인간이 변화를 가져 오고 무엇인가를 만들어간다. 말하자면 문화가 형성된다.

그러한 변화에 작용하는 인간의 행동, 욕구, 의지, 사유의 특징과 그 체제가 문화를 생성케 하는 원천적인 힘이다. 그 힘의 작용으로 의식주의 형태, 관습과 풍속, 그리고 각종의 제도 등에서부터 종교, 예술, 학문, 사상 등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그 모두를 가장 넓은 의미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좁은 의미로 흔히 사용하는 ‘문화’는 일상적 생활 속에서 주로 ‘향유하고 공유하는’ 즉 ‘즐기거나 교감하는’ 차원의 것을 말한다. 그 범위를 한정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예술, 오
락, 놀이, 유행, 스포츠, 취미, 여가활동 등이 있고 그 각각도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의미의 문화는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객관적 생활여건의 반영이기도 하고, 또한 그들의 생활 자체와 그들이 지닌 감정 혹은 의식의 직접적 반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속한 사회계층의 차이는 서로 다른 문화의 형태와 특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귀족계급 혹은 지배계층의 ‘고급문화’와 서민계급 혹은 평민계층의 ‘민속문화’의 장르로 구분되어 왔다. 근대에 이르러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고도의 산업화와 도시화 현상이 진행되면서 나타난 거대한 군집현상을 ‘대중사회’라고 하고, 그 속에서 대중이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문화를 일컬어 ‘대중문화’라고 하여 전통적인 고급문화와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부터 지상파 방송의 상업화가 본격화되고, 1990년대 들어 케이블 TV, 위성방송 등이 활성화되면서기업자본이 문화산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문화콘텐츠의 기획이 영화제작 등에 반영되면서 우리사회에 대중문화의 관심과 비중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대중문화의 장르도 영화, 드라마, 가요, 팝송, 무용, 춤, 음반, 게임, 만화, 스포츠 등 다양해지고 관심영역이 새로이 확장되고 있다. 최근에 와서, 특히 2000년대에는 우리의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활기를 띠면서 국내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판도가 크게 확장되었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는 물론, 네팔, 이란, 호주 등에도, 지금은 유럽과 중남미 지역에도, 최근에는 미국에까지 소위 ‘한류(韓流)’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진출을 하고 있다. 한류는 한국을 대중문화의 주도국으로 인식시키는 국위선양도 하고, 한국어에 대한 국제적 관심도도 높이고, 수출산업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경제적 측면의 의미도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규격화된 내용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체제로 인하여 상업주의가 편승하면, 자칫 찰나적 유행성과 저질성이 일상적 생활인들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없지 않다.

대중문화는 그 근원부터가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개된 군집사회의 특징으로 인하여 자본주의적 메카니즘이 편승하면서 발달하였다. 시장과 상품의 개념이 대중문화의 세계를 잠식하게 되면 이윤의 추구를 위한 상업주의, 심하면 저속한 퇴폐주의에 흘러버릴 수도 있다.

교육적 대응의 필요성

고급문화는 전통적으로 귀족사회를 비롯한 상류사회가 향유한 것으로서 제도적 교육과의 관련 속에서 전문적으로 생산되고 체계적으로 소비해 오면서 질적으로 다듬어지고 창조적으로 계승된 것이다.

이에 비하여 대중문화는 그야말로 대중이 생활하면서 호흡하는 순박하고 친근한 문화이기는 하지만, 교육적으로 방치된 상태에 있어 왔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는 왜 제도적 교육에서 외면되어 왔는가? 두 가지의 중요한 배경을 들 수 있다. 하나는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적 합리주의’를 들 수 있다.

오늘의 각급 학교가 정규의 교과 속에 담고 있는 주된 내용은 서양의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이어져 온 자유교육적 교과, 주로 귀족사회 혹은 지배계층의 학교가 가르치던 교육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 말기부터 20세기 초기까지 발달한 공교육제도에는 근대정신, 시민혁명,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학교의 교육내용이 다소 ‘근대화’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문학, 음악, 미술 등을 포함한 문화부문은 주로 고급문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민속 문화 혹은 대중문화는 정규의 학교교육에서는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오늘의 공교육제도는 근대적 시민사회가 발달하면서 교육의 기회를 귀족계급 혹은 지배계층에 한정하지 않고 일반 서민들의 자녀들에게 개방하는 평등교육 혹은 보편교육의 틀을 형성하고 있지만, 교육내용의 문제, 즉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는 거의 철저하게 근대사회를 주도한 계몽사상적 합리성의 틀에 의해서 결정되어왔다.

공교육제도와 학교는 지금까지 근대적 합리성에 토대를 둔 문화체제의 담당자로서의 위치에 있어 왔다. 언어는 그것이 묘사하는 세계를 바르게 표현하고 진리를 말하는 표준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가르치고, 과학은 합리적 사고의 선험적 기반 위에 전개된 엄격한 논리적 형식 속에 객관성을 지닌 경험의 내용을 체계화한 지식으로 가르치며, 예술은 저속하고 조잡하다고 여겨지는 대중예술과는 구별되는 고상하고 순수한 독창성을 지닌 고급예술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도덕은 인간행위의 보편적 법칙을 인식하고 거기에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자유교육적 전통과 계몽사상적 합리성에서는 지식의 전형은 과학이지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은 좋은 지식이며, 이야기는 저속한 사람들이나 아이들이나 원시인들이나 병자들이나 하는 저질의 것으로서 원시적이며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예술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며,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하여 합리적 지식을 획득하고 고상한 예술을 감상하여야 한다. 이것이 자유교육의 전통이며 계몽사상적 합리성이 추구하는 본원이다. 여기에는 대중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사람들은 탈(脫)근대적 사회의 교육을 생각하기도 한다. 지식이란 기능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그것을 배우는 것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학교의 교과속에 담긴 지식은 세계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두고 논의하는 언어적 관습에 따른 일종의 게임과 같은 담론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방법은 세계 문화(Global Culture)의 새로운 형태를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다양하고 절충적인 다중적 문화를 가진 세계가 전개되면, 각각의 문화체제는 각각의 자격으로 다른 문화체제와 조화를 이루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오늘의 교육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의 교육내용, 특히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 와서 각급 학교의 음악, 미술 등의 교과 속에 대중문화적 내용을 승화시켜 대중문화의 소비와 생산에 관련된 새로운 안목과 관심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 조금씩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고급문화의 대중화와 시대적인 대중문화의 고급화를 위한 노력도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저질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회적 감시활동에 종사하는 대중의 자발적 노력도 보인다.

문화교육은 어느 개념의 것이든지 간에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국가 전체의 문화적 정서와 교양은 국가의 격을 고양하는 길이기도 하다. 대중문화를 교육적으로 관심 밖의 영역에 방치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 아니다. 대중문화의 생산인력을 어떻게 양성하여야 하고, 소비생활을 어떻게 계도하여야 하는가는 국민교육적 차원의 관심사가 되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