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혈사회와 교육] 1. 울혈사회 현황 진단과 교육적 대응
[울혈사회와 교육] 1. 울혈사회 현황 진단과 교육적 대응
  • 한치원 기자
  • 승인 2016.08.1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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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폭발시켜야 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울하고 분하고 그래서 그 충동을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분노조절 장애 국가가 되고 있다. '사회는 교실이다', '교실이 사회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같은 현상이 학생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다. 전문가로부터 '울혈사회'를 진단하고 어떻게 교육적으로 대응할지 알아봤다.<편집자 주>

의학에서 사용되어온 ‘울혈’이란 용어는 심장펌프 기능의 이상으로 정맥혈이 모세혈관에 고인 채 전신으로 피가 공급되지 못하는 증상을 지칭한다. 전신부종이나 호흡곤란 등이 전조 증상이며, 심하면 간기능, 신장기능, 뇌기능의 장애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울혈사회’라는 말은 2009년에 연세대 박명림 교수가 용산 참사에 대한 신문 기고문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2015년 1월 한신대 윤평중 교수가 “선진사회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라는 심포지엄에서 울혈사회라는 타이틀로 한국사회를 진단한 바 있다.

울혈사회란 분노가 누적되어 응결된 상태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울혈 현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된 배경과 현황을 알아본 후, 울혈 해소를 위한 공교육의 역할을 짚어보고자 한다.

김문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사회학, 교육부 인성교육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인이 울분 상태로 돌입하는 이유

흔히 한국인은 ‘한(恨)’과 ‘흥(興)’의 민족이라고들 이야기해 왔으나, 한국인의 정서는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쇼펜하우어가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했듯, 소재와 형식을 분리할 수 없는 음악이야말로 내적 정서를 가장 잘 반영한다들 하니, 일단 음악에 빗대어 말문을 열어보도록 하자.

우리에게는 아리랑처럼 한 맺힌 가락이 있는가 하면, 흥겨운 사물놀이도 있다. 또 단아하고 차분한 정악(正樂)이 있는가 하면, 해학과 애조가 교차하는 걸쭉한 판소리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우리 전통음악처럼, 한국인의 속내는 대단히 복잡다단해 한두 마디로 쉽게 단언하기 어렵다.

의식적 측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한국 사람들은 때때로 명분을 끔찍이 내세우다가도 무척 실리적일 때도 있으며, 강한 가족주의 성향을 보이다가도 가족해체적 행동을 불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서를 딱 집어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한국인의 심향을 이야기하라면, 첫째, 인간관계를 중시여기는 관계주의나 연고주의, 둘째는 살아생전을 중시여기는 현세주의, 그리고 내가 당한 고난을 되돌려 받으려는 배상주의를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요컨대, 한국인은 구원이나 영생과 같은 내세적 가치와 무관한 세속적인 복리 추구에 천착해 왔는데, 이런 정서를 가장 잘 반영해 온 것이 ‘수부귀다남(壽富貴多男)’이라는 전통적 행복관이아닌가 한다.

그런데 가계계승에 대한 욕구나 남아선호사상이 극도로 완화된 현 시점에서는 다남이 빠진 수부귀(壽富貴)가 유효성을 견지하는 기복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오래 산다는 수(壽)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관한 문제요, 돈을 많이 버는 부(富)는 가족의 안녕을 위한 것이며, 남이 알아주는 존재가 되는 귀(貴)란 사회적인 것인데, 이들 중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출세야말로 ‘수’와 ‘부’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 가장 광범하고도 포괄적인 성공적 삶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출세야말로 대다수 한국인이 지향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궁극적인 목표로, 한국인은 본인이나 자녀의 지위 상승 기회가 부당히 차단되었다고 느낄 때 참을 수 없는 울분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한국적 정서로서의 울화

한국사회에서는 “울화통이 터진다”는 말이 성행하듯, 울화는 분노의 한국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울화는 개인 문제나 사회활동 등에서 파생하기도 하지만, 가족주의 유제가 강한 한국사회의 경우 자녀 결혼문제나 친족관계 등에서 울화가 치밀 때도 많다.

‘배움의 공간’이라는 각급 학교나 대학 캠퍼스 내에서조차 교원들 혹은 사제지간에 격하게 다투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상시화・보편화・일상화되어 국민 상당수가 흘깃 건드리면 격발하는 위험인물로 변해가는 면모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날로 증가하는 ‘묻지 마 범죄’ 같은 것이 그러한 점을 입증하는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울화의 요소로는 흔히 ‘3불(三不)’이라고 불리는 불안, 불만, 불신이 자주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3불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각축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삶의 고통일는지 모른다. 현대사회를 두고 경쟁사회, 갈등사회, 피로사회와 같은 진단들이 속출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가속화되어가는 저출산・고령화로 사회적 활력이 급속히 퇴화해가는 와중에 저성장, 양극화, 취업난 같은 크나큰 도전과제가 중층적으로 부가되어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우리 국민은 3불을 넘어선 보다 극단적 형태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요컨대, 단순한 불안(anxiety)을 넘어선 강박(obsession), 불만(dissatisfaction)을 넘어선 원한(resentment), 불신(distrust)을 넘어선 반감(antipathy), 그리고 통상적 경쟁(competition)이 아닌 죽기살기 식의 고투(struggle), 갈등을 넘어선 포기(giveup), 피로를 넘어선 탈진(exhaustion)등이 그것이다.

울화의 역사・사회학적 기원

울화의 기원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는 지정학적 배경을 무시할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한민족은 외세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한반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대륙세력과 미국, 일본 등의 해양세력과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주로 중국과 일본의 침략에 시달렸는데, 이런 수난의 역사가 울분의모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사회적 기원에 대해서는, 일단 요즘 우리 울분을 가장 자극하는 세대갈등, 지역갈등, 노사갈등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중 지역갈등은 이전에 비해 완화되어가는 중이지만, 노사갈
등이나 세대갈등은 임금문제나 취업문제 등과 결부되어 날로 첨예해지고 있다.

조만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정책적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 연금문제이다. “자기들은 실컷 누리고 연금제도를 강화시켜 우리 세대를 힘들게 하느냐”는 젊은 세대의 절규가 그 단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세대갈등도 이제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과 같은 생활양식(lifestyle)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잘 살 수 있겠는가”라는 생활기회(life chance)로 인해 격화되곤 한다. 계층갈등이 울화의 가장 큰 관건인 것이다.

이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에는 사회적 위계체계에 관한 두 가지 원리가 공존했다. 양천제(良賤制)와 반상제(班常制)이다.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법적 신분제인 양천제는 국민을 대다수 양인(良人)과 천역을 담당하는 극소수 천민(賤民)으로 나누어 양인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대신 조세, 공납, 군역 등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반면, 현실적으로 작동한 반상제는 사람들을 통상적으로 소수의 상급지배층인 양반(兩班)과 다수의 하급피지배층인 상인(常民)으로 구분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자원동원 시에는 양천제라는 법적 원리를 따르고, 실익을 추구할 때는 반상제를 적용했으니, 극소수 천민층을 제외한 대다수 상민층은 공적 의무는 있고 누릴 권익은 없는 모순적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다수 서민층이 소수 특권층에 시달리는 상황인 것이다. 서민 대다수를 중산층으로 추켜세우면서도 빈곤층이 아니니 공적지원을 기피하려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기질적 요소도 정서와 관련된다. 기질과 관련해 가장 분명한 점의 하나는 한국 사람들이 대단히 표출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자기를 나타내거나 때때로 과시하고, 감추거나 은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자주 속내(本音, 혼네)와 겉마음(建前, 다테마에)이 다른 일본 사람들을 이중적이라고 힐난해 왔다. 겉으로는 예의바른데 속은 알 수 없는 그들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는 것이다. 대신, 자기감정을 솔직히 토로해야 겉과 속이 일관된 가식 없는 사람으로 애호해 왔다. 좋고 나쁨을 떠나 한국인에게는 실로 이런 기질이 농후하다.

따라서 슬플 때 통곡하고, 좋을 때 환호작약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심사를 온전히 표현해야 하는 표출적인 존재인 것이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차분하거나 사려가 깊지는 않다. 게다가 참기 훈련도 크게 학습한 적이 없어 울화가 치밀면 울화통을 터트려야 한다.

이러한 한국인의 기질은 해외여행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항공기가 연착됐다. 출발이 지연될 것 같다”라는 안내 메시지가 나오면 제일 먼저 창구에 달려가 “언제 오느냐”고 채근하고 따지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꼭 가야한다고 거세게 달려들어 항의하는 반면, 조용히 기다리는 외국인들을 순종적이거나 바보 같은 존재로 여긴다. 재난을 당했을 때도 하늘이나 당국에 대해 분풀이라도 퍼부어야 적성이 풀리는 것이 한국인이다.

권익에 관해 그토록 민감하기 때문에 압축적 민주화를 달성해 시민권이 급속히 신장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숙사회에서는 ‘시민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권리라는 것은 영합적(zero-sum)요소가 강해 내가 많이 누리면 남에게 상대적으로 적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성숙사회의 시민에게는 ‘시민권’을 넘어 사회전체적 복리를 향한 ‘시민성’, 즉 시민적 덕성이 필요하다.

분노는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중동, 중남미, 유럽에도 있고, 심지어 자본주의 중심국인 미국의 금융중심지 월가에도 있다. “분노하라”는 구호는 이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있는 상시적 구호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울분 현상은 개인의 인성에까지 부정적 영향이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해 심각성이 더하다고 본다. 우리 주위에는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울혈성 인간형이 늘어나고 있다.

남녀 간 차이도 없고, 청・장년층은 물론 중·노년층에도 있으며, 직종이나 직급과 관계없이 각계각층에 널리 산재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량 접촉사고 시에 드러내는 비이성적인 행위에서 그 점을 여실히 간파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1997년 IMF 환란 이후에 보다 심해지는 것 같다. IMF 전후 상황의 차이는 성장 시대에서 탈(脫)저성장시대로의 이행이라고 볼 수 있다. 성장시대에도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이나 거듭 실패를 맛본 사람들도 ‘언젠가 나도 나아질 수 있겠지’라는 삶에 대한 여유나 희망을 견지하고 있었기에, 잘살든 못살든 사람들의 의식적 정향(定向)은 거의 유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성장 시대로 전환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IMF 이후에 소득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소득격차는 OECD 국가군의 중간 정도이니 그리 비관할 것은 아니다.

상하 계급 간의 보다 큰 차이는 금융자산이나 부동산과 같은 자산격차이며, 그보다 더 심각한 차이는 학군제를 통한 공간적인 격차와 자녀교육의 격차이다. 우리나라 아파트는 학군에 따라 시세 차이가 엄청나다.

이러한 공간적 양극화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 분포나 생활기반시설의 차이를 야기해 지역별 격차를 배가시키고 있다. 서울과 비서울의 차이는 물론이요, 같은 서울이라도 강남3구와 여타 지역의 차이가 날로 확대되어, 한국인은 생물학적으로 같은 인종인데도 불구하고 문화적 이민족처럼 남남이 되어가고 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의식적 단절로서, 고성장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한마음이었던 우리 국민이 이제는 극소수 야망계급과 대다수 절망계급으로 양분되어 물과 기름처럼 단절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지위 상승에 대한 기회구조나 열망이 차단된 이런 상황에서 절망계급의 울분이 날로 적체되고 고착되는 울혈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상호존중이 절실한 사회

국민 모두를 부자로 만들 수 없고, 만인을 똑같이 잘 살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적어도 인격적인 면에서 평등을 누려야 한다. 인격적 평등을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도 중요하지만,보다 결정적인 것이 상호존중이 아닐까 한다.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상황에서는 인격분쟁이 적절히 통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살다보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곤 하겠지만, 먼저 다가가 해명하고 이해를 구하면 난제라고 생각되던 것이 의외로 쉽게 풀리는 때가 많다. 따라서 서로 먼저 손을 내미는 선제적 행동(proactive action)이 대단히 중요하다.

생소한 상대에게 먼저 액션을 취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돕고 싶어도 주제넘다는 생각도 들고, 곡해하면 어쩔까라는 불안감도 있을 수 있다. 더구나 호의를 거부당했을 때는 선제적 행동의 동기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더라도 울화를 해소하는 데는 선제적 호의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인데, 이 때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지위에 관계없이 존중하는 마음이 오갈 때 ‘공리주의에 기초한 상호성 규범(utilitarian norms of reciprocity)’이 ‘이타주의적 상생윤리(altruistic ethics ofcoexistence)’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낮춰보면 내가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존중의 시대에는 그러한 관행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양으로 타인을 홀대하거나 멸시하는 행태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병원 갈 때 잘 차려입고 가야 대접 받는다”고들 한다. 환자가 말끔하게 차려입으면 의사가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심지어 백화점에 옷을 사러갈 때도 옷을 잘 차려입고가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촌티나면 무시당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비싼 옷에 명품으로 치장하고 고급차를 타며 과시한다. 이는 외양으로 본질을 판단하는 탈진정성 시대에 귀한존재로 우대받고 싶어 하는 헛된 욕망의 발로로, 보통사람들의 울분을 격화시키는 부가적 요소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울분 해소를 위해 분노조절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옳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조절 능력을 키워도 울분의 원인에 대한 개선이 따르지 않는 한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다. 대신 국가,
기업 혹은 사회지도층이 일반 국민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정책, 전략 혹은 행태를 확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

기업에게는 실질적으로 변화를 가하지 않고 일반 봉급쟁이들의 세율만 인상한 지난 번 세제개혁 같은 것들이 바로 대중적 울분을 촉발한 전형적 사례라고 하겠다. 이른바 ‘땅콩 회항사건’이나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검사장이나 변호사 비리 문제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상하층간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재산이나 교육정도 면에서는 차이가 크다고 인정하는 응답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애국심, 정직성, 도덕성 등과 같은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든가오히려 잘사는 사람들이 보다 못하다는 견해가 많았다. 한국사회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역(逆)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상존하는 셈이다. 즉, 한국의 특권층은 도덕적 의무를 지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특권적 지위를 악용하는 부도덕한 존재라는 의식이 사회적으로 풍미해 울분과 울혈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울혈 시대의 공교육

최근 공교육 위기 담론이 고조되고 있다. 공교육은 학생들의 학력 향상 면에서 사교육에 밀리고 있다. 수시로 바뀌는 입시정책에도 학교의 대응은 발빠른 사교육을 쉽게 따라가지 못하고있다. 학력 향상에 대한 불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력과 무관한 여타 국면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학원 강사가 학교 선생보다 학생들을 더 잘 이해하고 보살핀다는 믿음이 커지고 있고, 안전이나 위험 대처 능력에 있어서도 학교보다 학원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한 마디로, “학원은 믿어도 학교는 믿을 데가 못 되는구나”라는 인식이 팽배해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육이 아닌 공교육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사랑은 모든 학생들을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학생들에게 눈길이 더 많이 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자신도 그랬다.

또 교사가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한다고 그들이 말썽을 피우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름지기 교육자는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거나 반항적이고 골치 아픈 아이들도 소정의 존재 가치를 지닌 인격체라는 생각으로 사랑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곳은 가정 밖에서는 오직 학교 밖에 없다.

나 역시 예전에 그러한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다. 1982년 신임교수 시절에 서슬 퍼런 5공 치하에서 시위를 하다가 교도소에 수감된 운동권 학생들을 찾아가 설득을 해보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당치도 않은 얘기를 건넨다고 그들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감이 컸지만, 어떻든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일담에 의하면, 당시 수감된 제자들은 교수가 다녀간 사실 자체가 기뻤다고 한다. 전혀 대단한 것도 아니고 효과도 전무한 것이었지만, 뜬금없는 얘기만 나눈 당시 제자들이 좋은 기억이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학원에서는 유명강사로부터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기찬 강의를 들을 수도 있고, 사근사근하고 친절히 대해주는 강사를 만날 기회도 많을 수 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은 현재로서는 공교육 기관인 학교뿐이며, 그런 일을 전담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세상을 밝게 바라볼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외에 오직 교사뿐이라고 확신한다.

인성교육의 필요성

근자에 사회적 단절과 갈등으로 인한 정신적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날로 부각되어 왔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회는 2014년 5월 인성교육진흥법을 발의해 이듬 해 1월법률 제13004호로 제정한 후, 동년 7월부터 시행하도록 했다. 실질적으로는 2016년 초부터 ‘인성교육 5개년 계획’을 정립해 본격적 활동에 들어갔는데, 현재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 체육이나 예술과의 통합교육이다.

하지만 외국에서도 거의 하지 않는 일을 굳이 법제화시켜 시행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이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또 법안 통과 직후부터 인증기관으로 지정받기 위해 각종 단체나 학원들이 준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성을 어떻게 교육을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판을 어떻게 분할할 것이냐 하는 이해타산이 앞서고 있는 것이다. 본말이 전도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인성교육은 서둘러 시행해야 할 당위성이 충분한 과제라고 본다. 쌓여가는 울분이나 고착되는 울혈 해소에 인성함양이 가장 적실한 방안의 하나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는 국가 경쟁력이 주로 무력이나 국방력에 기초한 국력(國力)으로 대변되었고, 냉전체제가 와해되는 다극화 시대로 들어서면서 그것이 국부(國富)라는 경제력으로 대체되었으나, 향후에는 국격(國格)이라는 시민적 품성이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예표로 대두할 전망이다.

이러한 면에서도 인성교육의 잠재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인성법은 하루빨리 없어져야할 법이라고 하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국민화합이 절실한 현 상황에서는 인성을 정책적으로 함양시켜보자는 시도는 힘을 모아 해볼 만한 시도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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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원 기자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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