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한국과학창의재단 창조경제문화본부장

소녀들의 은밀한 공격성은 평생 가는 상처로

딸아이가 며칠 부쩍 보건실을 찾는 일이 잦는 듯해 왜 그런지 물으면 배가 아팠다고 했다가 그다음 날엔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여름철 찬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난 것은 아닌가 싶어 자세히 관찰해보면, 점심 전후에 속이 좋지 않다가 또 저녁 무렵엔 쌩쌩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보내달라고 우긴 학원을 어느날 갑자기 전화를 해 다짜고짜 당장 끊어 달라 한다.

“너 이번엔 누구하고 안 좋은 거니?”
“아니…그게…나중에 저녁때 얘기해.”

다행히 수다스러운 딸아이는 점심시간 뭐 하고 놀았는 지, 쉬는 시간 누구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방과 후 교실은 재미가 있었는지, 맨날 오던 누구는 요즘 왜 안 오는지 자못 궁금한 척 이리저리 질문을 던지면 어느 순간 둑 터진 물처럼 또래 여자아이들의 은밀한 따돌림의 온갖 행동들에 대한 고발이 시작된다.

“우리 반에 나하고 친한 사총사 중 영*가 어느 날 현*와 놀지 말자고 자꾸 꼬드기는 거야. 참 이상하지? 그 둘은 나보다 더 오래된 유치원적 친구였는데… 난 처음에는 현*가 영*한테 그날 뭔가 서운하게 했나 싶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별 이유가 아니어서 그냥 흘려버렸거든. 그런데 자꾸만 그러는 거야. 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무시하고 현*랑 잘 지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영*가 현*를 싸고돌면서 날 따돌리는 거야.”

점점 소리가 높아지고 격해지고 체육 시간, 미술 시간의 은근한 배제와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는 공격들에 대한 얘기가 줄줄 나온다.

“그랬구나… 선생님은 아시니? 엄마가 선생님하고 상의를 좀 해볼까?”
“아니! 친구끼리 문제를 선생님께 얘기하는 건 왠지 찐따(못난이) 같아서 싫어.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할 거야.”

꽤 결연해 안심은 좀 되지만 여러 걱정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부터 딸의(학교와 아파트에서 맺어놓은) 모든 ‘인맥(아이의 표현이다)’이 총동원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매일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는 어떤 대응을 하고 어떻게 반격을 했는지 무용담을 듣다 보면 나 역시 어릴 적 한때 점심시간이 괴로웠던 기억과 느낌이 너무도 생생히 되살아나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좀 더 진화했다.

그땐 없었던 SNS로 서로 편을 갈라서 상태 메시지를 바꿔가며 시도 때도 없이 ‘관계 전쟁’에 몰입하는 요즘의 아이들을 보면, 도를 넘는 일로 커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이러저러한 잔소리가 늘어간다.

물론 우리 딸은 스스로의 문제를 주변의 인맥을 잘 활용해(?) 해결한 ‘역전의 용사’가 되었으나, 이 일을 계기로 주변의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유독 딸을 둔 가정들은 모두 겪는 통과 의례적인 고통 같다는 말을 들으며,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는 학부모 이상의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평소 일과 관련하여 가깝게 지내는 선생님들과의 모임 자리가 마침 있었다. 기회를 봐 왕따, 특히 여자아이들의 따돌림 심리에 대해 운을 띄웠더니 경험에 입각해 모아지는 의견은 이러했다.

유독 친구를 바꿔가며 따돌림을 주도하는 아이는 자신이 따돌림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과민한 불안 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다.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따돌림을 시킨다.

그런 아이들 중 일부는 가정에서 아이가 잘못했을 때 벌로 아이를 고립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아이들 중 대장 심리가 강한 아이는 자신의 말에 대해 호락호락하지 않은 친구에 대해 따돌림의 방법으로 벌을 주기도 한다.

따돌림을 당한 피해 학생의 대부분은 반드시 가해 학생이 되기 십상이며, 이런 따돌림의 괴로움은 극심해서 꽤 오랫동안 상처로 남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치스럽게 여겨서 부모나 담임선생님에게 잘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훨씬 더 스스로의 고통을 은폐한다는 것 등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기사에서 본 ‘전국 다문화 가족 실태조사’ 분석 중 눈길을 끌었던 내용이 생각났다.

다양한 차별과 폭력에 노출된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이 어떤 형태의 학교 폭력(욕설, 집단 따돌림, 성희롱, 갈취 등)을 겪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그런 경험들이 어떻게 우울 증상과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본 연구였는데, 이들의 경험이 성인이 된 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그 경험이 우울증의 발생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결과였다.

특히 그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감당하는 학생들이 학교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 비해 7배, 학교 폭력을 경험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이들에 비해 2배가량 우울증이 더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더욱 주목할 만한 결과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고 말한 남학생들이었다. 이들의 경우 학교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학생들에 비해 8배 높은 우울증 유병률을 보였을 뿐 아니라, 학교 폭력을 경험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학생보다 3배 이상 높은 우울증 유병률을 보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고도 자신은 스스로 괜찮다며 그 상처를 숨기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 원인이 되고 오랜 기간 정신건강에 큰 해가 됨을 나타낸다. 물론 여자아이들은 그런 면에서 좀 더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

소녀들의 심리학

관심을 더 발전시켜 보았다. 인터넷을 뒤졌다. 《소녀들의 심리학》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주문해 읽으며 찌는 듯한 여름의 여가 시간은 딸을 둔 부모이자 여자 후배들의 멘토로서 학습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이 책은 여성학 전문가 레이철 시먼스가 따돌림으로 고통스러웠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3년여에 걸쳐 300여 명의 소녀들과 부모, 교사들 인터뷰를 통해 소녀들의 은밀한 공격성과 비신체적 갈등에 초점을 둔 최초의 사례 연구집이다.

이 책은 ‘관계적 공격성’, 혹은 ‘대체 공격’이라고 이름 붙인 여러 행동들과 그 시기의 소녀들의 심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소녀들의 은밀한 공격성은 심리적으로 평생 가는 상처가 될 수 있음에도 아주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과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교육현장에서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 생생한 사례들이 궁금하신 독자분들께서는 책을 통해 접하시고, 친구 관계가 세상의 전부인 딸을 둔 부모로서 내게 큰 공감을 주고 유의미하게 남았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착한 소녀’의 관습적 당위성이 문화적으로 유전된 사회에서 소녀들은 사회적 반감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인 상냥함 밑에 숨어서 몰래 서로를 다치게 한다.

은밀한 시선과 쪽지를 교환하고, 시간을 두고 암암리에 조종한다.
복도에서 구석으로 몰고, 등을 돌리고, 속 닥거리며 웃는다.
누가 통로를 지나가면서 누구와 부딪친다.
누가 책상에 놓인 책을 쳐서 떨어뜨린다.
익명으로 쪽지를 보낸다. 치사한 그림을 그린다.
눈을 흘긴다.
아이디를 바꾸어 메신저로 비방한다.
남자친구를 뺏는다.
소문을 퍼뜨린다.
부정행위를 했다고 이른다.
발을 밟고 나서 “어머! 미안해!”라고 한다.
싸늘한 표정과 침묵은 위장된 공격의 궁극적인 형태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소녀들에게 기본 명제 같은 것이다. (간혹 빈번하게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은 형식적이고 즉각적이며 일상적이고 자동적인 말이 된다. 이 형식적인 사과는 갈등을 해결할 필요성보다는 관계를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순전히 절차적인 의미의 사과이다. 가해자는 농담을 보호막 삼아 표적을 공격한다.
표적이 된 소녀가 맞서는 경우는 드물다.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서다. 아무도 너무 예민한 아이와는 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동맹 결성은 고전적인 유형의 간접 행동이다. 인기란 대체로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 친구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능력에 따라 정의된다. 소녀들에게 고립이 정신적 외상이라면 관계는 힘을 주는 것이다. 친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면 스스로가 더 강해진 것 같다.

‘관계 맺기’와 ‘좋은 관계 유지하기’

필자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둔 부모들과 얘기를 나누어보면 요즘에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사춘기가 시작되고, 이러한 은밀한 따돌림 역시 관계로 예민해지는 고학년 시기부터 점차 심각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십 대의 뇌는 아직 이성적 판단을 하는 전두엽의 발달이 미성숙한 때이다.

십 대의 아이들은 이러한 행동들이 폭력의 범주에 든다는 데 대한 인식이 매우 약하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부모와 학교가 위와 같은 여학생들의 은밀한 공격이나 행동들에 대해 주목할 것을 충고한다.

은밀한 대체 공격을 폭력의 범주로 넓혀 정의해주고,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할 수 있다면) 금지의 규칙에 넣어 이것이 남을 해하는 나쁜 행동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바라기는 우리 학교의 문화가 아이들의 정서와 감정을 배려하는 유연한 문화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우리 부모에게 있어 학교는 질서와 집단생활의 상징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불편하고 괴롭더라도 인내하면서 사회 생활을 학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학교에서 겪는 아이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의 건강한 학교생활을 위해 세심하고 유연한 마음으로 대처해주어야 한다. 특히 여학생의 따돌림은 특정한 폭풍처럼 특정 토양에만 몰아치는 사회적 소용돌이와 같다고 한다.

특정한 환경에서 위축된 아이들에게 다른 환경을 조성해 줄 경우, 훌륭히 생활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가끔 소극적이고 자존감이 없는 아이들에게 여름 일주일간의 캠프는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비록 낯선 친구들이지만 ‘만나서 반갑고, 나는 누구고, 너는 이런 것이 참 좋구나’를 함께 깨닫게 해주는 경험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새로운 경험의 여러 기회를 마련해 줄 때 중요하게 고려해 볼 사항이기도 하다. 사실 아이들에게는 그 시절 ‘관계 맺기’와 ‘좋은 관계 유지하기’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이 얼마나 좋은 성적을 받고 어떤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고래로 행복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행복의 필수적이자 가장 큰 요소로 꼽는 것이 ‘관계’이다.

아이가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어려움은 없는지 진심 궁금해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뜨거운 뙤약볕에서도 그늘 넓은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부모가 되는 첫걸음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