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장기적인 국가전략이다. 국가 및 사회 체제의 전환에는 반드시 교육의 역할이 수반된다. 일반적으로 교육이 체제전환을 뒤따라가지만, 교육이 체제 전환을 뒷받침하지 못하면 그 체제는 안정화 되지 못하고 발전할 수도 없다.

몽골에서는 두 차례의 체제전환이 있었다. 한번은 1921년에 이른바 ‘인민혁명’을 통해 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있었다. 또 한 번은 1990년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몽골의 민주화 이후, 몽골에서는 어떠한 교육체제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또 현재 어떠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도 1987년 민주화 이후 체제 변화가 있었지만, 그 후 대한민국에서는 성장 잠재력이 지속적으로 저하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 한국교육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게다가 한반도의 통일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옴에 따라 통일 후 대한민국의 교육개혁과 북한의 교육체제전환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희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 사회주의 시대 이전의 몽골과 교육
몽골은 오래된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만, 현대 몽골의 교육적 과제들과 직접 연계하여 생각할 수 있는 시기는 17세기 이후 청조 지배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宮前奈央美, 2009).

청 태종이 1634년에 몽골을 정복하였고, 1757년에 전 몽골을 지배 하에 두게 되었다. 청나라는 몽골을 동맹자로 취급하고, 그 충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몽골인들을 만주족의 ‘8기 제도’에 준하여 기(旗)를 기본단위로 조직하였다.

기(旗)마다 목초지를 지정하여 세습제의 우두머리인 자사커(扎薩克)를 두고, 내몽고의 몽골 부족들을 49기로 재편하였다. 그리고 49기의 각 기장에게는 그 위(位)에 따라 호쇼이(和碩)親王, 도로이(多羅)郡王, 도로이(多羅)貝勒[베이레], 구사이(固山)貝子[베이세], 鎮國公, 輔國公 등 청나라 황족과 같은 작위를 수여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중국화를 추진하였다.

청나라의 몽고통치를 담당하는 중앙관청을 처음에는 몽고아문(蒙古衙門)이라고 했지만 1638년부터는 이번원(理藩院)이라 하였다. 청의 통치 하에 있는 몽고의 여러 부족을 '外藩蒙古'와 '八旗蒙古' 그리고 '内属蒙古'의 3가지로 분류하였다.

'外藩蒙古'는 1636년부터 1771년 사이에 청나라에 귀순한 몽고 제부족을 일컫고, '八旗蒙古'는 1636년 청나라 건국 이전에 개별적으로 편입된 몽고인 집단을 말한다. '内属蒙古'가 몽골의 종주(宗主)로서 차하르部와 튀메드部의 兩部가 중심인데, 이들은 北元시대 몽골의 중심이었으며 칸을 배출한 부족이었다.

청나라는 몽골의 재통일을 두려워하여 여기에는 자사크(扎薩克)를 두지 않고 청나라 황제에게 직속하도록 하였다. 17세기 이래 청나라 조정은 몽골의 제후들을 자신의 보호 하에 두었지만, 자치를 허용하여 각 부족마다 서로 다른 법률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몽골인들에게 청 황제는 대칸과 같은 존재이고, 동군연합국가(同君聯合國家)로 여겨졌다.

또한 청은 몽골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비교적 화평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약체화하고 재정이 악화됨에 따라 몽골인들에 대한 군사 부역이 증대하였다. 그리고 한인 농민과 상인들의 몽골입식(入植)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재산을 둘러싼 대립도 빈발하였다.

이에 따라 몽골인들의 반청운동이 점차 강해졌고,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붕괴하자 몽골의 제후와 관리들은 수도(이에후레)에 모여 활불(活佛) 구드 칸을 추대하여 독립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러시아도 몽골을 무시하고 중국과 교섭하여 중국의 종주권을 존중한 위에 외몽골에 한하여 자치를 인정하였다(1913년). 1917년에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혼란에 빠지게 되자, 중·러협정을 무시하고 1919년에 안휘파 군벌(安徽派 軍閥)이 무력을 배경으로 외몽골의 자치권 취소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몽골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였다.

1920년에 스후바트르 등은 몽골인민당을 설립하고, 1921년에 소비에트 군대의 지원을 받아 중국 군벌 군대를 물리치고 활불을 국가원수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1921년 7월). 그 후 활불의 사망과 함께 1924년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의주의 국가 몽골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몽골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역의 유력자나 티베트 불교 사원에 아이를 맡겨 티베트 고전을 학습시켰다. 당시 티베트어 지식은 지식인의 표징으로 여겨질 정도로 높이 평가되었고, 책・붓・교사를 '3대 보물'이라고 불러 지식과 교육을 존중했다.

그러나 몽골의 일반 민중들 가운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청나라 지배하의 몽골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라마사원이 주요 교육기관이며, 그곳에서 부유한 계층의 자제와 라마승들이 읽기와 쓰기 그리고 티베트어 경전 암송 등의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상설 교육 시설로서의 세속적인 학교는 1910년대까지는 없었고, 귀족의 가정에서는 만주어와 한문 학습이 행해지기도 하였지만, 일반 민중들 가운데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몽골에 처음 학교교육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일반적으로 1800년대에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학교 교육이 대중화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몽골의 학교 교육 보급은 100여 년 늦게 시작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자급자족을 위주로 하는 전통적인 유목생활과 함께 사찰과 승려들이 교육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2. 사회주의 시대의 교육
2.1 개관

현재의 몽골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육은 사회주의 시대에 기초가 쌓아 올려졌다. 1921년에 몽골 인민혁명당은 학교규칙을 제정하고 초등학교 설립을 결정하였다. 1921년에 수도 울란바토르에 최초의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다음 해에는 지방에 10교 이상 초등학교를 세웠다.

1923년에는 몽골 최초의 보통교육 중등학교로서 울란바토르 시립 제일중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제일중학교는 현재에도 가장 전통있는 우수한 학교로서 인기가 높다. 이어서 1924년에는 국민교육성(省)이 설치되었고, 학교 등의 교육시설들을 차츰 건설해갔다.

사회주의 초기의 몽골 초등학교에서는 몽골어, 산수, 지리, 역사를 비롯한 8개 교과가 가르쳐졌는데,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계획은 없었으며, 교사의 수와 질도 모두 부족했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몽골어와 산수만을 가르치는 초등학교도 많았다.

하지만 이 시기는 독립과 함께 봉건제도와 결별하고 근대적인 학교 교육이 창시된 시기로서, 근대적인 교육내용과 교육정책이 채택되었다. 1921년에 이른바 ‘인민혁명’이 성공한 이후, 티베트 불교는 사회주의 정권으로부터 무지 몽매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졌으며, 결과적으로 전통과의 단절이 시도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의 학교교육 제도를 수용하여 10학년제의 보통교육제도(초등학교 1학년으로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가 합쳐진 것)가 도입되었다. 10학년제는 1학년에서 5학년, 6학년에서 10학년으로 분류되었는데, 전자는 교과 담당제를 실시하면서도 주로 학급담임에 의한 지도가, 후자는 학급담임제를 실시하면서도 교과지도 중심의 수업을 실시했다.

클럽활동을 보다 중시하는 것도 후자였다. 히체린・에후레크치(хичээлийнэрхлэгч=수업 디렉터)로 불리는 교감도 전자와 후자 따로따로 있었다. 교육은 일반적으로 지육(知育)이 중시되어 교사는 오로지 판서와 설명을 하고, 아동・학생은 그것을 노트에 베껴 쓰는 수업(전통적 교수법)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노트의 소비량이 곧 학습량이라고 할 수 있어 판서량은 교사의 근무평정에도 사용되었다. 체벌의 행사는 일상적으로 행해졌고, 담임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 학생은 흑판 앞으로 불려나와 그 이유가 힐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교장실에 불려가 교장으로부터 직접 힐문을 당하였다.

학교교육의 책임은 학습지도로 한정되었고, 생활지도는 가정의 책임으로 여겨졌다. 과거 한국에서 실시하는 교외지도와 같은 것이 몽골의 학교에서는 실시되지 않았고 학교의 권한 밖으로 여겨졌다.

2.2 유아 교육

사회주의 정권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보장하는 입장에서 유아교육을 상대적으로 충실히 실시하였다. 한국에서 말하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구별은 없고, 트트르레그(цэцэрлэг)로 불리는 교육기관으로 일원화되었다.

트트르레그(цэцэрлэг)를 유아 교육기관으로서 이용할 것인지 탁아소로서 이용할지는 오직 가정의 선택에 달렸다. 사회주의 시대 몽골의 교육대학에는 미취학아동을 위한 교육전공이 개설되어 있었는데, 남학생에게는 문이 개방되지 않았다.

2.3 언어교육

1925년의 제4회당대회에서 문자개혁에 관하여 논의되었다. 즉 '몽골문자를 개량해 간편하게 한다'는 지시가 이루어졌고, 전통적인 가정 내 교육을 이용한 문맹퇴치 교육이 시작되었다. 가정 내 학교는 10戶에 대해 1校, 도시에서는 학습 그룹을 조직하여 행해졌다.

1942년에 '전통적인 몽골 문자 개혁'이 결정이 되었는데, 모스크바로부터 지시도 있어 전통적인 몽골 문자가 폐지되고 키릴 문자가 채용되었다. 키릴 문자를 채용한 공식 상의 이유는 '소련을 통하여 세계가 보인다'는 명분이었다.

키릴 문자를 채용한 이는 당시의 권력자 초이바르산이었다. 그는 당초 바라딘 등 브리야트 지식인이 주창한 몽고어의 라틴 문자화가 아니라 키릴 문자화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학교 교육, 정부 문서 등 모든 공문서에 키릴 문자가 사용되었다. 新몽골문자는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전통적 몽골 문자와 달리 구어와 문장어가 가까워졌으며, 발음대로 쓸 수 있었고, 근대화에 수반하여 소련에서 들어온 외래어를 표현하기 쉬웠다.

또한 학습하기 쉬워 학교교육의 확대 및 군대나 성인학급에서 문맹퇴치 운동의 보급에도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었다.그 결과 혁명전에 0.7%였던 식자율이 1960년대에는 문맹의 멸종을 선언할 정도로 상승한다.

사회주의시대 러시아어 학습은 제2학년에서 제10학년까지 필수로 여겨졌다. 대학의 졸업논문도 반드시 러시아어로 집필해야 했다. 따라서 러시아어를 모르면 출세가 불가능했다. 러시아어 이외의 외국어 학습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외국어 교육기관은 국립이었고, 사회주의 정권은 몽골 국내에 러시아어 교육기관밖에 설치하지 않았다.

러시아어 이외의 외국어 학습은 해외에 유학하지 않으면 학습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 정권은 러시아어 교육을 위해 단과대학(현 인문대학)을 개설했다. 러시아어 이외의 외국어교육이 시작된 것은 1975년에 몽골 국립대학에 일본어 교육이 부전공으로 개강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의 민주화 이후, 외국어 교육이 폭발적으로 확대하고 있고 그중의 하나가 한국어이다.

2.4 역사교육

1926년에 초등학교의 교과목 가운데 ‘몽골국의 지역정세’가 있는데, “국민은 몽골국의 약사(略史), 즉 일찍이 대국건설기와 그것이 붕괴하여 권한을 잃어버린 시대 및 자치시대 그리고 현재의 인민정부가 건설된 것의 타당성을 배워야 하는데, 신구의 역사서로부터 각 테마를 들어 특별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지침을 시달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에서 배우는 몽골국의 역사의 커리큘럼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이 크게 6개의 단원으로 되어 있다. 1933년 5월 국가기준에 의한 인민중학교 수업 커리큘럼에는 “중학교 수료자는 자국 역사의 개요를 몸에 익혀야 하며, 또한 타국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라고 하여, 1934년도부터 중학교에서 몽골역사와 병행하여 세계사 수업을 행하고, 38년부터 소련역사와 헌법을 독립과목으로 설정하였다.

194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많은 학교에서는 수업기간이 단축되고, 교과목 속에서 역사과목의 학습시간이 감축되었는데, 몽골역사가 중학교에서는 취소되고 초등학교에서만 교육되었다.

1946년부터 49년 사이에 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몇 가지의 결의를 통해 중학교 역사교육체제를 확립하였다. 즉, “(학생들이) 조국사와 문학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기초하여 학습하는 행위는 금후 우리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노동자(국민)를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기초한 혁명적 애국주의에 의해 교육하여, 자본주의 내셔널리즘의 모든 표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에 특별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역사과목, 특히 몽골인민공화국사 수업의 방침과 의의를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역사과목을 낮은 차원의 사상적 관점에서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에게 혁명적 규율을 갖게 하고 애국적·혁명적 관습과 마르크스주의로 완전히 충만하게 교육한다고 하는 면에서 불충분하다. 특히 조국사와 문학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커다란 결점을 초래하고 있다”라고 종래의 역사교육을 비판하였다.

이에 따라 자국사를 4학년에서만 학습하는 것을 고쳐 8학년과 10학년에서 몽골인민공화국사를 가르치는 역사교육의 시스템이 확립되는 대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1921년 혁명 이후 몽골 정부가 정한 ‘중학교 규칙’에서 “몽골국 및 타국의 생활습관과 역사를 배운다”라고 제시한 역사교육의 내용구조가 바뀌어, 중학교에서는 징기스칸에 관해 전혀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몽골인민공화국사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고전이나 공산당사가 중시되었다.

1958년에 승인된 중학교 역사교육계획과 커리큘럼의 특징은 이전의 프로그램이 역사적 사실이 과도하게 많고 역사적 경과의 순서가 일부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역사를 세계사와 몽골인민공화국사로 제도화하고, 세계사 속에 소련역사를 포함시키는 한편, 현대사를 하나의 시대로서 교육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역사교육에서 근현대사의 비중이 커지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역사적 성과와 식민지와 속국의 민족해방투쟁 및 신흥국의 발전상,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역사들을 교육하게 되었다. 1963년에 중학교 역사과목의 지도에서 일부의 변경이 행해지게 되었다.

즉, 역사과목을 가르치는 주요 목적은 인간사회 발전의 역사적 법칙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며,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공산주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깊은 신념을 침투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새롭게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8학년에서 몽골 약사(略史)를 1965년부터 학습하기 시작했다.

1972~73년에 보통교육에서 새로운 교육내용으로 이행이 이루어졌다. 역사·사회과 과목을 ‘몽골인민공화국사(몽골약사 포함)’, ‘세계사’, ‘사회탐구’, ‘몽골인민공화국의 정치와 법률’로 구성하게 되었다.

1980년에 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역사교육 사상과 이론적 수준을 향상시킨다는 지도를 행하여 몽골인민공화 국사 교과서를 새롭게 집필하도록 하였는데, 이 지도는 과도하게 정치색이 강하고 편중된 경향을 띠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987~88년에 교사, 교육자, 학자, 전문가 등이 모여 몽골역사를 배우는 학년, 학습시간, 목적, 내용, 방법 등에 대한 대대적인 개정을 하였다. 이것은 1990년부터 몽골국에서 일어난 사회적 변화와 개혁이 요인이 되어 실현을 볼 수 있었고, 1991~92년부터 보통교육 학교의 역사·사회과교육의 교육과정이 새롭게 편성되었다.

즉 1~3학년의 ‘지역’과목에서 각 지역의 역사문화를 친밀하게 배우고, 4학년에서 조국의 역사문화 지식을, 5~6학년에서 인류의 문명 약사(略史)를, 7~8학년에서 몽골역사를, 9~10학년에서 사회에 관한 지식을 각각 학습하는 구성을 체계화하였다.

1992년에 개정된 역사·사회 과목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자국 및 인류의 사회·문화적 발전과 진보의 역사적 행정(行程)과 주요한 법칙을 이해시키고, 그들을 역사지식과 창조력을 가진 적극적인 시민으로서 육성하기 위해 적합한 지원을 하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특히 “학생들에게 올바른 세계관과 도덕심을 육성하고, 국가 인민이라는 자각을 갖게 하며, 적적 문화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이과목(역사·사회)은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몽골의 진실한 역사를 확실하게 배우도록 하여 애국주의 의식을 형성시켜야 한다는 목적 하에, 적절한 수준에 의해 종합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

3. 민주화 이후의 교육
3.1 개관

역설적이게도 몽골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민주주의 체제 이행 후에 큰 사회적 혼란 없이 사회생활이 지속되고 또 비교적 높은 취학률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시대의 교육의 성과라고 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는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모든 것에 통하는 길」로 생각되며, 몽골에서도 교육을 통하여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국가의 발전을 도모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주의기에 쌓아 올린 교육을 기초로 민주 사회 및 시장 경제에 적응한 국가 형성을 꾀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대의 교육이념이나 목표 그리고 내용과 방법은 급격한 수정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지역에서도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몽골에서 교육은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0년의 민주화 운동에 의해 몽골인민혁명당의 사회주의적 지도성은 포기되었다. 이후 교육 현장에서는 사회주의 색을 일소하는 교육개혁이 시도되었다.

지금까지 취해왔던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들의 교육정책을 방기하고, 몽골문자를 부활하고 민족의 역사를 재고하는 등 민족의 전통적인 문화를 중시하는 한편, 서구의 교육이론을 도입하는 일도 시도되었다. 이러한 교육개혁은 몽골 사회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교육예산의 삭감과 부족, 교원의 부족, 학교기능의 저하, 교재의 불비, 빈곤에 의한 불취학 학생의 출현 등 교육환경의 악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학교현장에서 사회주의 시대 이래의 권위주의적인 체질은 없어지지 않았다.

체벌의 행사나 아동・학생을 복종시키는 수단으로서 ‘칠판 앞 호출’ 등 구례의 관습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방식에 불만을 가졌던 계층은 아이가 부당하게 체벌을 받았을 경우, 교사에 항의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직 미국 등 민주주의 국가의 PTA와 같은 학부모단체는 발족하지 않았다.

또, 사회주의 시대에 정규 학교교육을 받은 계층도 소련의 붕괴와 사회․경제 체제의 전환에 따라 실업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실업할 경우,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신문 판매나 버스 차장 등을 하며 가계를 돕는 경우가 많았다.

몽골의 학교교육법 상으로는 의무교육 연령에 있는 청소년(16세 미만)은 학업에 전념할 의무가 있으며 취업해서는 안 되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반면에 고소득층의 자녀들은 사립 10년제 학교에 다니는 경향이 증대되고 있다.

입학시험이 있는 학교는 적고 수업료를 납입하면 입학할 수 있어,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다. 고액의 수업료는 고품질의 수업 내용에 대한 대가이지만, 영어 초급자가 태연하게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3.2 학제의 개혁

몽골은 1924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의 사회주의 국가 '몽골 인민공화국'으로서 건국되어 소련의 충실한 위성국으로서 대략 70년간에 이르러 사회주의 체제를 관철해 왔다. 그러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베를린장벽 붕괴 등에 영향을 받아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걸쳐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드디어 1990년에 처음으로 복수 정당제를 채용한 선거를 실시하고, 1992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나라 이름도 '몽골국'이라고 칭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당시 수상은 "지금까지 의존해 온 소련이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으며, 몽골도 중대한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여 자립한 국민경제를 신속하게 확립할 필요가 있다"라고 몽골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1991년부터 3년간에 걸쳐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한다고 선언하였다.

몽골국의 새로운 출발과 함께 교육 분야에서도 교육개혁이 추진되었다. 그 최대의 것은 몽골에서 학교 교육 제도가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 온 10년간의 교육연한을 국제적 기준에 맞게 연장하는 것이었다. 2005년에는 교육연한을 11년으로, 2008년도에는 12년으로 연장하는 안이 통과되었다.

민주화 이후, 몽골에서 외국으로 유학을 바라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지만, 10년이나 11년의 교육연한으로는 고등학교 졸업 후, 그대로 계속해 유학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학제부터 세계수준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는 인식이 이루어졌던 것이 한 요인이다.

3.3 脫러시아화와 역사교육의 개혁을 통한 국민주의 교육

1992년, 국민대회의는 몽골문자의 부활을 결정했지만, 몽골 문자를 폐지하고 나서 50년이 경과하여 몽골문자의 즉시 부활은 불가능했다. 현재 교육 현장에서 주 1시간의 몽골문자 교육이 정력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아동・학생 사이에서도 몽골문자의 읽고 쓰기를 할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스테이터스가 되고 있다.

러시아어 학습은 1999년까지 필수였지만 동년 선택으로 격하되고, 대신에 영어가 필수 교과가 되었다.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려면 외국어의 지식이 불가결하다는 의식이 강하고, 일본어나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도 많다.

외국어 교육을 간판으로 하는 사립 10년제 학교도 많다. 징기스칸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의 각지에는 징기스칸 혹은 그 시대와 관련한 상징물이 세워지는 등 민족주의적인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그리고 교육에서는 탈러시아화가 급속하게 전개되어, 지금은 울란바토르 시내에 남아있는 옛 건물들 이외에는 러시아의 그림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1992년에 개정된 ‘역사·사회에 관한 지식’의 수업 프로그램에서는 그 목적에 관하여 “학생들에게 자국 및 인류의 사회·문화 발전, 진보적 역사 도정과 주요한 법칙을 이해시킨다. 또한 그들이 역사적 자각을 가지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인민으로 되기 위하여 적절한 원조를 행하는 것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세계관과 도덕심의 형성, 국가인민이라는 자각, 그리고 교양문화를 형성하는 위에 이 수업은 특별한 역할을 가진다”라고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까지 교육정책의 근저에 있던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불식되고, 지금까지 억제되었던 민족의식이 고양되는 한편 자유가 강조되게 되었다.

1994년에 4학년 역사 교과서가 출판되었는데, 몽골문자의 공용화 정책에 따라 몽골문자로 집필되었다. 종래의 소련 중심 역사관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져 몽골사와 세계사를 통하여 ‘진정한 애국심’을 형성하고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역사 사실의 이해를 높이는 것이 그 목적으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시기에 중시되었던 ‘10월 혁명’과 1921년 ‘몽골인민혁명’ 그리고 ‘몽골인민혁명당의 공적’ 등이 새로운 교과서에서는 거의 기술되지 않거나 간략화되었다. 현대사의 출발점도 ‘1921년 몽골인민혁명’으로부터 ‘1911년 민족해방혁명’으로 변경되었다.

1998년의 역사·사회과 내셔널 스탠다드를 보면 기술형식에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요소가 문면에서 사라졌다. 즉, 사회주의 시대에 강조되었던 ‘10월 혁명’과 ‘1960년 헌법’ 등이 역사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특정 정당에 의한 개입을 부정하는 정치적 중립 원칙이 강조되고, 몽골 민족으로서 자부심과 자신들의 역사를 회복하려는 방향이 엿보인다. 다만, 내몽골 지역이 제외된 채, 현재의 몽골국 영토내의 역사에 머물고 있다.

전체적으로 민주화 이후 역사교육에서는 국민주의의 대두가 엿보인다. 사회주의 시대의 종결에 의해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신하는 민족의식이 부흥하였다.

교육이념을 표상하는 말로서 자유, 평등, 진정한 애국심, 국민으로서의 자각 등이 강조되며, 이를 통해 몽골인으로서 아이덴티티의 회복과 민족의식 내지는 국민의식의 고양이 꾀해지고 있다.

3.4 학술 수준의 문제

몽골의 대학원은 선진국의 대학원에서 학력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논문을 타인에게 대필시킨 사람, 연구 노트 정도의 논문으로 학위가 인정된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대학원의 학술 수준이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부 과학성은 아직 몽골의 대학원 졸업 경력을 학력으로 인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각 대학원의 판단'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몽골의 최고 학부로 여겨지는 몽골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조차도 일본에 유학하면 석사과정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일본 문부 과학성과 몽골 문부성 간에 몽골의 대학원 경력을 학력으로서 인정하도록 하는 협의가 진행되고 있어 가까운 장래에 일본인의 몽골 유학은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학술 수준의 문제 등으로 고소득자층은 아이를 국내의 대학에 진학시키지 않고, 학부 단계에서 해외 유학을 시키는 사람이 많다.

3.5 교원의 대우와 교육 격차

10년제 학교의 교원이나 경찰관의 월급은 원화로 약 8-9만 원 정도이고, 게다가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서 지불되는 경우가 많다. 교원은 값싼 월급의 상징이며 이직율도 높다. 공립 10년제 학교의 교원은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해고될 일은 없지만, 서비스업의 색채가 강한 사립 10년제 학교의 교원은 아동・학생이나 보호자로부터 평판이 나쁜 것만으로도 해고될 수 있다.

수도의 생활 수준이 두드러지고 지방의 생활 수준이 열악한 문제는 개발도상국 공통의 고민이다. 몽골도 예외가 아니고, 울란바토르와 지방 아이들 사이의 정보량 차이는 매우 크다.

울란바토르의 특히 부유층 자녀들은 선진국의 정보를 다이렉트로 접하고 있어 선진국 아이들과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현재 몽골에서는 울란바토르와 지방의 교육 격차를 시정하는 법률의 정비가 진행되고 있다.

4. 민주화 이후 몽골교육의 과제와 특징

민주화 이후 전통적인 몽골문자의 부활, 서구적 교육이론의 도입, 몽골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학의 부활, 교육의 민주화, 러시아어 이외의 외국어 도입, 학교의 네트워크화, 컴퓨터의 교육적 활동 등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육재정의 측면에서 보면 1990년부터 1992년에 교육비가 56% 삭감되었다. 민주화 이후 학교에서는 교직원, 특히 일반직원의 대폭 삭감에 더하여 교사의 파업과 현금 수입을 얻기 위한 겸업이 성행하였다. 또한 당시까지 무상이었던 유치원 급식, 기숙 학교, 제복, 교재, 교통비의 유료화 등 교육 재정과 여건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또한 정부의 긴축재정은 지방 분권화를 통하여 지방 정부에게 독자의 재원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교육재정이 부유한 지방과 빈곤한 지방 간에 격차의 확대를 초래하였다. 이에 仲律子는 “현대 몽골이 안고 있는 교육적 과제는 우선 경제문제의 개선이 선결이다.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교사의 급여가 보증되고, 실업자가 감소하며, 거리 청소년이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새로운 학교와 교재도 만들어지고, 정보교육의 충실도 꾀해질 것이다”(仲律子, 2001)라고 말한다.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교육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교육 재정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몽골은 1996년부터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원조를 받아 교육개혁을 추진하였다. ADB의 ‘교육분야 개발 프로그램’ 속에는 중앙과 지방 교육기관의 교육관리 능력 향상, 고등교육의 관리와 학술 발전의 조정, 후기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질 향상, 직업기술교육의 프레임 워크 개발 등이 목표로 되었다(宮前奈央美, 2009).

민주화 이후 몽골의 교육회복은 외국과 국제기관의 교육협력에 의한 것이 많다 .ADB를 비롯하여 유네스코, 세계은행, 유니세프, UNDP 등의 국제기관과 일본, 한국, 미국, 카나다, 덴마크, 오스트레일리아 등 많은 외국 정부가 협력을 하고 있다.

또한 외국의 NGO도 활약하여 거리청소년 보호에서 시작하여 도덕교육과 교과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이 확대되고 있다. 몽골은 사회주의 시대에 소련을 비롯한 시회주의 국가들로부터 지원으로 발전해왔다. 민주화 이후에는 자유진영 여러 나라와 국제기관의 지원, 그리고 NGO 등 민간으로부터 교육협력을 받고 있다.

1924년 독립 이래, 교육시설과 설비, 나아가 내용에 이르기까지 몽골의 교육은 외국의 지원이 큰 공헌을 하였다. 지원하는 국가나 기관의 변화는 있었지만 금전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원조에 힘입었다는 특징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의존체질은 사회주의시대부터 부(負)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宮前奈央美, 2009).

5. 맺음말

필자가 몽골의 교육을 주목하는 이유의 하나는 다름 아닌 한반도 통일 이후 북한의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구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동독의 사례도 참고가 되겠지만, 같은 아시아 문화권인 몽골의 교육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몽골의 사례가 보여주는 두 가지 교훈은 먼저,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했을 때 교육의 전면적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고, 그때 어느 모델을 따라 개혁을 추진할 것인가가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육의 회복 혹은 재건을 위한 재정의 확보가 현실적으로 가장 큰 중요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몽골은 1920년대에도 1990년 이후에도 교육재건을 위한 재정을 외부에 의존하는 행태를 취해 왔다.

몽골은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교육을 개혁할 때는 소련식 교육을 모델로 하였다. 1990년 이후에는 여러 국제기구와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받아 개혁을 추진하기 때문에 교육에 있어서 일관된 모델이 없고 혼란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반도 통일에 즈음하여 북한의 교육을 재건함에 있어서 그 모델로서 대한민국의 교육이 모델이 될 수 있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체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과연 통일시대의 교육체제로서 합당한가에는 강한 의문이 제기된다.

1987년 이후 대한민국 경제의 잠재성장력은 지속적으로 감소해오고 있으며, 사회는 안정적 및 지속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혼란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교육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 참고 문헌 ]
高橋梢「モンゴルにおける歴史教育の役割の変化に関する考察」歴史教育史研究会『歴史教育史研究』第8号、2010年。
宮前奈央美「モンゴルにおける社会体制移行と教育政策の課題」『九州大学大学院教育学コース院生論文集』第9号,2009年。
O.フレブ「モンゴルの学校教育における歴史・社会科教育の歴史概説」歴史教育史研究会『歴史教育史研究』第5号、2007年。
仲律子「モンゴルが抱える教育課題」Nagoya University『Bulletin of the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and Human
Development』2001, Vol. 48. 9-16.
小出達夫「モンゴル人と教育改革―社会主義から市場経済への移行期の証言―」『北海道大学大学院教育研究院紀要』
第111号、2010年12月。
https://ja.wikipedia.org/wiki/%E3%83%A2%E3%83%B3%E3%82%B4%E3%83%AB%E5%9B%BD%E3%81%
AE%E6%95%99%E8%82%B2
http://www.mofa.go.jp/mofaj/toko/world_school/01asia/infoC120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