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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세상 끝 바람이 불어오는 곳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월간교육 | 승인 2016.08.26 10:47
<토레스 델 파이네 전경. 사진=김동우>

글 김동우 여행·사진작가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10대 낙원

파타고니아는 아르헨티나 남부에 있는 반 건조성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면적은 67만㎢로 우리나라(남한)의 7배 정도에 달하며 초원과 빙하지대로 이뤄져 있다. 예부터 바람이 많아서 ‘바람의 땅’으로 불렸다. 날개 길이만 3m에 달하는 콘도르를 공중으로 부양시킬 수 있을 만큼 바람이 강한 곳이다. 이처럼 파타고니아의 대명사는 바람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파타고니아를 ‘폭풍우의 지대’라 칭하기도 했다.

파타고니아란 명칭은 마젤란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한 원주민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란 말에서 왔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 평균 키가 155㎝정도였는데, 파타곤은 무려 180㎝였다고. 이 거인족은 떼우엘체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토레스 델 파이네를 10대 낙원으로 선정했다. 사진=김동우>

파타고니아에는 남미의 알프스 바릴로체, 최고의 트레일 토레스 델 파이네, 빙하의 본좌 모레노 빙하 등 유명 여행지가 즐비하다. 특히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10대 낙원’으로 선정한 지상 최고의 트레일 토레스 델 파이네는 트레커들이 평생 한번 걸어 보길 소망하는 곳이다.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이곳은 중력에 반하는 수직 이동만 있는 산행과는 질적으로 다른 코스로 트레커를 안내한다. 노글노글한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하다 코발트빛 호수를 지나 산에 오르는 길… 트레킹의 참 매력이 바로 이 트레일에 전부 녹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지상 최고의 트레킹 코스는 한마디로 꿈의 길이다. 이 트레일은 단순히 산과 산을 잇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 본연의 탐미적 갈망을 길 위의 아름다움으로 충족할 수 있게 해준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상징 토레스 삼봉. 사진=김동우>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살아 있는 아우라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은 보통 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일주 코스’와 3개 미라도르(Mirador, 전망대)를 찍는‘W 코스’로 나뉜다. 일주 코스 완주는 8~10일이 필요하고 W코스는 4~5일 정도가 걸린다.

W 코스 완주는 80㎞ 정도를 걸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정이다. 3개 꼭짓점을 하루에 하나씩 올라 3일 만에 완주할 수 있는데, 이 일정은 산을 좀 빠르게 타는 사람 중 백패킹을 해야 맞출 수 있다. 산행 경험이 별로 없거나 산장을 이용할 경우 3박 4일 일정으론 무리가 따른다. 산장 위치가 불행히도 딱 떨어지지 않는다.

W 코스의 첫 번째 미라도르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상징인 ‘토레스 삼봉’으로 트레커를 이끈다.

우뚝 솟은 세 개의 봉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자연스레 감탄사를 내뱉게 한다. 사진으로 보던 위풍당당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첫 번째 미라도르의 바람은 달콤했다.

<바예 델 프란세스의 전경. 사진=김동우>

다음날 찾은 두 번째 꼭짓점 바예 델 프란세스 계곡은 한마디로 미(美)로부터의 초대다. 출발부 바예 델 프란세스 계곡은 줄곧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이번 여행 중 최고의 희열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풍성한 맥주 거품처럼 차올랐다. 그토록 찾아 헤맨 샹그릴라가 바로 여기였다. 첫 키스의 떨리는 마음으로 눈앞에 펼쳐진 비경들을 하나씩 눈에 새겼다.

원경과 근경 모두가 한시도 쉬지 않고 날 유혹했다. 아기자기한 맛에 진한 여운까지, 바예 델 프란세스의 여러 가지 색깔 풍경 앞에 난 아름다움을 탐닉하며 환희의 탄성을 내질렀다. 능선에선 지리산이, 기암괴석에선 설악산이, 암봉에선 북한산이, 고목에선 태백산이, 하얀 만년설 이불을 덮고 있는 설산에선 안나푸르나가 떠올랐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살아 있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빙하가 지나가며 거칠게 조각한 계곡은 영겁의 시간을 거치며 부드러운 U자 형태로 다듬어져 있었다. 좌에서 우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은 세계 일주를 위해 포기한 모든 걸 보상해 주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은 산장을 예약하면 조금 쉽게 즐길 수 있다. 사진=김동우>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

트레킹 사흘째 아침. 안온하고 싱그러운 아침이었다. 반면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발목과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어제 하루 30㎞를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빵과 수프로 허길 해결했다. 캠프를 철수하고 짐을 챙겼다.

이날은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빠이네 그란데(Paine Grande)까지 가서 캠프를 설치한 뒤 W 코스의 마지막 꼭짓점 레푸지오 그레이(Refugio Grey)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길게 이어진 능선에 올라 스틱을 찍으며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뻐근한 몸이 걸음을 더할수록 서서히 풀렸다.

탁 트인 개활지로 나오자 파타고니아의 바람이 따귀 치듯 달려들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바람이 벽처럼 느껴졌다. 걸음은 바람의 세기만큼 느려졌다.

심술궂은 바람 너머엔 슬픈 현실이 기다렸다. 검게 타다만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몸을 흔들어댔다. 검은 땅과 나무가 햇살을 그대로 먹어치웠다. 꼭 죽음이 노려보는 듯한 음산한 살풍경이 길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몇 년 전 이스라엘 여행자로 인해 생긴 산불의 흔적이었다. 무지막지한 파타고니아의 바람을 타고, 불길은 파죽지세로 대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소식은 지구 반대편 한국까지 날아왔다. 무심코 흘려들은 뉴스 내용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일은 무척 불편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를 걷다 마주한 장엄한 풍경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한편의 대서사시처럼 느껴진다. 사진=김동우>

하지만 이런 무거운 마음도 잠시. “와~아!” 마지막 꼭짓점으로 가는 길에선 감탄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호수 뒤편으로 아리따운 설산이 굽이치고, 구름도 이 모습에 취했는지 산봉우리에 내려앉아 가던 길을 멈추고 인간계 절대 비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유빙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라고 그레이(Lago Grey)에 도착했다.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진 호수와 설산은 놀라운 하모니를 빚어냈다.

하지만 W 코스 완주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까마득했다. 시간을 계산하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내리막이 시작됐다. 숲길을 걷다 좀 지루하다 싶으면 봄을 알리는 꽃길이 이어지고 그러다아슬아슬한 급경사가 나왔다. 다이내믹한 코스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걷기에 집중하다 보니 거리개념과 시간개념이 사라졌다. 가다 힘이 들면 빙수로 목을 축였다.

어느새 W 코스의 마지막 미라도르가 눈에 들어왔다. 전망 좋은 바위에 올랐다. 거대한 빙하가 실체를 드러냈다. 양반다리를 하고 눈을 감았다. 잠시 이번 세계 일주 최고의 순간을 즐겼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대자연은 경건함으로 다가와 겸손함을 가르쳐 주었다.

힘이 빠져 버린 발목을 조심스럽게 간수하며 캠프로 돌아왔다. 80㎞에 가까운 강행군이 끝나자 맥이 풀렸다. 1리터 짜리 팩 와인을 땄다. 싸구려 와인이 달콤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세계 일주 중 가끔 ‘내가 정말 여행을 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자연이 만든 엄청난 감동 앞에 서면 으레 망막에 맺힌 이미지가 현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야릇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 한 번 현실이 꿈결같이 다가왔다.

*이 글은 김동우 여행·사진작가가 월간교육 6월호에 기고한 글을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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