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란 뜻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머릿속에 ‘생각발전소’를 하나씩 가지고 태어난다. 실제 머릿속으로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은 뇌세포에 전기적 신호가 발생하여 움직이면서 뇌의 곳곳에 전파된다는 뜻이다. 결국 인간의 사고력은 생각발전소를 얼마만큼 가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흔히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도 자신의 뇌를 10% 밖에 쓰지 못했다고 평할 때도 바로 생각발전소의 가동률을 이름일 것이다. 공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생각발전소를 먼저 들먹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는 오롯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신만의 생각발전소를 어떻게 시동을 걸어서 어떻게 가동할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고1 학생이 10분간 공부한 후 수능 문제를 푼다?
서울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1학년 방과후교실로 ‘자기주도 수학집중반’을 맡아 지도한 두 번째 수업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겠다. 첫 번째 수업 후 기말고사 기간이 끼면서 3주만에 보는 아이들이다. 첫 수업에서 ‘공부하는 뇌’의 ‘생각공부법’에 대해 PPT까지 만들어 설명했는데 시큰둥했었다. 일주일 전에는 충북의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같은 내용으로 강의했을 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어쩌면 학생들에게는 ‘생각발전소’나 ‘생각공부’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것 같아 두 번째 수업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수업 자료로 2014학년도와 2015학년도 수능시험 수학 문제 중에서 1∼4번까지 총 8문제를 준비했다. 행렬, 지수, 극한 문제로 모두 2학년에 올라가서 배우는 내용이다. 그런데 수업하는 반 학생들은 ‘기초반’으로 모집해서 사실 수학 성적이 형편없는 아이들이다. 더구나 아직 배우지도 않은 내용으로 수업을 하고 바로 테스트까지 해볼 요량으로 준비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학생들에게 ‘생각공부’의 힘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생각발전소’에 시동만 걸리면 처음 배우는 내용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고, 실제 수능 문제도 거뜬히 풀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교안을 스케치해 수업준비를 했다.
하지만 내심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학생들이 과연 호응을 할까, 10여분의 학습으로 실제 수능 기출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 무모한 시도인 것 아닌가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놈에게 통했는데 가능하겠지라는 우격다짐으로 시작했다. 비법(?)은 있었다. 암기하게 하지 말자, 공식을 제시하지 말자, 발문으로 자기 생각을 꺼내게 하자,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배운 언어로 소통하자... “이거 뭔지 아니? 초등학교 때 어떻게 풀었지? 중학교 때도 배운 적 있지? 그때는 어떻게 풀었니? 어, 그건 앞뒤가 안맞는 것 같은데? 그걸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알겠지, 이제 수능 문제를 풀어볼까? 1분이면 풀 수 있겠지...”
내용 주제별로 10여분의 발문과 질문으로 오개념을 바로 잡아주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의 언어로 문제 상황을 제시한 다음 그 해결 방안을 스스로 찾도록 유도했다. 그러자 생각지도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행렬, 지수, 극한 모두 처음 접하는 내용인데, 실제 수능 기출문제를 다 푸는 것이다. 답이 틀린 학생도 책상을 치면서 “아 이런, 실수했네”라고 아쉬워 한다. 정말 전혀 기대하지 못한 결과다. 그리고 확인했다. “내일 당장 수능시험을 보면 오늘 배운 내용은 모두 풀 수 있겠지!” 학생들은 이제 신이 났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처음 해보는 것일 게다. 수업 시작할 때 사정이 있어 조퇴하겠다는 학생이 쉬는 시간도 없이 100분간의 수업시간이 끝났는데도 되레 더 공부하면 안되냐고 묻는다. 이것이 ‘생각공부’다. 이것이 ‘생각발전소’의 힘이다. 이것이 ‘생각하는 뇌’의 공부다. 지금 이제 막 시작된 것일 뿐이다.


생각공부는 남다른 생각거리로부터 시작된다
학생들의 생각에 불이 붙었다. 생각발전소가 점화되어 시동이 걸린 것이다. 이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일주일에 수업 100분 그리고 숙제 3시간 분량을 꾸준히 하면 올해 수능 수학에서 70점 이상 받을 수 있다!”고. “죽어라고 열심히 공부하지 마라”, “자신에게 알맞게 요령껏 적당히 공부하면 된다”고. 숙제도 신청하는 사람에게만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내밷고 나니 덜컥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믿는다. 나 자신이 아니라 학생들의 ‘생각’을 믿어야 한다. 숙제 자체를 싫어하는 게 당연할 진데 되래 숙제를 하겠다고 덤비는 것을 보고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바로 ‘진짜 생각거리’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생각거리가 생기자마자 그동안 침묵하던 자신의 ‘생각발전소’에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시동이 걸린 것이다. 단 100여분의 체험으로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찰나를 엿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어떻게 공부하고 있나?
중·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명제의 ‘필요충분조건’에 대해 다 배웠을 것이다. 지금부터 공부와 성적의 관계를 명제로 풀어보자. 조건문에서 가정 P를 공부에 노력한다면 참(T), 나태하다면 거짓(F)이라고 하고, 결론 Q를 성적이 양호하다면 참(T), 불량하다면 거짓(F)이라고 전제하자. 이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공부와 실제 성적 결과를 필요충분조건의 진리표로 완성해보자.

 

 

 P(공부)

 Q(성적)

 P ⇔ Q

 

 

 

 

 

자신의 공부와 성적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의 진리값은 아래 네가지 중에 하나에 해당될 것이다.

 

 P(공부)

  Q(성적)

 P ⇔ Q

 현실

 

 T

 20%

 

T

 50%

 

 F

 0%

 

 F

 30%

 

위 진리표에서 맨 오른쪽 칸의 현실은 실제 중·고등학생들이 공부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노력과 성적의 관계 정도에 대한 답변을 조사한 결과이다. 사실 ➊과 ➌, ➍는 수학 명제의 진리값과 공부 현실의 결과값이 일치한다. 공부와 성적의 관계에서 노력하면 양호하다가 참이고, 나태하면 양호하다는 거짓이며, 나태하면 불량하다는 참이므로 자신의 공부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➋의 경우 50% 정도의 학생이 ‘공부에 노력해도 성적이 불량하다’는 답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학 명제의 진리값으로보면 ‘거짓’이어야 하는데, 실제에서는 50%의 학생들이 ‘참’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다. 수학 명제의 진리값으로보면 응당 ‘공부에 노력하면 성적이 양호’해야 하는데 현실은 반 이상의 학생이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공부하고 있나?’ 나의 공부가 ➋에 해당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 게다. 
“나는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지? 나도 쟤랑 거의 비슷하게 공부했는데 왜 재는 나보다 월등하지? 나는 왜 이래? 내가 살아 뭐하나? 살 가치가 있나?” 
그렇다. 지금부터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 ‘나의 공부 문제’를 파헤쳐 보려는 것이다. 현실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공부에 노력하면 성적이 불량’한 것이 ‘참’으로 인정되는 부조리를 끊고, 수학 명제의 진리처럼 ‘공부에 노력하면, 그리고 오직 그런 경우에만 성적이 양호하다’는 공정한 공부 명제로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먼저 ‘나’를 포함한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공부해 왔는지부터 꼼꼼히 따져서 그 원인을 찾아 보도록 하자.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공부해 왔나?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전 세계 학생을 대상으로 3년에 한 번씩 공부 노력과 성취도 점수를 평가하는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가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교육을 본받자”고 자주 언급한 근거도 바로 PISA 결과를 두고 한 말이다. 이미 2000년부터 세계 60여개국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읽기, 수학, 과학 영역을 조사해 ‘PISA 보고서’를 발표해 왔다. 
최근 2012년에 실시된 평가를 포함해 총 5회에 걸쳐 실시된  PISA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에서 항상 핀란드와 1, 2위를 다투어 왔다. 그런데 이 최상위권 순위는 성취도 점수만 비교해 발표한 것으로, 그 이면의 실상에 대해서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다음 그래프를 살펴보자.

 

 

학교 수업시간을 제외한 1주일 동안의 공부시간을 국가별로 비교한 그래프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학생들의 공부시간은 핀란드 학생들보다 약 3배가량 많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물론 학교 정규 수업시간도 우리나라가 OECD 국가의 주당 평균보다 6시간 정도 많다.

 


 

가 발표되면서 우리를 바싹 긴장시킨 적이 있다. 아래 그래프는 우리나라와 함께 PISA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해온 핀란드와 일본의 학습효율화 지수를 비교한 결과이다. 일단 핀란드와 비교하면 거의 비슷한 성취도지만 학습효율화 지수로 보면 30P 이상 차이가 나며, 순위 면에서도 OECD 30개 국가 중에서 핀란드가 1위인 반면 우리나라는 24위로 거의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우리의 공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 세계인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 우리의 성적표에 마냥 취해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1만 시간의 법칙은 틀렸다?
지난 2014년 7월 국내 모 일간지와 공중파 TV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선천적 재능을 따라잡기 힘들다’며, ‘1만 시간의 법칙이 틀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보도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것은 그 동안 선천적 재능이 모자라더라도 1만 시간 동안 꾸준히 노력하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1만 시간의 법칙’과, 에디슨이 ‘천재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명언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대다수 건실한 노력파에게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국제적 권위의 심리학 학술지인 『심리과학』에 실린 연구 논문에서 잭 햄브릭 미시간주립대 교수 연구팀은 교육 분야에서 노력한 시간이 실력의 차이를 결정짓는 비율은 4%에 불과하고, 음악·스포츠·체스 등의 분야는 20~25% 정도라고 밝혔다. 그는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수적이지만, 선천적 재능과 비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전체 성과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 (단위 : %)>

                                                                                                                         ※ 미국 심리과학회(2014년)

 

이 연구 결과는 1993년 플로리다주립대 앤더스 에릭슨 교수의 기념비적인 연구를 뒤집는 것이다. 그는 음악가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일급 연주자와 아마추어 연주자 간 차이의 80%는 연주 시간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에릭슨 교수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기자 출신 맬컴 글래드웰은 2009년 발표한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빌 게이츠, 비틀스, 모차르트 등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공통점으로 ‘1만 시간의 법칙’을 꼽았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선천적 재능 대신 1만 시간 동안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1만 시간은 하루 3시간, 일주일에 20시간씩 꼬박 10년이 걸린다. 
그런데 이 보도를 접한 한국의 부모들은 화들짝 놀랐을 것 같다. 앞의 그림에서 교육 분야의 그래프를 보면 공부에서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분야보다 특히 현저하게 낮아 4%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선천적 재능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것이니, 그동안 아이에게 “열심히 공부만 하면 다 돼”라고 했던 말이 다 공염불이 된 것 같다. 유독 노력을 절대시하는 우리나라 부모들이기에 재능 없는 노력은 허사가 될 수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인 게다. 미국의 부모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노력보다 재능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위 연구 결과는 미국의 부모들에게는 오히려 위안이나 안도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소한 우리나라 부모들이 알고 있는 노력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에디슨의 말을 철석같이 믿어온 터라, 그러한 믿음으로 아이의 미래를 준비해온 부모들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울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그토록 결정적이라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고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99%의 노력도 1%의 영감이 없으면 소용없다?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들이 에디슨의 말부터 잘못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말하고 싶다. 당시 에디슨이 라이프지와 인터뷰에서 기자가 어떻게 그 많은 아이디어의 발명에 성공할 수 있었냐고 물었을 때 에디슨은 “99%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누구나 갖고 있다. 나는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1%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영감이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기자가 잘못 이해해 99%의 노력을 강조하는 내용의 기사를 내서 에디슨이 정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일종의 세간에 알려진 해프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에디슨은 이후 섹세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한 말은 노력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미였다”고 말했다. 이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기자가 “1%의 영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에디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표에 모든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쏟아 붓는 집중력이 필요하다”면서, 이러한 집중력을 가지려면 좋은 협조자와 꿈을 이루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다. 
에디슨은 거의 평생을 매일 18시간 이상 일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공 요인이 노력이라고 밝힌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뢰를 보내주는 아내가 자신이 발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이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에디슨이 말한 영감이란 것이 천재성으로 보기 보다는 창의성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억지스런 노력은 좀 줄이고 창의성을 키우는 노력이 99%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선천적 재능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말이 된다. 사실일까? 이에 대해 앞서 소개한 햄브릭 교수팀의 연구를 다시 살펴보자. 먼저 지적되어야 할 점은 국내 언론의 보도에서 논문의 오독이나 잘못된 번역에 대한 문제다. 각각의 분야에 대한 노력의 비중이 평균 수치로 나타나 연구 대상의 개인에 따라서는 10%인 것도 있고 80%인 것도 있는데, 이것을 평균치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또한 연구 결과의 데이터에서도 선천적 재능 ‘만’이 아니라 재능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설령 재능 ‘등’이 80%라는 것은 재능 이외의 운, 환경, 끈기, 성격 등등을 다 합한 수치다. 이는 원논문에서 햄브릭 교수가 “의도적 수련의 양은 통계적, 실용적 견지에서 의심할 바 없이 중요한 예측 변수이지만, 에릭손과 그의 동료들이 주장한 정도는 아니다”고 결론짓는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즉, ‘1만 시간의 법칙’이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국내 보도상의 오류이든 연구 방법 자체의 문제이든 분명한 것은, 에디슨이 정정 인터뷰를 하면서까지 노력보다 영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처럼 노력 그 자체가 성공의 100%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1만 시간의 법칙’의 모태를 마련한 에릭손 자신도 “특정 영역에서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성과는 경험을 오래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획득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햄브릭과 에릭손의 연구 결과와 ‘1만 시간의 법칙’, 에디슨의 정정 인터뷰 등이 말하는 공부에서의 시사점은 무엇일까? 모두가 하나같이 결론적으로 강조하는 점은 무조건적인 노력 자체가 어떤 결실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력의 양이 아니라 노력의 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노력이 성공으로 이어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는 노력의 유용성과 피드백을 들 수 있다. 노력의 유용성이란 이 정도의 노력으로 어떤 수준을 달성하겠다는 의지와 목표를 갖게 하는 동기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력의 과정에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구체적인 피드백을 적절한 시기에 받아 개선해 나갈 수 있어야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초기에 뛰어난 코치나 멘토의 지원이 성공하는 노력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퇴계와 율곡, 공부에서 노력과 재능을 말하다 
여기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재능에 대한 과신이다. 타고난 재능이나 지능을 믿는 고정된 사고를 하게 되면 노력을 덜 하게 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재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햄브릭이 결국 노력이 따라야 꽃피울 수 있다고 했고, 에디슨은 1%의 영감으로 성공하기 위해 매일 18시간을 노력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노력하기 나름이야”라고 믿는 성장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훨씬 성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노력과 재능을 이야기할 때 우리 선조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분이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퇴계와 율곡이다. 두 분은 500년 전 조선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공부의 대가였다. 그런데 퇴계는 한번 공부를 시작하면 날이 저물고 밤이 이슥한 줄도 모르고 공할 만큼 노력형 공부였다고 한다. 반면, 율곡은 어려서부터 한번 보고 들은 것은 거의 잊지 않을 만큼 뛰어난 천재형 공부였다고 한다. 퇴계는 공부에는 노력이 우선이고, 노력에 앞서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율곡은 과거에서 9번 모두 장원급제했다는 뜻의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지녔을 정도로 조선 역사에서 최고의 천재였다. 
그런데 두 분의 공부에는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같았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달랐던 것 같다. 두 분의 어린 시절처럼 공부에서의 중요성을 퇴계는 노력의 유용성에, 율곡은 노력의 피드백에 두고 있다. 퇴계는 공부를 논할 때 맹자에 나오는 알묘조장(揠苗助長)의 교훈부터 든다. 이 말은 중국 송나라 때 어떤 농부가 모를 심어놓고 커가는 모습을 보고 모가 잘 자라도록 모의 순을 조금씩 당겨서 뽑았는데, 눈으로 보기에는 모가 커 보이지만 결국 농사는 망쳤다는 내용이다. 이는 벼락치기 공부가 아니라 밑에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노력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퇴계의 대표적인 사상에는 ‘함양’과 ‘체찰’이 있는데, ‘함양(涵養)’이란,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정서를 함양하라’와 같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고, ‘체찰(體察)’이란 문자 그대로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몸을 돌보면 더 이상 욕망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심성을 닦고 몸으로 익혀 실천하라는 뜻이다. 퇴계의 으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경(敬)’의 철학 또한 “공부는 몸에 배도록 익히는 작업이 중요하다”며 “익히는 일은 어떤 것이든 하나에 몰입하는 정신 집중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앞에서 퇴계는 노력을 가장 중요시했고, 성공으로 이어지는 노력을 위해서는 내적 동기와 같은 노력의 유용성을 우선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율곡의 공부론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선후본말론(先後本末論)’이다. 공부에는 선후, 즉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이 있다. 또한 만물에는 근본(根本)과 말단(末端)이 있다. 이 둘을 구별해 낼 줄 알아야 공부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단이라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 기본이 되어야 그 다음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공부에서 우선순위와 경중(輕重)에 따라 ‘선택과 집중’을 적절히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율곡이 노력의 과정에서 성공의 필요조건인 피드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두 분은 공부에 대한 생각도 달랐지만, 그 분들이 각각 선택한 길은 전혀 달랐다. 퇴계는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서원을 세우는 등 유학의 토양을 가꾸는 일에 전념했다. 조선 정치의 문제는 모두 학문의 빈곤에서 비롯됐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 율곡은 공부한 것을 세상에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낡은 제도와 관습을 고치기 위해 당시 임금이던 선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직접 정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 노력으로 공부를 완성하다 
조선 시대 선비 중에 공부에서 노력의 대가를 든다면 단연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이 18년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키웠지만, 처음에는 너무나 깐깐한 스승이라서 대부분 견디기 힘들어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인맥을 이용해 출세해보려고 왔다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걸 알고 난동을 부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등 딱히 문하생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늙은 아전이 방문해 열다섯 살 된 자식인 황상을 맡기고 갔다. 다산이 몇 일간 황상을 지켜보면서 싹수가 보여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하자 황상이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저에게는 세 가지 병통(문제)이 있는데 첫째는 머리가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막혀 답답하고, 셋째는 미욱해서 이해력이 부족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산이 황상에게 “공부 좀 한다는 자들에게는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는데, 너는 그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로 암기력이 좋으면 그 재주만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하고, 둘째로 글재주가 좋으면 속도는 빠르지만 글이 부실하고, 셋째로 이해력이 좋으면 한 번 깨친 것을 대충 넘기기 때문에 깊이가 없다”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둔탁한 끝으로 처음에 뚫기 어렵지만 한번 뚫리면 막힘이 없고, 갇혔던 봇물이 한번 터지면 그 흐름이 장대해지며, 답답함을 이기고 꾸준히 연마하면 그 빛이 더욱더 반짝이는 법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다산의 제자가 된 황상은 다산의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 하라”고 세 번씩이나 당부한 말을 ‘삼근계(三勤戒)’라 부르고 평생 마음에 새겨 실천했다. ‘과골삼천(踝骨三穿)’이란 말도 나이 70이 넘어서도 열심히 책을 읽는 황상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공부를 해서 어디에다 쓰려고 하느냐고 비웃자, “우리 선생님은 귀양지에서 20여 년을 계시면서 날마다 저술에만 힘써 복사뼈(踝骨)가 세 번(三)이나 구멍(穿)이 났다”는 황상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훗날 황상은 당대 선비들이 극찬하는 시인이 되었다. 다산 정약용의 일화는 공부에서 재능이 아니라 노력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노력도 재능도 마음에 달려 있다
요즘 공부에 대한 미신이 너무 많이 떠도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뇌과학을 들먹이면서 ‘공부 머리는 10살이면 결정된다’고 단언하는 주장에 많은 학생들과 부모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에 대한 미신이 얼마나 심각한지 절감하고 있다. 이 주장대로라면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가 결정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한때 뇌과학에서 그런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사람의 두뇌가 12살에서 25살 사이에 엄청난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다고 밝혀졌다. 이렇게 뇌과학적 연구는 종종 뒤집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뇌과학의 진리가 있다. 바로 공부에서 재능과 노력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마음공부를 가장 중요시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 이유를 뇌과학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공부머리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뇌 중에서 대뇌피질의 전두엽이다. 그런데 10살까지는 주로 전두엽의 용량이 발달하지만, 10살 이후부터는 전두엽의 신경세포 간의 연결이 풍부해지고 연결 강도가 강해지면서 회로의 연결속도가 빨라져야 사고력, 판단력, 창의력과 같은 실질적인 공부머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10대는 우리가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 ‘사춘기’와 같은 시기다. 사춘기에 나타나는 흥분, 성급함, 충동, 이기심, 모험심 등의 감정이 때로는 게임 중독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잘 조절하면 생리학적으로 도파민이나 엔돌핀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활성화로 전두엽의 신경회로를 점화시켜 그 연결이 확장되고 강화되어 고도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바로 10대 사춘기때 공부머리가 재구성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공부머리에서 이러한 감정의 작용은 10대 사춘기뿐만 아니라 10대 이전에도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뇌과학적으로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학습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에 의해 얼마만큼 활성화되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흔히 감정뇌라고 하는 편도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기억뇌인 해마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아이가 행복하지 않으면 공부함을 담당하는 뇌의 기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조기교육에 매달려 아이에게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계속 주게 되면 오히려 뇌발달을 저해한다는 말과 같다. 아이가 행복감을 느껴야 창의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특히 아이들이 또래와 느끼는 동료애와 유대감은 감정뇌의 발달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잘못된 교육환경에 의해 경쟁심이 심어지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수학교육의 핵심적인 두 가지 목표로 창의성과 함께 ‘인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들이 함께 수학적 문제해결의 과정에서 서로의 아이디어나 생각을 경청하고 공유하여 나누고자 하는 배려심과 협동심과 같은 수학적 마음가짐의 지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수학자 데이는 “만약 수학이 단순히 실용적인 수단으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데 이용된다면 정리, 공식, 원리들을 암기해서 구체적으로 응용되는 문제에 적용해 철저하게 반복적으로 연습만 하면 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학교에서 그랬듯이 수학은 마음 훈련을 강화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 단계에 이르도록 교육함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한다. 학교 수학에서는 전문적인 수학자보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기를 강조해야 한다”면서 인성을 함양하는 수학공부를 강조했다. 이는 ‘PISA 2015’부터 학생 둘 이상이 함께 하는 ‘협력적 문제해결 능력’을 새로운 평가 항목으로 도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교의 경전인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 편에서는 학문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 ‘예시손마(豫時孫摩)’를 들고 있다. ‘예(豫)’는 미리 공부하여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는 마음을 의미하고, ‘시(時)’는 목적에 맞게 공부하여 때에 적절하게 깨달음을 얻음이요, ‘손(孫)’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공부하여 지나침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고, ‘마(摩)’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여 서로 본받으며 몸을 닦으라는 공부다. 특히, 공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본받으며 선을 닦아가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가슴을 교육하지 않고 머리만 교육하는 교육은 교육도 아니다”고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으로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