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그리고 수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함께 재능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재능과 수학에 대한 재능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생각의 움직임에 의해 즐거운 노력이 병행될 때 비로소 발현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생각의 움직임은 생각이 열려야 작동된다. 하지만 우리 교육의 현실은 아이들의 공부 재능과 수학 재능에 불이 채 붙자마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바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되는 지식쌓기 공부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부모가 과거부터 몸에 밴 당연한 공부법이기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이의 생각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눈앞에 보이는 지식의 습득에 열을 올린다.  

 

공부에서 정석의 추억은 아직 현재형이다
우리는 앞에서 『수학의 정석』과 함께 ‘공부의 정석’으로 머릿속에 박혀버린 추억의 공부법을 이야기한 바 있다. 학력고사 시절에는 『정석』을 몇 번 풀었느냐가 대학을 결정했다는 것도 모두 생생히 기억하는 추억이다. 그래서 소위 ‘SKY 대학’을 목표로 하는 전교 1∼2등은 중학교 때부터 『정석』을 풀었다. 하지만 수능 시대가 되면서 그 정석의 신화는 점점 퇴색하고 있다. 수능에서는 『정석』을 아무리 여러 번 풀었다고 해도 절대 SKY 대학을 가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게 공부해서 간 학생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거나 그야 말로 천재일 것이다. 
그 이유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과거 『정석』으로 공부하던 시절과 같이 개념과 공식을 암기하고, 그것을 대입해 문제를 푸는 방식의 공부로는 높은 수능 점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우리 아이들의 수학공부는 ‘정석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아래 그림은 공식 암기나 문제풀이 위주의 수학공부를 하고 있다는 학생들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한 결과이다.

 

<공식 암기나 문제풀이 위주의 수학공부>

※ 수학 사교육 실태조사(교과부, 2011), 수학 교과에 대한 학부모 의식조사(2013), 경기교육종단연구(2013) 재정리

 

평균 65% 수준이고, 더욱 특이한 것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런 현상이 더 뚜렷해 초등학생의 경우 70%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교육부에서 또 유명 교수님이 그리 공부하면 좋은 수능 점수를 얻을 수 없다고 설득해도 그 비중은 오히려 더 늘고만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리 공부하는 것이 당장 눈에 띄는 점수 상승효과가 뚜렷하고, 그 외에 다른 뾰족한 방법을 누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소위 ‘대치동 일타 강사’의 수능 풀이를 위한 ‘비법’이 최고의 교육상품이 되고, 수능이 평가하는 것은 학생의 실질적인 ‘대학수학능력’이 아니라 ‘문제풀이 속도’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이런 가운데 수포자는 점점 대량으로 양산되고, 이제 수학에 대한 ‘정석의 추억’마저 무색해지는 시대가 됐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수학함에는 지식쌓기와 생각열기 두 갈래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범적인 수학공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지식 중심’의 공부와 ‘생각 중심’의 공부다. 좀 포장된 용어로는 ‘개념이해 학습’과 ‘문제해결 학습’이라고 부른다. 앞 장에서 살펴봤듯이 교육심리학에서는 전자를 ‘인지주의’라고 하고, 후자를 ‘구성주의’라고 한다. 두 방법은 말로만 보면 다 그럴 듯해 보이고, 같은 맥락이므로 둘을 합쳐 놓으면 참으로 이상적인 공부가 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수학교육 방법론으로 보면 다르다. 겉모양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속내까지 전혀 다르다고 말하면, 당장 “뭐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뭐가 다른지 지금부터 보자.
인지주의에서 말하는 ‘지식 중심’의 ‘개념이해 학습’은 수학공부의 목적을 수학적 지식을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수학적 지식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학생에 의해 새로 만들어지거나 개선되지는 않는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가장 좋은 공부는 학습할 내용을 이해를 통해 의미 있는 기억으로 저장하는 것, 결과적으로 진정한 공부는 ‘기계적인 암기’보다는 ‘의미 있는 암기’라고 한다. 
구성주의에서 말하는 ‘생각 중심’의 ‘문제해결 학습’은 수학공부의 최우선 목적이 사고하는 방법을 배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본다. 학생들이 자신의 사고를 통해 스스로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수학적 지식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관점에 서 있다. 즉 수학적 사고력을 계발하는 공부가 진짜 수학공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습자가 스스로 창의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어떤 문제 상황을 분석해 추론하여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탐구의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학습자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탐구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공부가 진짜 공부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수학공부를 논할 때 무엇보다도 너무 중요한 관점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다. 특히 과거 『수학의 정석』으로 대학을 갔던 기성세대들은 그가 부모의 자격이든 교사의 자격이든 첫 번째 방법의 공부를 최고의 공부라고 확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현재 시중에 깔려 있는 EBS 교재를 포함해 내놓으라는 수학 교재라면 모두가 첫 번째 방법으로 공부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정말 의미 있는 암기를 잘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것이 가장 좋은 공부라고 믿기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냥 열심히 최선만 다하면 좋은 점수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학생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수학공부에서 ‘지식 중심’의 ‘개념이해 학습’과 ‘생각 중심’의 ‘문제해결 학습’이라는 두 갈래 길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바로 ‘남다른 생각’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한편에서는 아이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지식을 형성하지는 못한다고 하고,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구성해 간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정확한 지식’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남다른 생각’을 강조한다. 이 지경이라면 독자들도 헷갈리고 혼란스러울 것 같다. “도대체 뭐가 옳고, 뭘 어쩌란 말인가”라고.


소크라테스, 칸트, 다산까지 생각열기 공부를 말하다
다시 공부의 본질로 돌아가 보자. 소크라테스는 공부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학습자의 마음속에 들어 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식을 상기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히포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단단하고 확실한 수학적 지식을 배우고 싶다”고 청했을 때, “모든 사람은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그 자신의 힘으로 결정해야 하오. 나는 그대가 결정을 하는데 ‘산파’로서 도와줄 수 있을 뿐이오. ⋯ 내가 질문을 던지면 그대가 대답을 해야 하오. 이런 방법으로 그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오. 이 방법은 그대의 영혼 속에 이미 있는 지식의 씨앗을 꽃피게 하니까요.”라고 소크라테스가 답했다. 그의 어머니가 산파였기에 그리 비유해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육방법을 산파가 산모의 출산을 돕듯이 학습자의 내부에 있는 지식을 스스로 깨닫도록 옆에서 돕는다는 의미에서 ‘산파술’이라 부른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쌓기 공부’를 경계하면서 ‘남다른 생각’을 키우는 공부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열기 공부’라고 부르기로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철학을 공부하지 말고 철학함을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명사로서 철학이 아니라 동사로서 철학함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즉, 철학이라는 지식 자체를 배우지 말고, 철학함이라는 생각함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지식쌓기 공부가 아니라 생각열기 공부를 하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만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없었더라면 상대성 이론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칸트의 생각열기 공부에 대한 가르침은 현대의 철학자뿐만 아니라 과학자, 수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을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아흔아홉 번은 틀리고, 백 번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맞는 답을 얻어낸다”라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천문평(千文評)』에서 “가장 몹쓸 책이 천자문(千字文)”이라고 지적하면서, “천자문은 읽어서는 안 되고, 한자 공부는 형상이나 뜻 또는 주제별로 분류해서 익혀야 지혜의 구멍이 크게 열린다”는 뜻의 ‘문심혜두(文心慧竇)’를 강조했다. 그는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이 아이들이 배우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 천지부모(天地父母)로 시작하는 『아학편 이천자문(兒學編 二千字文)』을 펴냈다. 이 또한 지식의 본질에 다가가 터득하고 익힘으로써 지혜가 트이도록 하는 생각하는 공부의 중요성을 말함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수학교육의 주창자도 생각열기를 말하다
수학공부에 대해서는 프뢰덴탈(Freudenthal; 1905∼1990)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독일 태생이었던 프뢰델탈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아예 삶의 터전을 옮겨 지금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수학자이자 수학교육학자로 불린다. 그는 1960∼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수학교육 현대화 운동’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현실주의 수학교육’을 주창하였다. 이는 많은 수학교육학자들이 학교수학에서 프뢰덴탈 이전과 이후 시대로 나눌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말하는 ‘현실주의 수학교육’이란 추상적인 수학의 규칙보다는 실생활의 경험에 기초한 교육이다. 완성된 공식이나 형식화된 개념을 먼저 제시하고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훈련시킨 후 마지막으로 응용문제를 다루는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전통적인 교수법을 반대하며, 그 대안으로 의미가 풍부한 현실 맥락에서 출발하여 심상을 구성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념 형성으로 나가는 과정을 밟는 새로운 교수법을 제안한다. 특히 전통적인 교수법의 마지막 단계인 응용 단계의 대부분이 일반적으로 공식의 변수에 특수한 값을 대입함으로써 해결되는 기계적인 문제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응용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완성된 공식이나 형식화된 개념이 아니라 수학적 개념이나 원리, 관계 등이 적절히 반영된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뢰델탈이 비판하는 전통적인 수학교육은 바로 ‘정석의 추억’이 강요하는 그 수학공부와 너무나 닮아 있다. 한마디로 전통적인 수학교육은 완성된 공식과 형식화된 개념의 이해를 통한 ‘의미 있는 암기’에 의해 지식으로 쌓아가는 공부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쌓기 공부는 암기식, 숙달식 공부인 것이다.


남다른 인재는 남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교육에서 나온다 
이 책에서 바꾸라고 하는 공부는 기존에 알고 있던 방법과 많이 다르고, 결정적으로는 교과서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대다수 부모들은 정말 옳고 바른 공부인지 알면서도 망설일 것 같다. 내 아이의 남다른 풀이가 학교 시험에서 오답으로 처리되면 아이가 상처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는 이런 우리의 교육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아이의 남다른 미래를 위해 남다른 교육을 하는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어쩌면 탁월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남다른 생각이 존중되지 않는 교육에서는 절대 남다른 인재가 나오지 않으면, 남다른 미래 또한 창출되지 않는다. 그저 ‘남보다 뛰어난’ 교육에 목매고 있다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제는 남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서라도 응당 ‘남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은 스티브 잡스가 ‘남다른 생각’을 말하기 이전부터 지식의 시대에서 생각의 시대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당장 가정에서부터 아이의 남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키워주어야 한다. 
국가 교육정책의 목표로 ‘창의적인 인재를 미래 핵심 역량으로 육성’하겠다고 한다면, 먼저 학교 교육에서 남다른 생각을 존중해 주는 환경부터 조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교과서부터 바꿔야 한다. 교사부터 바꿔야 한다. 수업을 바꿔야 한다. 남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변화 없이는 절대 남다른 교육이 나올 수 없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최근 발표된 ‘제2차 수학교육 종합 계획’에서 ‘결과 중심에서 과정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할 것이라니 기대가 무척 크다. 이제까지 틀에 박힌 생각으로 ‘지식쌓기’ 수학을 해왔다면, 지금부터는 남다른 생각으로 ‘생각열기’ 수학이 되도록 과감히 탈바꿈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이번에는 정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이기를 학수고대할 뿐이다.


실수와 실패가 없는 공부는 생각이 멈춘다 
그런데 아이들의 ‘남다른 생각’에 주목하고 ‘생각열기 공부’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한 번도 실수와 실패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한 번도 새로운 것을 시도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고 꼬집어 말했다. 에디슨은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다만 만 가지의 틀린 방식을 발견했을 뿐이다”면서 실패를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그렇다! ‘실수와 실패’가 공부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교육이다. 앞에서 얘기한 공부의 두 갈림길에는 명확한 판단을 요구하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공부에서 실수와 실패를 용납할 것인가’의 문제다. 인지주의적 접근의 공부와 구성주의적 접근의 공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냐고 이분법적으로 재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공부에서 실수와 실패를 논할 때는 분명히 재단하고 싶다. 실수와 실패가 빠진 공부는 공부가 아니라고. 설령 실수와 실패를 유발하는 공부가 당장 학교 내신을 깎아먹고, 수능 등급을 떨어뜨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실수와 실패를 모르는 아이는 미래의 삶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생각하는 공부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아이들이 실수를 하는 경우다. 아이들 스스로의 생각으로 문제를 풀다 보면 작은 실수로 인해 오답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실수를 자꾸 허용하면 실수에 익숙해져 학습됨에 따라 당연시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실수를 마로 잡아주는 피드백을 받으면 실수는 학습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수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길잡이이자 디딤돌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오답이기 때문에 “너의 생각은 틀렸어. 이렇게 푸는 거야”라고 꾸짓다보면 아이가 자신의 실수를 실패로 받아들이게 되어 실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문제다. 그 순간 아이가 생각을 멈춰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이 아이는 문제를 풀 때 해법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차야할 작업기억 용량에 ‘시험이 어렵지는 않을까’하는 불안감과 ‘또 실수로 틀리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으로 가득해지기 때문에 실패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작업기억 용량은 개인차가 있을지라도 매우 제한적이라서 그나마 가용할만한 용량조차 엉뚱한 방해물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초등 연산학습에서 많은 엄마들이 학습지나 문제지를 통해 풀이 시간을 재고 맞고 틀린 것을 채점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지도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정답만이 수학이라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정답을 위해서는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 그래서 배운 대로만, 암기한 대로만 풀어야 정답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설령 배운 것과 다르게 푸는 방법이 떠올라도 절대 그렇게 풀면 안 된다. 실수로 틀릴지 모르고, 그건 곧 수학의 실패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아이들의 수학공부다. 
다시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보자. 히포크라테스가 “이번에는 당신의 방법을 제쳐두고 직접 해답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주문하자 소크라테스가 한 대답이다. 
“아니오, 젊은 친구여. 내가 할 수 있다해도 그렇게 하지는 않겠소. 그것은 그대를 위해서요. 힘들이지 않고 얻은 지식은 별 쓸모가 없소. 다른 사람에게 약간의 도움은 받더라도 자기 스스로 찾아낸 것이라야만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오. 이것은 식물이 땅에서 자기 뿌리로 빨아들인 물만이 그 식물에게 쓸모 있는 것과 똑 같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교육은 없다 
아직도 설득되지 않는 독자를 위해 다음과 같은 수업의 예를 들어 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덧셈의 결과가 10보다 큰 경우 어떻게 계산하는가에 대한 수업 상황이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먼저 둘 중 하나의 수를 갈라서 다른 수가 10이 되게 모은 다음 나머지를 10에 더하라고 가르친다. 가령 ‘’의 경우 ‘5’을 ‘’로 갈라 ‘’과 나머지 ‘2’를 더해서 ‘12’로 계산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그런 다음 아이들에게 “는 얼마일까?” 묻는다. 한 아이가 대뜸 “먼저 10을 만들면 답은 15예요”라고 답한다. 그러자 교사는 그 아이의 말을 끊고 아이에게 다시 설명한다. 아이는 고개를 끄떡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개운치 않은 표정이다. 이때 어떤 교사는 “너는 수학에 문제가 많아. 설명을 잘 듣지 않거든”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과연 누가 더 수학에 문제가 많은 것일까? 왜 그 교사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것인가? 그 아이는 ‘’를 만들어 놓은 다음 ‘1’을 빼려고 했다. 그런데 말할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 교사는 이 아이가 설명을 이해하지 못해 틀렸거나 실수를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틀리지도 실수도 하지 않았다. 분명 교사의 설명을 잘 듣고 이해했지만, 다른 풀이법이 떠올라 그 걸 말하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제대로 시도도 못해보고 한 순간에 설명도 잘 안 듣는 문제아가 되어 버렸다. 그 아이가 앞으로 수업에서 스스로 생각하여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 있게 발표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하기 마련이다. 어른들도 그러할 진데 아이들은 오죽 하겠는가. 그래서 훌륭한 부모나 교사라면 아이의 실수나 실패를 짜증이나 핀잔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창의적인 생각의 발견을 위한 반가운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특히, 아이의 실수 뒤에는 어른들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숨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발견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항상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 끝까지 들어주는 아량과 인내심이 없다면 교육은 없다.


실수와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면 그냥 암기한다 
물론 진짜 아이들이 모르는 경우도 있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어떤 아이가 다음과 같이 덧셈을 풀었다.
“888+222=101010”
당연히 답이 틀렸다. 사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 중에는 이렇게 답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어른들은 이런 답을 내는 아이에게 “이렇게 쉬운 덧셈도 못해”라고 답답해 할 것 같다. 어른들은 쉬운 문제로 보일수록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아이의 답에는 오개념이 포함되어 있지만, 반면 가능성도 오롯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실 이 아이는 덧셈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십진법과 자릿값의 개념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십진법과 자릿값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올림이 있는 덧셈을 푸는 방법만 계속 가르친다면 그 아이는 그 해법을 그냥 암기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천성이 착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아도 어른들이 자꾸 하라고 하면 꾸지람이 듣기 싫거나 잘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그냥 외우게 된다.  
답을 자주 틀리고 실수를 연발한다고 해서 수학 기피증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여 발견하는 즐거움을 빼앗기면 배움에 대한 흥미를 금방 잃어버린다. 이것은 수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아리조나 주립대 교수이자 교육학자인 콘스탄츠 까뮈는 “오답은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지적인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학생이 열심히 문제를 풀었는데 틀리더라도 그것이 실수나 실패가 아니라 생각을 한다는 것이며,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풀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아이의 생각대로 실수나 실패를 하더라도 절대 타박이나 구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이가 “또 틀렸어, 왜 못해, 그것도 몰라”라는 말을 자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을 잃게 되고, 수학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실수를 더 자주 하게 되고 결국은 실패로 점철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바로 부모의 그릇된 말 한마디가 아이의 생각을 닫히게 하고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발문은 실수와 실패를 생각의 밑거름으로 만든다 
그럼 어떻게 하면 아이의 실수나 실패가 오히려 생각을 여는 기회로 연결될 수 있을까? 그 해법은 ‘발문’에 있다. 이 발문이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발문은 질문과는 다르다. 교육학자들은 발문을 고도의 교수법이라고 말한다. 제대로 된 발문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의 핵심은 따로 있다. 발문을 고도의 기술이라고 교육학자들이 말하는 이유는, 교실이라는 환경에서 여러 아이들의 상황과 수준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지, 그 기술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가장 훌륭한 발문을 할 수 있는 내 아이의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의 소크라테스는 엄마’인 것이다. ‘생각을 생각하고 생각을 연결하는’ 발문이 진짜 발문이라는 것만 언급해 둔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2009 개정 초등수학 교과서의 교사용 지도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각 단원 중간에 ‘공부를 잘했는지 알아봅시다’는 단원 평가가 있다. 그런데 교사용 지도서에는 각 문제마다 ‘모범 답안과 유사 답안’이라는 채점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한 상자에 복숭아가 24개씩 들어 있는 상자가 4개 있으면 모두 몇 개인가?”라는 문제에 ‘모범 답안 및 유사 답안’ 란에 보면,

 

 [방법1]

 24개씩 4상자이므로, 24+24+24+24=96(개) 

 [방법2]

 24개씩 4상자이므로, 24X4=96(개) 

 [방법3]

 24개씩 2상자는 24X2=48(개)이고, 48개씩 2상자는 48X2=96(개) 

 

 

[방법2] [방법3] 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제시해 놓으면 교사들이 아이들의 답안지를 보고 어떻게 채점을 할까? 일단 3가지 방법 중에서 무엇이 모범 답안이고 무엇이 유사 답안인지 궁금해진다. 또 어떤 아이가 생뚱맞게 답안지에 “24개씩 5상자에서 1상자인 24개를 빼는 것과 같으니까, (개)”라고 답했다면 어쩌란 말인가? 더 의아한 것은 도대체 수학에서 ‘모범’과 ‘유사’로 나누어 답안을 제시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다. 혹시 “어째든 답은 맞았는데, 그렇게 푸는 것보다 이렇게 푸는 게 좋아”라고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건가? 모범과 유사를 구별하는 답안은 자칫 실수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정답 지상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  
아이들은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운다. 그런데 정답만 찾는 교육이 실수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면 아이에게 실수와 실패는 두려움이 된다. 그 순간 아이의 생각이 닫혀 버린다. 하지만 아이의 실수와 실패에 너그러울수록 아이의 생각은 더 커진다. 엉뚱한 생각에 “아니야, 틀렸어”라고 핀잔주지 말고, “정말이야, 왜 그럴까” 발문하라. 인간은 원래 ‘생각하는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