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의 스마트폰 전쟁

청소년 자녀를 둔 집집마다 스마트폰 때문에 전쟁이다. 아직 스마트기기 조절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주어야 하는 문제로 부모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요즘에는 중2병보다 더 무섭다는 초5병이 등장하고 있어서 스마트폰 때문에 부모와 갈등을 겪는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교칙으로 정하고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벌점을 부여하기도 한다.

몇 년 전 아이가 중1이 되던 해, 남편이 아이와 SNS로 더 많은 소통을 하고 싶다며 스마트폰을 사 주었던 것을 시작으로, 우리 집에서도 아이와의 스마트폰 씨름이 시작되었다. 아이와 SNS를 하고 싶었던 남편의 헛된 소망을 뒤로한 채 아이는 새로운 신세계로 저 혼자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당시 우리 부부는 아이가 스마트폰의 세계에 급속도로 빠져드는 것을 크게 염려했다. 공부에 소홀하게 된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뭔지 모를 좋지 않은 세력에 아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이른 시기부터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노출되면 전두엽 발달이 저해된다거나 빌게이츠 같은 IT 전문가들은 오히려 자기 자녀들에게 컴퓨터를 절대 사주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주워들을 때면 이런 불안감은 더 커져만 갔다.

아이가 스마트폰 사용을 조절할 수 있도록 스마트폰 사용 시간과 사용 기준을 함께 정하고 지키도록 해 보았다. 사용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제재를 주기로 하였다. 아이는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규칙은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규칙이 수정되고 추가되어도 아이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때가 많아졌고 그 때마다 규칙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갔다.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아이의 집착은 규칙 준수에 대한 의무감보다 더 컸던 것이다. 이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규칙의 부과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불신보다는 믿음으로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때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믿음’이었다는 결론을 내려 본다. 규칙을 자꾸 어기면서까지 스마트폰에 빠져드는 아이와의 갈등이 힘겨웠고 그런 아이를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중독에 빠지는 것 아닌가 하는 심각한 상상도 했었다. 불신에서 오는 불안이 아이의 행동을 필요 이상으로 통제하도록 했고 아이의 반항을 강화하게 하였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청소년 자녀의 행동을 통제하고 수정하려는 부모의 마음 속 진짜 동기는 불안이다. 불안은 불신(不信)에서 온다. 내 아이가 미래에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불안에 빠진다.

그러나 부모의 불안은 자녀의 불안을 낳을 뿐, 자녀의 행동 수정에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 못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믿음이란 곧 기다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자기 재산을 챙겨서 집을 나가는 것을 강제로 막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만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리라고 믿고 기다린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믿음대로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행복한 재회로 끝을 맺지만, 현실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믿어야 한다. 믿고 기다려야 한다. 내 아이는 잘 해낼 것이라고 믿고 그 믿음을 아이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아이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믿음의 모험이 필요하다. 어느 청소년부모세미나에 강사로 나온 유명 아나운서가 부모들에게 결론처럼 던진 말이 기억에 남는다.

“청소년 자녀에게 의도가 담긴 말은 되도록 하지 말라.”

섣부른 훈계는 청소년 시기 아이들에게 전혀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리라. 나는 다시 몇 년 전 그 때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늦게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사 주고 싶다. 동시에 규칙보다는 믿음으로, 아이가 스마트폰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고 아이를 기다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