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은 ‘공부 공화국’이다. 동서남북, 전후좌우 어디를 가나 온통 공부 이야기뿐이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벌써 수십 년에 걸쳐 우리가 살 길은 공부뿐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살길이라 한다. 이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공부 못하는 사람에 비해 잘 살 확률이 높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은 분명하다. 끼와 재능이라고 해서 음악이나 스포츠를 시켜봐야 상위 5% 안에는 들어도 안정된 생활아 보장되지 않는데, 공부에서는 상위 20% 안에만 들어도 잘 한다고 하고 안정된 생활까지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안전한 삶의 방법이 공부인 것은 분명하다.

 

상위 20%가 지배하는 파레토 법칙의 신화는 깨졌다
‘파레토의 법칙’이라면 웬만하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소득분포에 관한 통계적 법칙으로서, 이탈리아 경제학자 파레토(Pareto)가 유럽 제국의 조사 연구에서 얻은 경험적 법칙으로 흔히 ‘80:20 법칙’이라고 한다. 즉, 상위 20% 사람들이 전체 부(富)의 80%를 가지고 있다거나, 상위 20% 고객이 매출의 80%를 창출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80’과 ‘20’으로 갈린다는 뜻은 아니다. 전체 성과의 대부분(80)이 몇몇 소수(20)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파레토의 법칙은 불평등의 법칙이다.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상위의 20%가 더욱 많은 부와 권력을 창출해낸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원리다. 
하지만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이제 20%의 소수가 80%의 가치를 창출하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80%의 다수가 20%의 소수보다 뛰어난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룡의 긴 꼬리에 비유해 ‘롱테일(long-tail)의 법칙’이라고 한다. 한때 ‘아마존’의 온라인 시장을 일컬어 부르던 말이 이제는 벌써 오프라인 시장까지 확산되는 추세라고 한다. 파레토법칙과는 거꾸로 80%의 ‘일반 다수’가 20%의 ‘핵심 소수’보다 뛰어난 가치를 창출한다는 뜻에서 ‘역(逆)파레토법칙’이라고도 한다. 
파레토의 법칙은 안타깝지만 그동안 학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수업 이해도도 높고 공부하는 시간도 더 많다. 더구나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상위 20% 학생 위주의 수업운영과 교육지원을 한다고 해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한다. 이러저런 이유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더욱 잘하게 되고, 못하는 학생은 더욱 처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란 말은 ‘교육’이란 말과 동일시된다. 자식을 ‘교육시킨다’는 말은 ‘공부시킨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자식 자랑 중에 최고가 ‘공부 잘하는 아이’다. 그리고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시험 점수가 높다’는 뜻이고, 소위 SKY 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외에 딴 뜻은 없는 것 같다. 이래서 우리는 너나없이 공부를 외치는 것이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공부는 상위 20%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학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학교에서도 이제 ‘역파레토의 법칙’, 즉 ‘롱테일의 법칙’이 하나씩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지금은 조금 퇴색했지만 대학입시에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면서 학교에서 성적과 학력을 강조할 것인지 아니면 교우관계, 운동과 취미, 인성과 적성, 동아리이나 봉사활동 같은 ‘긴 꼬리’를 강조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게 대표적이다. 학습전략에서도 국·영·수 같은 주요 과목을 중심으로 진행할 것인지, 자신의 관심분야를 포함해 기타 과목이나 다양한 체험을 강조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핵심적인 상위권 학생을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과 일반적인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진행하는 수업 사이에서 고민할 수도 있다. 학교를 특성화할 때에도 상위 학생 20%가 중심이 되는 학교가 있는 반면, 나머지 80%를 중심으로 특성화하는 학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학교는 여전히 ‘경쟁’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부 공화국 대한민국은 공부가 곧 계급이다
최근인 2015년 초 EBS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5부작에 걸친 다큐가 방영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대한민국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로 산다는 것은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삶의 연속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동료들은 물론이고 교사와 부모까지 한심스럽게 보거나 대놓고 무시한다. 대한민국의 학교에는 공부라는 계급도 존재한다. 
“♬∼ 1등급은 스카이, 2등급은 인서울, 3등급은 국립대, 4등급은 지잡대, 5등급은 전문대, 6등급은 군대. 내가 무슨 한우냐 맨날 등급 매기냐. 나도 공부 하는데 친구만큼 안 나와. 부모 선생 보는 눈 친구한테 쏠리네. 내가 하고 싶은 꿈 성적 땜에 밀리네 ∼♬”
어느 고등학생이 만든 곡의 가사다. 이쯤 되면 공부 못하는 아이는 대한민국에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스스로 “잘하는 애들과 생각에서 하늘과 땅 차이, 극과 극”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대학을 갈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이렇게 절망한다. 
“나는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지? 나도 쟤랑 거의 비슷하게 공부했는데 왜 재는 나보다 월등하지? 나는 왜 이래? 내가 살아 뭐하나? 살 가치가 있나?” 
그런데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절망에는 작은 희망의 불씨도 보인다. “거의 비슷하게 공부했는데” 결과는 바닥이라는 것이고, 스스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다행스러운 것은 그 아이들이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고, 또 노력도 열심히 하려고 한다. 그 아이들이 노력을 안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미래를 버린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공부를 못할 뿐이다. 따라서 그 아이들이 노력한 만큼만 성과를 낼 수 있다면 상황도 좋아질 것 같다. 그것이 그 아이들에게는 바늘구멍과 같은 작은 희망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애들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못 깨우치는 애들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 아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이제 ‘공부 못하는 아이’, 과연 그들은 누구인지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할 것 같다.


공부 못하는 아이, “Who am I ; 나는 누구인가?”
몇 년 전부터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단골로 다루는 주제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얼마 전에는 모 지상파 TV에서 국내외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Who am I”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프로그램을 수차례 걸쳐 방영한 적도 있다. 이 질문은 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부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학교든 가정이든 공부를 잘하면 ‘좋은 아이’고, 못하면 ‘나쁜 아이’로 취급받는 게 일쑤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세태에 거북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아이들이 자신과 공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음과 같은 질문지로 알아보자. 이 책을 보는 독자들도 자녀에게 똑같은 설문을 해보기 바란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괜찮다. 단,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최대한 솔직하게 답변하도록 해야 한다.

그 동안 자신이 해 온 공부에 대해 생각하는 대로 솔직하게 줄긋기를 해 보시오. 
 

부모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답변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잘된다’일 것이다. ‘적당히 해도 잘된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부모라면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답변에는 속이 터질 것이며, ‘적당히 하면 안 된다’는 걸 당연시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보통’ 아이들은 공부를 ‘적당히 해도’ ‘잘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옆 친구와 비슷하게 적당히 공부해도 안 되고, 마음을 다잡아 전교 1등처럼 죽어라고 열심히 공부해도 안 되기에 절망한다. 

실제로 초·중·고 학생들에게 공부에 대한 태도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충격적이다. 부산교육연구소에서 2013년 ‘부산 지역 학생의 학업 무기력’ 실태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나는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질문에 초등학생 5.2% 중학생 19.4% 고등학생 13.0%가, 그리고 ‘나는 공부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는 질문에 초등학생 9.9% 중학생 32.5% 고등학생 43.6%가 ‘자주 혹은 언제나’ 그렇다고 답했다. 특히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해 무기력증이 심해지고, 더불어 대부분이 공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을 겨고 있다.

 

우리의 주제인 아이들의 수학공부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수학 국제성취도평가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는 핀란드와 수학 공부시간을 비교하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2배가량 많다고 한다. 실제로 2003년 PISA 결과에 따르면 아래 그래프와 같이 핀란드 학생은 하루 평균 4시간 22분 공부했지만 수학 점수는 544점으로 8시간 55분 공부한 우리나라 학생보다 오히려 2점 높았다. 일본 학생도 6시간 22분 공부했지만 534점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15세 청소년 국가별 학습시간과 수학 점수(단위: 점)>

 

또 다른 결과로 2009년 보건복지부의 ‘아동·청소년의 생활패턴에 관한 국제비교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15∼24세 학생의 평일 학습시간은 학교 수업과 사교육, 개인공부 시간을 합쳐 7시간50분으로 다른 OECD 국가의 평균보다 일주일에 15시간 더 많이 공부하지만 학업성취도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있다. PISA와 함께 또 다른 국제학력비교 지표인 ‘TIMSS(수학·과학 성취도국제비교연구) 2011’에 따르면, 50개 참가국 가운데 수학 성취도에서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은 2위, 중학교 2학년은 1위를 차지한 반면,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도’에서는 거의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OECD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조사에서 한국이 OECD 국가 중 6년째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사 결과가 말해주는 ‘불편한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학생들이 수학공부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세계 꼴찌 수준이라는 진실과 재미없고 하기 싫은 수학공부를 세계에서 가장 장시간 한다는 진실, 그리고 ‘열심히 애쓰는 공부’의 강요로 세계에서 자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진실이 불 보듯 뻔하다 보이지 않은가!


우리의 공부법 열풍, 학습과학이 통째로 뒤집다 
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공부법 열풍을 일으킨 책들이 있다. 공부법 열풍에 처음 불을 댕긴 책은 1996년에 출간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이다. 당시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서울대 수석과 사법고시 합격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승수가 그간 겪은 온갖 고생과 노력에 비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제목처럼 ‘개천에서 용’이 되게 한 공부법을 인생역전 드라마로 쓴 책이다. 그는 무작정 읽고 외우는 공부를 했다고 말한다. 국어, 영어는 물론 수학까지 깡그리 암기했다고 한다. 하루 19시간씩 오로지 외우고 또 외웠다고 한다. 그렇게 암기를 거쳐야 자연스럽게 응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시대 학생들은 그의 말대로 또 그렇게 암기와 반복에 매달리게 된다. 
아직도 공부법 하면 떠오르는 강성태의 『공부의 神』은 2007년 여름에 나오자마자 ‘상위 0.001% 공부법’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TV에서까지 실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시리즈로 소개되면서 공부법 열풍으로 다시 한번 후끈 달꿨다. 강조하는 점은 단순 암기식 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스타일에 맞는 공부법, 그리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공부법이라야 성적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학생 1명당 대학생 멘토 1명을 붙여 도움을 주는 ‘공신닷컴’을 설립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일명 ‘대치동 공부법’으로 통하는 조남호의 『스터디코드(2006)』 『스터디코드 3.0(2014)』도 그 열풍을 이어갔다.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바라지만 아무도 선뜻 말하지 못했던 한 문장, ‘이대로 무.조.건. SKY다’”를 모토로 공부 자극을 받아 공부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고 스스로 배우는 확실한 프로그램으로 ‘자기주도학습’을 히트 상품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2015년 현재 또 하나의 공부법 책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번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공부법이다. 도쿄대 수석졸업, 사법고시 및 1급 공무원 합격 후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인 야마구치 마유가 일본 최고의 ‘합격의 신’이라고 불리면서 일본 TV방송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7번 읽기 공부법』이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 즉시 몇 주째 연속 베스트셀러를 유지하고 있다. “그냥 7번 읽었어요”라는 간명한 방법으로 ‘책 한권을 머릿속에 통째로 복사한다’는 공부법을 설파하면서 10대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학습과학으로 밝혀진 공부 효과를 보면, 여러 번 읽으나 한번 읽으나 장기기억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공부법 열풍을 일으킨 책에서 말하는 공부 효과와는 정반대다. 더구나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반복 읽기를 통한 암기를 공부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공부법을 뒤집는 책이 2014년에 국내에서 선보인 바 있다. 바로 하버드대에서 출간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번역한 책이다. 학습에 대한 125년의 연구와 40년에 걸친 인지심리학의 연구 성과, 그리고 11인의 학자가 10년간 수행한 ‘교육현장 개선을 위한 인지심리학의 응용’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라고 한다. 동양의 공부 전통인 ‘반복 읽기’, ‘집중 학습’ 등이 잘못된 공부법이고, ‘시험 보기’, ‘인출 연습’, ‘분산 학습’, ‘교차 학습’ 등이 뇌기반 학습과학으로 밝혀진 과학적인 공부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인 공부법에 익숙해 있으면 처음 읽으면서부터 의심스럽고 믿기지 않지만, 세세한 사례와 뇌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제시해 설명한다. 일독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공부의 신들이 ‘말씀’으로 전하고자 하는 자기주도학습은 왠지 꺼림칙하다. 그들이 책임지겠다는 성적이란 결국 점수화된 실력을 의미하며, 머릿속에 기억된 학습의 수치적 표현일 뿐이다. 즉 시험 전날 학습한 내용에 대해 기억력이 좋은 학생이 높은 성적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때 기억이란 학습자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머릿속에 저장하는 행위라는 것을 전제로, 학습 내용에 대한 철저한 기억을 위해 반복훈련이 필수라고 한다. 그래서 복습하고, 복습하고, 또 복습하라고 한다. 그것이 자기주도학습이라 강조한다. 하지만 뇌기반 학습과학에서 말하는 ‘이해와 통찰’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주도학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짜 공부’가 아니다.


기존의 교육으로는 모두가 못하는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너나할 것 없이 기억력에 의존하는 공부, 지식을 암기하는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는 사실 교육환경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대학 입시이나 특목고 입시에서 내신 성적 중심의 ‘학생부’ 기록을 주요한 전형자료로 삼고 있다. 그러다보니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실시되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것이다. 문제는 중·고등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학교시험이 제한된 시험 범위 내에서만 출제되고, 더구나 중간고사에서 치른 내용은 기말고사에서는 대부분 다뤄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공부법은 시험을 앞둔 시점에서 집중적인 공부시간을 정해놓고 교재를 반복해서 읽고 암기하는 것이고, 암기한 것을 문제에 대입해 반복적으로 푸는 연습으로 풀이법까지 암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한가지에만 ‘집중하고, 집중하고, 또 집중하라’고 한다. 복습은 ‘읽고, 읽고, 또 읽어라’ 하고, 기술은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라’고 한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공부의 신’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시험공부 외에는 말하지 않는다. 경험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즉각적인 점수 향상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자마자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증발해 버린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물론 그러한 공부법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는 단언하지는 않겠다. 좀 호의적으로 보면 망각곡선에서 벗어나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공부는 기억을 집어넣는 반복연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꺼내는 인출연습에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하지만 너나없이 모두가 열심히 지식을 쌓는 기억 집어넣기에 열중하다보니 단기적인 기억으로 잠깐 머물렀다가 몽땅 망각해 버리는 것이다. 특히 시험에 대한 기피현상 때문에 쪽지시험과 같은 효과적인 되새김 전략이 학습 도구로 사용되지 못하는 수업 현장의 상황이 효율적인 학습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실 전통적인 공부는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암기의 공부를 해왔다. 서양은 18세기까지 암기식 교육을 중시하다가 19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지식의 창출이 요구에 따라 학교에서 경험과 원리를 탐구하는 교육으로 서서히 변하면서 암기식 교육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의 공부하면 서당 전통의 반복적 암기를 떠올리겠지만, 사실은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듯이 주로 소리 내어 읽는 되뇌기 공부를 했다. 실제 다산이나 퇴계는 단순반복의 암기식 교육을 가장 경계하기도 했다. 요즘 ‘거꾸로 교실’이 학교 수업의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새삼 유대인의 공부전통인 ‘하브루타’가 주목받고 있다. 대형 도서관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 내어 암송한 다음 격렬하게 토론하는 공부법을 말한다. 이러한 하브루타식의 공부는 학습과학에서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되뇌기’와 ‘되새김’을 함께 사용하는 공부법이다. 눈으로 읽는 것보다 부호화에 훨씬 효과적이고, 기억을 꺼내서 토론 과정에서 정교화함으로써 손때 묻은 지식, 감정 실린 지식, 뿌리 깊은 지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착시는 자신의 미래에도 착시를 가져온다 
이 순간 ‘부화뇌동(附和雷同)’이란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남들이 다 선행학습을 시키니까 나도 …, 남들이 공부만 열심히 시키니까 나도 …, 남들이 유형 풀이만 열심히 시키니까 나도 ……. 어느 누구도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가려고만 하지, 남들과 다른 ‘남다른’ 길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요령껏 알맞게’ 그래서 ‘적당히 잘하는’ 공부를 하자는 것이 당연할진데, 유독 ‘남다른’ 공부로 보이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누군들 자식 욕심이 없을까마는, 그 욕심이 그저 ‘열심히 애쓰는’ 공부가 아니라 ‘적당히 잘하는’ 공부에 욕심을 부리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남다른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다. 하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지 않던가! 
오른쪽 그림을 보자. 솔로몬 에쉬(Solomon Asch)의 ‘선분 실험’ 또는 ‘동조 실험’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는 이도 있을 것이다. 1955년 실시된 이 실험은 집단의 압박에 의해서 개인이 얼마나 무지해 질 수 있는가를 입증하는 유명한 실험이다. 7∼9명의 사람들을 둘러앉게 한 뒤, “왼쪽 카드의 기준선과 길이가 같은 선분을 오른쪽 카드에서 찾아라”는 질문이다. 마지막 답변자 1명을 제외한 모두가 바람잡이로 “A”나 “B”라고 오답을 말하면 실험 대생자인 마지막 답변자는 뭐라고 답하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12회 실시했는데 “A”나 “B”라고 답한 오답율이 무려 36.8%에 이르렀다. 2008년 EBS 다큐 ‘인간의 두 얼굴’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똑같은 실험을 한 결과도 역시 30%가 넘는 오답률을 보였다. 명백한 정답을 알면서도 자신을 제외한 집단의 오답 반응에 쉽게 동조한 것이다. 특히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동조하는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동조가 발생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확인했는데,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는 동조현상이 발생하지 않지만 바람잡이가 3명 이상부터는 동조현상이 점점 강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바람잡이 중 단 한 명이라도 다른 답을 말한 경우 오답율이 25%로 감소했는데, 이는 만장일치가 동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이 확인되었다. 바꿔 말하면 자신이 옳다는 판단에 동의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억눌린 지배력에서 벗어나기 수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2005년에 그레고리 번스(Gregory Berns)가 에쉬와 비슷한 실험을 통해 집단의 오답에 동조하는  답변자의 뇌를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장치)로 촬영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했다. 그런데 답변자들이 자신의 판단으로 정답을 말할 때는 시각인지와 공간인지와 관련된 후두엽과 두정엽, 그리고 의사결정에 연관된 전두엽이 활성화되는 반면, 집단에 동조해 오답을 말할 때는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전두엽의 활동이 도리어 줄고 시각인지와 공간인지와 관련된 후두엽과 두정엽이 더 활성화되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변자가 집단에 동조해 오답을 말할 때는 ‘내가 옳은 것 같은 데 이상하네, 나 혼자 다른 답을 했다가는 비웃음을 사겠는데...’와 같은 심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자신의 뇌가 이성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애초부터 인지과정에서 집단이 왜곡되게 보는 방식에 동조하면서 의식적인 판단을 멈추고 비이성적인 결정을 했던 것이다. 집단이 “A”로 보니 나도 “A”로 보는 것이다. 이는 집단의 위력이 마치 마약과 비슷함을 보여주는 실험 결과다. 
그런데 위의 두 실험은 우리나라에서 내 자식의 공부 문제에 관한 한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신문방송에서 선행학습이 잘못됐다고 그리 강조하고, 오죽하면 ‘선행학습 금지법’을 만들어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동조도 없이 오히려 현실에서는 선행학습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부모들이 내 자식의 공부 문제만큼은 무의식적인 뇌의 동조 현상에 빠지지 않고,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의사결정을 한다는 말인데, 과연 그럴까? 아니다. 또 다른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선행학습이 주는 착시 효과, 즉 ‘다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눈앞의 달콤함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헤집어서 말하면, 많은 부모와 아이들이 자신의 뇌한테 자신도 모르게 속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사실상 무지에서 오는 자신의 뇌에 대한 또 다른 동조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남들이 다 하니까’하는 부회뇌동의 심리가 발동하여 나의 판단이 집단과 다름에서 오는 배척과 고립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치니 아무리 선행학습이 잘못된 것이라고 설득해도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무지의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동굴 밖으로 나와라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국가』 7권에서 ‘동굴의 비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번은 들어봄직한 내용일 것이다. 
“지하의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사슬에 묶여 있는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이들은 머리를 돌릴 수가 없고 앞만 보도록 되어 있다네. 이들 뒤의 동굴 입구 방향 먼 위쪽에서 불빛이 들어오고 있네. 그리고 입구 쪽 불빛과 죄수들 사이에 담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것처럼 말일세. 이 담을 따라 온갖 것들을 담 위로 치켜들고 지나가면 죄수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게 될 걸세.” 
이렇게 동굴 안 죄수들은 평생 등 뒤의 불빛에 비춰진 벽면의 그림자를 이 세상의 진짜라고 확신하고 있다. 지금껏 그림자 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실제 모습이 아닌 그림자를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죄수가 우연히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그동안 자신이 평생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가상세계와 실제세계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시 동굴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애타는 마음으로 진실을 알렸다. 하지만 동굴의 다른 죄수들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에게 밖으로 나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면서, 나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 주고 동굴 밖으로 인도하려는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밝은 태양 빛 때문에 눈을 버려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자가 우리가 지금껏 속아 왔으며, 자신만이 진리를 안다고 떠드니 죽여 버리자는 것이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에 의해 고소당해 사형을 당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진실을 남들보다 먼저 깨닫고 그것을 전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고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장황하게 든 이유를 눈치 챘을 것이다. 문제풀이 반복, 의미 있는 암기, 선행학습 그리고 열심히 애쓰는 공부 등등은 동굴 속 그림자와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 독자들도 알 법한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 내용이다. 애벌레들이 거대한 기둥을 타고 위로, 위로 향해서 기어 올라간다. 왜 올라가는지, 올라가면 맨 꼭대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남들이 올라가니까 따라 간다. 앞서가던 애벌레들을 짓밟아 가면 먼저 오르려고 기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왜 올라가야 하는지 의심을 품고 행렬을 벗어난 애벌레만이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다. 나비가 되려면 동굴에서 행렬에서 벗어나야 한다.


에디슨, 아인스타인, 처칠도 적당히 잘하는 공부를 했다 
공부법에 대한 오해와 동조 현상은 사실상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시중에 널려있는 공부법에 관한 책이나 TV 프로그램의 제목을 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전교 1등, 상위 0.1%, 상위 1%’ 좀더 양보해서 ‘상위 10%’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전교 1등을 제외한 모두, 나머지 99.9%, 99%, 90%’는 그저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리고 그 ‘공신(神) 따라하기’가 결국은 최고의 공부법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그들이 성공했다는 ‘열심히 잘하는 공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접근이다. 우리가 주목하고 힘써야할 곳은 80∼90% 모두가 ‘적당히 잘하는 공부’다. 최근 EBS에서 방영된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은 “공부법을 모르는 아이”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머리가 나빠서 또는 노력을 안 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0.1% 또는 1%의 공부법만 따라하려고 했지 자신의 공부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적인 천재라고 칭송하는 아인슈타인, 에디슨, 처칠의 어린 시절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가 공부를 지질히도 못하는 아이였다는 사실이다. 금세기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네 살 무렵까지 말을 제대로 못했는데, 하필이면 가장 먼저 배운 단어가 ‘왜’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인슈타인이 여덟 살까지 저능아인 줄 알고 절망했지만, 그의 어머니만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초등학교때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장차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본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남과 아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 남과 같아서야 어떻게 성공하겠니?” 후에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한다. “똑같은 일을 비슷한 방법으로 계속하면서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아인슈타인은 ‘왜’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어머니의 도움으로 남다른 ‘생각을 생각’할 줄 알게 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창의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은 초등학교 시절 알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키려 하는 등 엉뚱한 행동을 많이 해서 당시 매우 보수적인 담당 교사는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 퇴학시켰다. 그러자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던 에디슨의 어머니가 스스로 선생님이 되어 주로 고전 읽기를 통해 상상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에디슨이 실험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창고에 온갖 실험기구들을 갖춰주고 ‘에디슨 연구소’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에디슨은 80세 생일날 “그 창고는 내 삶의 시작이었다”고 회상하며,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준 단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고 고백했다. 에디슨은 자신의 연구소 창고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생각을 연결’하는 탐구로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영국 수상 처칠은 노벨 문학상도 받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를 물리쳤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초라했다. 말도 더듬고 외모도 왜소해 백작인 엄격한 그의 아버지에게는 관심 밖에 난 아들이었고,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항상 놀림을 받았다. 그토록 보잘 것 없던 처칠을 바꾼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우울증과 부정심에 빠져 있던 그에게 “너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긍정심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처칠은 하버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단 세 마디를 했다고 한다.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라고. 처칠은 ‘생각에 몰입’할 수 있는 강한 자의식을 어머니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어린 시절 지질히 ‘공부 못하는 아이’였던 에디슨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처질이 세계의 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생각을 생각하고, 생각을 연결하고, 생각에 몰두하는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적당히 잘하는 공부’라고 했다. 2500년 전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25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공부의 본질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이러저러한 유혹과 착시에 휘둘려 잘못된 공부에 매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에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공부의 본질, 공부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유럽의 근대문명을 꽃피운 ‘르네상스 시대’가 고대 그리스·로마문화로 돌아가자는 데서부터 출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현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가야 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현재도 미래도 핵심 인재는 지식이 아니라 역량에 있다 
우리 현행 교육과정이나 교육정책에서 누차 ‘21세기’ 핵심 인재에 대해 명확히 정의하고 있다. 바로 ‘창의’ 인재다. 그리고 ‘21세기’라는 시기는 바로 현재 시점에서 벌써 시작되었다. 아득한 미래가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미래 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재도 미래도 결국 핵심 인재의 필요충분조건은 ‘창의력’이라는 말이 된다. 창의력은 무엇인가? 우리는 앞에서 누누이 ‘지식쌓기’와 ‘생각열기’에 대해 말했다. 창의력은 절대 지식쌓기 공부만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경지라고 했다. 그래서 생각열기 공부를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식을 얼마나 많이 쌓았는가 평가하는 지표는 보통 성적표에 찍히는 ‘학력’으로 비교된다.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우리 교육 현실에서는 여전히 ‘학력’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교육과정이나 교육정책에서 추구하는 ‘창의력’이라는 목적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겉과 속이 다른 교육과정이자 교육정책이란 말인가?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물론 교육의 목적과 현실의 괴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최근 들어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OECD의 ‘DeSeCo’ 프로젝트다.
OECD에서 1997년부터 시작해 2003년에 연구 보고서로 발표된 ‘DeSeCo(Definition and Selection of Key Competencies)’ 프로젝트는 학습자 개인이 생애에 걸쳐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역량과 기술을 규명하고, 인적자원의 질적 표준과 국가 학습목표의 기준으로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을 제안한다. DeSeCo에서 말하는 핵심 역량이란 “개인의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거나 잘 기능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가치 있는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학습자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핵심역량으로 ‘지적도구 활용', ‘사회적 상호작용’, ‘자율적 행동’ 및 이 3가지 핵심역량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사고력(thinking)’을 들고 있다. 
OECD의 DeSeCo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미국과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선진국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바로 교육과정의 개혁이다. 우리나라는 DeSeCo 프로젝트의 보고서가 발표될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가 교육과정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 2007 개정 교육과정부터다. 그 때부터 교육목적에 미래 핵심 인재로 창의적 역량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시정책에서도 수능과 정시 전형을 줄이고 ‘학생부’를 중심으로 한 수시를 늘리면서 논술과 함께 ‘입학사정관제’라는 획기적인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최근 몇 년에 걸쳐서는 ‘선행학습금지법’이 실시되고 ‘성취평가제’라는 절대평가와 소위 물수능이라고 하는 ‘쉬운 수능’이 도입되고 있다. 이러한 입시정책과 교육정책이 의도하는 본질적인 목적은 ‘무엇을 많이 아느냐’의 ‘지식’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의 ‘역량’을 평가하는 교육으로 전환해 나가겠다는데 있다. 이제 지식 중심의 학력이 아니라 사고력, 창의력 중심의 역량이 핵심 인재의 필수조건이 된 것이다.
수학교육과 관련해서 가장 큰 변화는 ‘스토리텔링’ 교과서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도입했다고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초등수학 교과서는 완전히 변했다. 물론 현행 초등 스토리텔링 수학이 놀이나 체험 중심의 활동이 아니라 4∼5줄씩 넘어가는 문장제 형태로 문자 중심의 문제 상황을 제시하다 보니 오히려 어려워졌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의 시도 그 자체만으로 크게 반길 일이라고 본다. 얼마 전 ‘제 2차 수학교육 종합계획’에서 밝혔듯이 조만간 더 장대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 하니 기대가 크다.


미래의 핵심 역량은 평생의 연장통을 갖추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누구나 평생 대여섯 번은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현재 학생 신분인 아이들의 미래에는 그 이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대가 갈수록 지식과 기술의 주기가 짧아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3D 프린팅 기술과 사물인터넷의 상용화는 첨단 산업이 아닌 일반 산업 분야에도 거대한 파괴적 혁신을 몰고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렇게 산업의 질서가 급변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직업들이 속출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직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다. 이제 죽어라고 공부해서 소위 명문대를 나와 첫 직장을 수월하게 얻는다 해도 평생 보장이란 없다. 
앞으로 살아가야할 세상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잘하는 공부’에는 남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사실상 평생직장이 사라지는 학생들의 미래에서는 새로운 직업을 구할 때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평생학습의 시대를 준비하는 교육은 ‘잘하는 공부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생에 걸쳐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인생의 연장통’을 갖추는 것이다. 그것은 곧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잘하는 공부법’이라는 연장통이 될 것이다. 요즘은 서울대, 연·고대뿐만 아니라 하버드대와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강좌가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로 공개되어 있어서 누구나 돈 한 푼들이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세계 최고 수준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배우고 익혀 평생에 필요한 자신의 자산으로 만들 것인가에 있다. 
결국 ‘잘하는 공부’는 엄청난 지식을 쌓기 위해 장시간 노력하는 교육으로는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평생직장이 사라지는 시대에 평생학습을 하면서 살아가야할 현재의 학생들은 미래의 먹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혁신할 줄 아는 공부가 ‘잘하는 공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잘하는 공부’는 똑똑하고 효율적인 공부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공부의 혁신’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이제 ‘생각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생각이 열리는 공부를 통해 생각을 생각하고, 생각을 연결하고, 생각에 몰입하는 공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 작금의 교육현실에서 무엇보다도 중차대한 혁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적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평생 가지고 다닐 공부의 기술, 생각의 연장통을 하나씩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은 이 시대의 가정과 학교의 임무이자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학생들이 살아가야할 앞으로의 미래는 그것을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엄청난 인생의 격차가 점점 벌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생각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더구나 잘못된 공부로 인해 학생들 사이에는 점수나 성적보다 미래 핵심 역량에서 개인차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머지않아 생각의 격차가 곧 인생의 격차로 귀결되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 시라도 빨리 그것을 가르쳐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미래 먹거리로 생각기술, ‘생각공부’의 연장통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뜻이다. 운전면허증을 땄다고 해서 바로 운전하기 어렵듯이, 테크닉만 배운다고 해서 바로 생각하는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장인이 오랜 숙련을 통해 기술을 손에 익히듯이 생각하는 기술도 시간과 연습을 통해 습관처럼 자신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기술, 생각하는 공부를 익히게 하는 것은 평생을 두고 다닐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인생의 연장통을 선물해 주는 것과 같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높은 점수와 석차가 적힌 성적표가 아니다. 물론 좋은 성적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생 도움이 될 만한 전략과 기술을 갖추게 해야 학생들의 미래에 더 큰 이득이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단순히 지금 당장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더 좋은 인생을 만들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줄기차게 부르짖으면서 강조하는 일관된 주장이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지식보다는 생각, 현재보다는 미래, 학력보다는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했다. 그리고 생각을 생각하고 생각을 연결하고 생각에 몰입하는 '생각공부'를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이 책의 결론으로 열심히 애쓰는 공부에서 적당히 잘하는 공부로 당장 바꾸자고 마지막 일성을 토하고자 한다.

 

공부는 일생에 걸친 업이요 삶이다 
여기까지 독자들과 함께 오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려 했다.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의 수학공부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공부는 왜 하는가’라는 성찰로 이어지는 공부의 본질을 함께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를 함께 궁리하면서 공부의 목적을 뚜렷이 새겨 보았다. 또 우리 뇌가 ‘공부를 잘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를 찾아봄으로써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그 방법까지 알아보았다. 이 모든 여정은 공부라는 것이 우리 일생의 업이요 삶이기에 “나는 누구인가 ; Who am I”에 답하는 과정이나 다를 바 없다. 독자가 부모라면 ‘아이의 공부’ 이야기는 결국 ‘나의 공부’ 이야기와 다름이 없음을 또한 깨달았을 것이다. 
철학은 한가한 지적 유희가 아니었다. 철학이 추구하는 모든 진리나 가치는 공부를 통해 입증되고 실현되어 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철학을 논하기 전에 공부를 먼저 말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모든 악의 근원을 무지라고 했다. 스피노자는 한술 더 떠 ‘얼치기(부분적) 앎’을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깨우침으로 경계하라 했다. 하지만 ‘진짜(전체적) 앎’은 일생을 통해 플라톤의 캄캄한 ‘동굴’을 박차고 나오려는 용기와 고난이 이어질 때만 다다를 수 있는 광명이다. 이것이 지금껏 철학에서 말해왔던 공부요, 인간의 문명사가 증명해온 공부다. 그래서 기원전의 공부나 현재의 공부는 그 본질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공자는 타인과 다른 자신만이 내세우는 됨됨이를 ‘호학(好學)’이라고 말했다. “열 가호쯤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나처럼 충직하고 신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공자는 그 누구보다도 배움을 사랑했다. 늙어 죽을 때까지 배움이 좋아서 배우고 또 배우고자 했다. 그에게 공부는 일생의 업이자 삶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교육열은 세계인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 뜨겁다. 누구는 세계 문명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열이라고 한다. 하지만 배움을 사랑하는 진심에서는 우리와 공자는 좀 다른 것 같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화이트헤드(Whitehead)가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칭송했던 플라톤은 루소가 “인간 교육에 대한 세계 최대의 논문”으로 극찬한 『국가』에서 어떻게 하면 아테네를 이상 국가로 만들 것인가,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아테네 시민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런데 플라톤의 『국가』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몰락해 가는 시점에서 써졌기에 전사들을 길러내지 못하면 존속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모든 교육의 이념과 목적은 이상적인 전사를 양성하는 데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직접 민주정치가 군사독재나 금권정치보다 더 나쁘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하는 교육은 파시즘과 다를 바 없었다. 가혹한 육체적 규율의 강요, 철저한 재산의 공유, 혈연의 가족을 해체한 우생학 위주의 시민, 국가가 결정하는 결혼, 희로애락의 음악과 연극의 추방 등등 그야 말로 폭정에 가까운 교육이었다. 이러한 괴이한 교육론도 그가 처한 아테네의 현실 속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이상이었다. 물론 플라톤은 말년의 저술인 『법률』에서 완벽한 이상국가 다음의 국가 형태로 합리적 법치 중심의 민주국가를 설계해 제시하기도 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표방하는 노골적인 엘리트주의 교육은 현재 우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교육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세계 유례없는 교육열의 이면에는 이기는 자만 살아남는다는 경쟁의 논리와 점수는 실력이요 미래의 보증수표라는 출세 지상주의, 따라서 절대적인 불변의 지식을 외우고 암기하는 주입식 교육으로 자신의 이상을 출세로 실현하라는 엘리트주의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플라톤의 교육론이 당면한 시대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산물이라고 평론하듯이, 그동안의 우리 교육이 6.25 전쟁후 세계 최빈국에서 현재 세계 경제 강국과 어깨를 견줄 정도까지 이르게 한 동력이라는 데에 굳이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제 지식의 시대가 가고 생각의 시대가 도래한 이즈음에, 우리는 교육의 르네상스를 통해 한 걸음 더 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새로운 현실에 당면해 있다. 우리 스스로가 소크라테스와 공자 그리고 퇴계, 율곡, 다산이 말한 공부로 돌아가지 않으면 더 이상의 장밋빛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군사독재와 산업화 시대로 이어진 잘못된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강조함이다.    
공부의 르네상스가 우리에게 일관되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핵심은 ‘공부는 일생의 걸친 업이요 삶이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말한 ‘무지’로부터 깨달음은 일생의 ‘어두운 동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공부로 실현되는 것이며, 공자가 말한 ‘호학(好學)’으로 ‘불역열호(不亦說乎)’하라는 가르침 또한 삶이자 업으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리라는 말일 것이다. 일생의 업으로 삶으로 하는 공부에 대해 퇴계 이황은 출세와 명성을 구하는 학문, 즉 ‘위인지학(爲人之學 ; 남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닦는 학문, 즉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를 위한 학문)’을 하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현실에서 가장 가슴에 다가오는 권고는 성리학의 주자가 위기지학에 70%, 위인지학에 30%를 할애하라는 말이다. 학창 시절의 공부를 논할 때야 선후와 경중이 있을 수 있겠지만, 평생에 걸쳐 업이자 삶으로 하는 공부에서 그 구별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적당히 잘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다 
지금껏 줄곧 ‘열심히 애쓰는 공부’에서 ‘적당히 잘하는 공부’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을 뿐이다. 다른 집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두가 열심히 애쓰는 공부만 하라고 하는데, 내 아이에게만 적당히 잘하는 공부를 하라고 자신 있게 말할 부모가 몇이나 될까? 적당히 잘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라는 것이 분명한 진실이라는 것을 과연 믿을까? 잘못된 판단에 대한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조현상으로부터 과감히 “아니다”고 천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설적이지만 에쉬의 실험에서 그 작은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만장일치가 아닐 때, 즉 단 한 사람이라도 다수와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용기를 내어 자신의 믿음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비록 단 한 사람일지라도 분명하고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뿐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동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 진실의 세계를 단 한번이라도 경험해 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 주려고 한 ‘동굴’ 밖 세상의 진실은 그저 작은 일부분일지 모른다. 지금껏 ‘열심히 잘하는 공부’는 극소수의 추억이며 때론 헛된 기대일 뿐이라는 진실, ‘열심히 해도 못하는 공부’가 대다수이고 그 때문에 ‘절망한다’는 진실, 그리고 ‘적당히 요령껏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다’는 진실, ‘적당히 잘하는 공부’를 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잘하는 공부’로 자연스럽게 바뀐다는 진실을 이 책에서 누누이 증명하려고 애썼다. 이제 독자들이 나머지 넓디넓은 세상의 진실, 공부의 진실을 찾아 스스로 나서야 할 때이다. 
이제 하나씩 마무리해 보자. 공부 문제의 본질은 공부만을 최고로 생각하는 현실이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현실,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는 상위 1% 학생들이 하는 것처럼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성적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무턱대고 ‘열심히’만 하는 공부가 아니라 ‘요령껏’ 효율적으로 ‘적당히 할 줄 아느냐’의 차이에 있다. 열심히 하겠다고 상위 1% 학생보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공부 시간을 늘린다고 해서 당장 성적이 오를리 만무하다. “나도 쟤랑 거의 비슷하게 공부했는데... 나는 왜 이래? 내가 살아 뭐하나?”라는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당히 잘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적당히 하는 공부가 잘하는 공부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생각’에서 시작해야 한다. 남다른 생각으로 집중하는 ‘남다른 공부’가 될 때 적당히 잘하는 공부가 된다. ‘열심히 공부’하는 1%의 공부법을 따라가지 말고 ‘열심히 생각’하는 99%의 공부법을 바로 세워야 한다. 지금부터 생각을 생각하는 메타인지를 작동하여 생각을 열어가는 공부를 시작하자, 생각을 연결하는 스키마의 확장으로 생각을 이어가는 공부를 하자, 생각에 몰입하는 자의식의 조절로 생각을 매듭짓는 공부를 하자. 이것이 “적당히 잘하는 진짜 공부다.” 이제 열심히 애쓰는 낡은 공부에서 적당히 잘하는 새로운 공부로 당장 바꾸자. 
마지막으로 지금 현재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가 됨직한 40십대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아마도 9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로 당시에는 처음으로 독립적인 세대 명칭으로 ‘X-세대’라고 불렸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흔히들 우리 역사상 가장 큰 풍요를 만끽한 세대라고도 한다. 물론 90년대 말 ‘IMF’가 닥쳤지만, 실제 가장 큰 희생양이 된 세대는 현재의 50∼60대들이란 것도 잘 알 것이다. 최근 모 TV 예능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를 모으면서 새삼 주목 받고 있는 세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주목하고 싶은 점은 ‘X-세대’인 지금의 40십대가 우리 사회의 중추로 부상하면서 불고 있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다. ‘적당히 일하면서 즐길 수 있는 삶’의 추구, 이것을 문화 평론가들은 90년대 긍정적 가치라고 평론 하더이다. 그래서 과거 ‘X-세대’, 현재 40대, 지금 또는 머지않은 초등학생 부모들은 ‘적당히 잘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마음으로 느껴질 것이라 기대한다. 이제 당신들께서 나서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교육혁신은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