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 잘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

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노래를 잘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수학을 싫어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학을 잘 못 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있고 싫어하는 것이 있으며 잘하는 것과 잘 못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싫어하고 잘 못 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정리해서 보면 (1)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기도 하는 것이 있고, (2) 좋아하지만 잘 못 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3) 싫어하지만 남보다 잘하는 것이 있고, (4) 싫어하기도 하지만 잘 못 하기도 하는 것이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잘 못 하는 것을 억지로 하라고 강요받기도 한다. 좋아하는데도 잘 못 한다고 해서 그만하라고 야단맞기도 하고, 좋아하고 잘한다고 해서 그렇게만 하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다면 아이의 진로나 장래를 위하여 잘하는 것을 하라고 시킬 것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시킬 것인가? 물론 아이들이 성장의 과정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 다르고 자라서 다르기도 하다.

좋아하던 것도 어느 시기에 이르면 싫어지기도 하고 남보다 잘하던 것도 자라서는 상대적으로 뒤 쳐지는 수가 있다. 그리고 성장의 과정은 단순히 신체적·정신적 능력의 일정한 향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범위의 계속적인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또 새롭게 경험하게 되고, 관심과 취미도 이에 따라 달라지면 잘하고 못하는 것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긴다. 그런데 그 경험세계도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듯이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고 특히 성장의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기도 한다.

부모 세대가 경험한 것과 자식 세대가 경험하는 세계는 다르고, 자식 세대의 경험도 어릴 적의 것과 성장한 적의 것이 다르다. 오늘날 휴대폰의 경우를 보면 실감할 수가 있다.

예컨대 2.0 버전을 사용하는 데 제대로 익숙하기도 전에 3.0 버전이 나온다. 새로운 기능이 있고 그것에 익숙하면 여러 가지로 더욱 편리하게 사용할 수가 있다. 거기에 채 익숙하기도 전에 또다시 새로운 기능을 가진 4.0 버전이 출시된다.

많은 새로운 기능을 익혀 사용 하면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유용한 많은 일들을 손쉽게 할 수가 있다. 새로운 것, 또 새로운 것, 5.0, 6.0 계속해서 새로운 것이 나오면, 돈은 들지만 아이들 은 재미있게 적응하지만 어른들은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어른들은 변화에 적응하는 데 아이들에게 뒤진다. 휴대폰의 경우만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이와 같이 바뀌고 있다. 특히 컴퓨터가 적용되는 분야가 그렇고, 새로운 정보 과학기술을 적용한 모든 분야가 그렇다.

편리하고 정확하고 경제적이고 유익한 많은 것이 새롭게 나타나서 우리의 생활조건을 끝없이 바꾸어 놓는다. 새로운 변화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시 새로운 변화가 닥쳐오고 그 과정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오늘의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바우 만(Zigmunt Bauman)은 ‘유동적 현대’라는 말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는 부모나 교사나 학생 자신도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관심의 대상이 다양해지고 또 끝없이 변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한 가지에 매달리지 않고 잘하는 것도 어느 것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려워진다.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

어떻든, 아이가 좋아한다는 것은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즐겨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잘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잠재력이 다소 그 방면에 있음을 비춰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잘하고 있다는 말은 그 일과 관련하여 아이의 ‘잠재적 능력’의 한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당사자의 ‘내재적 동기’가 주도한다는 말이다. 좋아하고 즐기는 성향을 바꾸자면 ‘외재적 동기’ 예컨대 부모나 교사는 칭찬이나 징벌이나 회유 등에 의해서 관심과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게 해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잘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의 질문은 바로 내재적 동기와 잠재적 능력의 어느 것을 더 중시할 것인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활동, 특히 의도적인 활동에는 그 활동을 하게 하는 어떤 심리적인 힘이 작용한다. 어떤 욕구, 필요, 의지와 같이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것도 있고, 입지(立志), 포부, 소망, 집념 등과 같이 다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것도 있다.

그 힘을 일컬어 심리학에서는 ‘동기’라고 하고 모든 의식적인 행위와 활동에는 크고 작고 간에 어떤 동기가 작용한다. 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동기의 개념은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거기에 작용하는 그 행위자의 내면적 혹은 외부적 힘을 의미하고,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와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로 구분하기도 한다.

정원식 교수는 각각을 ‘내인성 동기’와 ‘외인성 동기’라고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인간의 동기」, 제6장, 2001) 동기의 근원이 행위자의 안에 있느냐 아니면 밖에 있느냐로 구분하는 표현으로 보면 그러한 번역은 두 가지를 구분하여 이해하는 데 명확한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로 표현한 것은, 동기란 의미상 어떤 가치를 선택하거나 지향하거나 추구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내재적 동기는 내재적 가치를, 외재적 동기는 외재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떤 행위나 실체의 내재적 가치는 그 행위 혹은 실체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지닌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고, 외재적 가치는 그 행위 혹은 실체가 그 자체가 아닌 어떤 다른 것의 목적에 대하여 수단 혹은 도구로서 지니는 가치를 의미한다.

내재적 동기는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고 외재적 동기는 외재적 가치(혹은 수단적 가치)를 위한 것이다. 과학자는 어떤 법칙이나 이론을 이해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새로운 연구를 위한 가설을 설정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일을 한다.

탐구자로서의 활동 그 자체에 몰두해 있고 그 과정을 즐기고 희열을 경험한다면, 그 자체가 연구자에게 보상이며 또한 활동이 지향하는 내재적 가치이고 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내재적 동기이다.

그러나 그 과학도가 행한 일련의 탐구활동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목적하는 바는 영리나 명성이나 지위 등의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 힘은 외재적 동기에 해당한다.

한 학습자가 공부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학습에 종사하면 내재적 동기에 의한 것이고, 칭찬을 듣거나 징벌을 면하거나 일등 하거나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외재적 동기에 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학생이 수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수학의 질서와 세계를 분석하고 조작하고 이해하는 과정 그 자체만을 즐기지는 않는다. 애초에는 오히려 어떤 칭찬이나 보상을 통한 외재적 동기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고, 내재적 동기에 지배되는 단계는 상당한 정도의 학습경험이 진행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은 부모는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초기에는 칭찬도 하고 야단도 치면서 가르쳤지만, 아이는 나중에 피아노를 무엇보다도 즐기는 생활을 하게 된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학습이나 노력에는 반드시 어느 하나의 동기가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함께 공부하고 제자의 성장을 보면서 사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어서 교직에 애착을 버리지 않고 헌신의 생활을 하는 경우, 즉 교직의 내재적 동기에 충실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때로는 주변에 눈을 돌려보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타인과 비교할 때, 예컨대 한 친구가 자기보다 막강한 권력의 행사를 즐기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자기보다 풍요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자신의 내재적 동기가 희석되기 시작할 수도 있다.

한 학생이 평소에 문학이나 과학이나 어느 분야에서 그야말로 내재적 동기에 지배되어 공부를 즐기고 그 자체로서 보상을 받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학년말에 보니 일등은 다른 친구가 가져가고 소위 일류대학에 진학하기도 어렵게 되고, 아무도 자기를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으며, 더 이상 공부 그 자체의 즐거움에 빠져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적어도 어느 수준의 외재적 가치의 요소가 따르지 않으면 내재적 동기만으로 자신의 활동과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내면적 만족과 외재적 보상은 어느 정도의 균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학습이나 사업이나 생애나 간에 내재적 동기의 작용이 없을 때, 즉 외재적 동기로만 세상을 살 때, 인간은 참된 의미의 자유로운 삶을 향유할 수가 없다.

나의 활동과 생활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며,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닌 상태로 존재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목적과 의미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한 세계의 어떤 것을 위한 것일 뿐이다.

돈의 노예가 되었거나 권력에 눈이 어두웠거나 공명심으로 자신을 팽개치고 있거나 할 뿐이다. 내재적 동기 혹은 내재적 가치에 따른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세계, 즉 자신이 즐겨 삶을 유지하는 세계를 소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학습의 과정에서나 생활의 세계에서나 가치영역의 절대적 부분이기도 하다.

다시, 아이에게 좋아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잘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의 질문에 대하여 우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좋아한다는 것은 내재적 동기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아이의 긍정적 자아 형성에 좋은 것이 아니므로, 적어도 외재적 동기보다는 내재적 동기가 주도할 수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외재적 동기로 시작하여 내재적 동기로 전환하는 것이 때 때로 가능하기 때문에, 상벌이나 보상의 방법과 같은 외재적 동기의 유발은 일시적 수단으로 사용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외재적 동기의 유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내재적 동기의 지속적 유지 자체를 어렵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으로 변하여 어떤 공부가 외재적 동기에 지배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공부와 관련하여 아이가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것을 관찰하거나 아니면 좋아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는 있고, 그것이 불가능하여 아이가 상벌과 강제 등의 외재적 동기에 지배되는 상태로 묶어 두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잠재력의 발견을 위한 기획

그러면 좋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시킬 것인가? 좋아하는 것도 그것이 요구하는 능력이 없으면 좋아하는 것 그것만으로 보람된 인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내재적 동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좋아하는 것에의 보상은 만족감이고, 만족감이 지속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좋아할 수 없게 된다. 바로 내재적 동기는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흔히 ‘소질’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으면 만류하는 것이 보통이다.

쉬운 대답은 적어도 잘할 수 있는 소질, 말하자면 좋아하는 것 그것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잠재력은 일종의 성향(disposition)이다. 사물의 성향도 그렇지만 인간의 성향은 숨겨진 것이지 지금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잠재력도 일종의 성향이라는 말은 숨겨진 것이지 나타난 능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숨겨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휘발유는 가연성, 즉 불에 탈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휘발유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어떤 수준의 고온이 일시적으로라도 주어져야 불이 붙고 탄다. 어떤 아이가 공격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항상 남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심의 어떤 요소가 작용하여 좌절을 경험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공격적 성향이 파괴적 행동으로 관찰된다. 어떤 성향이 있다고 말할 때, 특정한 조건 혹은 환경이 주어지면 기대한 실제의 행동이 나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성향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게 하는 조건 혹은 상황이 주어져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잠재력의 유무를 파악하려면, 그것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 여건, 조건 혹은 상황을 제공해 보고 기대한 결과가 관찰되어야 한다. 아이가 어떤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휘될 수 있는 경험의 장을 제공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경험(혹은 학습)의 장이 제공되지 않고는 잠재력의 유무를 파악할 수가 없다.

부모들은 아이가 여러 가지의 경험을 하는 것은 아이의 건강한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박물관에도 데려가고 축구도 시켜보고 여행에도 데려가고 연극도 시켜보고 바이올린도 가르쳐 본다.

여러 가지의 폭넓은 경험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의 장에서 부모나 교사나 학생 자신이 어떤 능력이 실제로 발휘되고 있고 어떤 상황을 잘 감당하며 무엇을 즐겨하는가를 할 수만 있으면 체계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